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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환희, 시련과 좌절의 반세기 歷程 … 작지만 ‘성찰’을 선물한 에피소드들
도전과 환희, 시련과 좌절의 반세기 歷程 … 작지만 ‘성찰’을 선물한 에피소드들
  •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승인 2017.02.0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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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40년을 말하다_ 19. KIRBS의 이런 일 저런 일

한국행동과학연구소(KIRBS) 반세기의 歷程을 더듬어 보면 숱한 도전과 환희, 시련과 좌절이 점철돼 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맞닥뜨린 일들이 불쑥불쑥 뇌리를 스쳐가곤 한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불시에 일어난 일들, 긴가민가하다가 미결로 흘려버린 일들, 생각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일어난 일들이 많았다. 우리가 손 쓸 수 없는 일들도 부지기수였다.

이 시리즈를 쓰면서 여기저기 토막 이야기를 적었지만 아직도 뜬금없이 생각나는 것이 있어 여기에 個條式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적고자 한다. 좀 시시한 일들이지만 내가 겪은 일이라 적어 두고 싶은 것이다. 숨고르기 간주곡으로 다섯 가지 이야기.

첫째 이야기―사설 독서실 실태조사로 곤욕을 치른 일. KIRBS가 여러 가지 사회적 관심꺼리가 되는 일을 연구한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다. 청와대 사정비서실에서 사설 도서관 운영 실태조사를 우리에게 의뢰해왔다. 사설 도서관이 청소년 우범시설이 돼 간다며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1975년경이었다.

청와대는 독서실 정책수립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요구했다. 우리는 운영자의 의견, 사용하는 학생들의 의견, 환경 조사, 운영에 관련되는 항목들을 연구에 포함시키고 외국의 관련 문헌도 분석하는 등 성의껏 연구해 보냈다. 독서실 운영의 개선을 위한 정책 수립과 정비에 도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비싸게 깨달은 사회적 이슈를 다룰 때의 자세

그런데 이 연구의 결과가 노출됐다. 일간지 사회면이 사설 도서관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을 조목조목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독서실 업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영업에 지장이 된다면서 연구소로 몰려와서 소장실을 점거해 농성을 벌이며 항의했다. 연구책임자의 공개 사과와 문책을 요구하는 등 협박조였고 폭력적이었다. 이 와중에 연구소 건너편 종로경찰서에서 이 사태를 눈치채고 개입해 연구자 신변보호 약속을 받고 농성자들을 해산시켜서 간신히 사태가 수습될 수 있었다.

KIRBS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정부가 요청하는 연구를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사회적 이슈는 직접 관련 당사자의 권리도 꼼꼼히 살펴야 하는 사안임을 거듭 체감한 사건이었다.

둘째 이야기―정부기구 운영에 참여하게 될 뻔한 일. 1979년에 문교부는 국가적 수준에서 각급 학교교육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전국 학력평가 방안을 수립하고, 이와 관련된 연구와 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전담기구의 설립계획에 관한 연구를 의뢰해 왔다. 우리는 계획안을 만들어 이듬해 초에 문교부에 제출했다.

그런데 1980년 7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중 장기대책의 일환으로 학력관리기구 설치 운영을 1981년부터 앞당겨 시행할 계획을 발표하게 됐다. KIRBS의 연구가 이 국가 계획의 기본 모델이 됐다