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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인간 루터를 보다 … 종교개혁 500주년에 읽는 문제작
역사가, 인간 루터를 보다 … 종교개혁 500주년에 읽는 문제작
  • 김응종 충남대 교수·서양사
  • 승인 2017.02.0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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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_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은 어떤 책인가?

“루터의 전기인가? 아니다. 루터에 대한 평가인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책일까. 뤼시앵 페브르의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김중현 옮김, 이른비, 2017.1) 1928년 초판 서문에 저자인 뤼시앵 페브르가 쓴 글이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 ‘마르틴 루터’를 조명했다는 것 자체로도 이 기념비적 해에 새롭게 조명될 수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은 좀더 들어간다. “단순하지만 비극적이었던 한 운명곡선을 보여주는 것, (……) 어쩌면 역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인 한 개인과 공동체 또는 개인 주도와 사회적 필연과의 관계 문제를 놀라운 활력을 가진 한 인간에게 적용해 제기해보는 것, 바로 그 시도가 우리의 계획이었다.” 종교개혁 400주년이 있고 난 10년 뒤인 1927년 8월 루시앵 페브르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그 책이 불문학자인 김중현 한국외대 프랑스어과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유려하게 번역됐다. 해제는 김응종 충남대 교수(서양사)가 맡았다. 그의 해제는 「역사가, 인간 루터를 보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분량은 200자 원고지 36매 정도다. 짧은 해제지만, 이 책의 의미 급소를 단번에 쳐내면서 루터 읽기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다. 김응종 교수와 출판사의 허락 하에 해제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1956년에 뤼시앵 페브르가 타계하자, 그의 학문적 계승자인 페르낭 브로델은 그를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말했다. 비록 추모의 글에서 나온 평가이기는 하지만, 페브르의 역사학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의 학문적 삶은 세 가지 길에서 이뤄졌다. 첫 번째는 연구자의 길로서, 페브르는 1911년에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 1567년 위기의 기원과 결과에 대한 정치적·종교적·사회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1928), 『16세기의 무신앙 문제: 라블레의 종교』(1942), 『오리게네스와 데 페리에 혹은 ‘심발룸 문디’의 수수께끼』(1942),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 사랑』 등을 발표했다. 그가 역사방법론으로 제시한 ‘문제사’는 궁극적으로 역사가 당대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것인데,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에서는 독일 문제가, 『16세기의 무신앙 문제』에서는 무신론 문제가 다뤄진다. 페브르가 이렇게 ‘문제사’에 천착한 이유는 순수학문이라는 독일 역사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 역사학도 현실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바로 이것이 그가 주도한 아날 학파의 연구 방향이기도 했다.

▲ 루터를 신학자의 시선이 아닌 역사가의 시선에서 조명한 뤼시앵 페브르.

두 번째의 길은 페브르가 1929년에 마르크 블로크와 함께 창간한 역사학 잡지 <아날: 경제사회사 연보>를 통해 주도한 ‘새로운 역사학’ 운동이다. 세 번째는 학문적 ‘종합’의 길이었다. 이것은 역사학 내부의 학문적 칸막이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역사학과 인접 학문의 장벽도 제거해 그야말로 종합을 이루자는 운동이다. 페브르는 1935년부터 『프랑스 백과사전』의 책임편집을 맡아 이 일을 진행했으며 곧 그 결실을 발표했다. 『프랑스 백과사전』은 일반 사전과 달리 알파벳이나 주제 순서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심성적 도구, 물리, 하늘과 땅, 생명, 생물, 인간, 인류, 심성적 삶, 경제적?사회적 세계, 근대성, 국제생활, 과학, 산업, 문명, 교육, 예술, 철학과 종교, 미래세계 등 다양하고 종합적인 주제들로 구성돼 있다. 이 작업으로 페브르는 ‘현대의 디드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페브르의 대표작으로는 『16세기의 무신앙 문제』가 꼽힌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문주의 작가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종교가 무엇인가를 다룬다. 페브르는 문학가인 아벨 르프랑이 라블레를 무신론자로 단정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며, 16세기에는 과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수학·과학·언어 등의 심성적 도구가 미흡했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16세기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구조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라블레같이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라블레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넘어 구조와 인간이라는 인식론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구조주의적 문제는 브로델의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에서 더욱 극적으로 다뤄진다.『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의 서술도 이와 비슷하다.

페브르는 데니플레 신부가 가톨릭의 입장에서 제기한 루터 논쟁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며 루터와 종교개혁에 대한 통념을 해체한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면벌부 판매 관행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다. 당시 루터의 나이는 서른네 살이었다. 루터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신앙과 구원, 나아가 교회개혁이었지 사회개혁은 아니었다. 그러나 95개조 반박문은 즉시 독일어로 번역돼 널리 읽혔고 독일 사람들의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와 대화를 하고 싶었으나 교회가 아니라 ‘독일’이 응답해온 것이다. 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아리는 독일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독일은 자신의 은밀한 욕구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기 위해 하나의 신호, 한 사람만을 기다려왔다. 1517년의 ‘독일인’이 무대 앞으로, 마르틴 루터 앞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해서 루터와 독일의 만남이 시작됐고, 루터의 운명은 독일 속에 내던져졌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품안에 머물고 싶어 했으나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몰아 품에서 내쫓았다. 독일은 그를 종교적 루터가 아니라 사회적 루터, 정치적 루터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오해 속에서 루터의 운명은 굴절된다. 결정적인 사건은 1524~1525년의 농민전쟁이었다. 루터의 ‘자유’를 제후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으로 받아들인 농민들은 루터가 자신들의 대의를 당연히 지지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루터의 반응은 그들에게 뜻밖이었다. 물론 처음에 루터는 제후와 농민 사이의 중재에 나서기도 하고 폭력 사용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제후의 편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해 무력 진압을 주장했다. “

▲ ‘융커 외르크’ 모습의 마르틴 루터(루카스크라나흐, 1521/22. 일부).

내 견해는 분명합니다. 제후와 관헌들의 죽음보다는 농민들 모두의 죽음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농민들의 선두에서 천년왕국사상을 퍼뜨리며 농민들을 선동하던 토마스 뮌처의 체포와 죽음을 보고, 루터는 그 유명한 말을 날린다. “뮌처를 본 사람은 가장 사나운 모습으로 나타난 사탄을 보았다고 분명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 나의 주 하느님, 농민들 사이에 그런 영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면 정말 미친개를 다루듯 그들을 도륙할 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도 믿어지지 않는 종교개혁가의 말이다. 그러니 농민들은 어떠했을까. 루터가 변했거나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배신한 것인가? 1517년 이전에 수도원의 루터,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던 루터, 그 후 수많은 글과 말을 통해 독일인들에게 호소하던 루터, 그리고 농민들을 미친개 취급하던 그 루터는 다른 사람인가? 페브르는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루터의 배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농민들이 루터를 오해했다는 것이다.

페브르의 문제제기는 루터의 사상에 대해, 나아가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교에서 세속 군주의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에게 복종하듯이 군주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 군주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거나 저항하는 것은 정치적인 범죄를 넘어 종교적인 범죄로 여겨질 수 있다. 신성모독! 이렇게 볼 때, 루터는 종교개혁 과정에서 세속 군주의 도움에 의지하게 됐지만, 군주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신앙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생각이었다. 프랑스 종교전쟁 시대에 가톨릭과 칼뱅파 사상가들은 폭군을 시해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정치사상을 전개했지만, 루터는 그렇지 못했다. 군주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

페브르가 이렇게 루터의 입을 통해서 군주와 국가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군주의 폭력과 국가의 폭력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교 사상이나 루터 사상에 대한 분석을 넘어 페브르 시대의 독일을 말하고 있다. 페브르가 말하듯이, “루터는 근대사회와 근대정신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의심의 여지없이 게르만 사회와 독일정신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권위에 복종하는 독일인, 그리하여 히틀러에 굴복한 독일인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1933년 권력을 잡은 히틀러가 루터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를 발행한 것을 보고 페브르는 자신의 분석이 적중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은 루터를 넘어 종교개혁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흔히 종교개혁은 자유·평등·민주주의, 나아가 자본주의 등 근대성을 가져다준 위대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루터의 ‘양심의 자유’에서 자유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義認論’에서 평등과 민주주의가, 구원은 예정돼 있다는 예정설에서, 특히 막스 베버의 흥미로운 해석을 거쳐 자본주의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설명은 역사가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신학자들은 신학자 루터를 보지만 역사가들은 ‘인간’ 루터를 본다. 루터는 양심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내면의 자유였지 외적인 자유는 아니었으며, 루터는 ‘나’의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너’의 양심의 자유는 부정했다. 루터는 자신의 양심을 신의 목소리라고 생각했기에 그에 ‘복종’한 것이고, 자기에게 반대하는 다른 사람들, 예컨대 뮌처의 양심은 사탄의 목소리라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자유로의 문을 열기는 했으나 자기만 들어가고 닫아버린 셈이다.

자, 그러면 뤼시앵 페브르는, 페르낭 브로델이 말했듯이,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가? 페브르는 평생의 학문적 동지였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의 희생자가 된 마르크 블로크에 비해 과소평가된 감이 없지 않다. 서양 중세 봉건사회의 구조와 변동을 비교사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종합한 『봉건사회』는 블로크가 정말 위대한 역사가임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 한 인간의 운명』이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에 나타난 페브르의 역사학은 블로크의 역사학과는 많이 다르다. 페브르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문제사’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페브르의 역사학은 비단 루터나 라블레 그리고 그들의 시대인 16세기를 넘어 현대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블로크의 역사학보다 훨씬 ‘새로운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페브르는 폭포수처럼 전개되는 사변과 성찰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많이 생각케 하고, 그리하여 통념을 뒤집는 비판적 역사학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한다.

 

김응종 충남대 교수·서양사

프랑스 프랑슈콩테대학 대학원에서 「뤼시앵 페브르와 역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양서 개념어 사전』, 『아날학파의 역사 세계』, 『페르낭 브로델』 등의 책을 썼으며, 『랑그도크의 농민들』(전2권, 공역), 『고대도시』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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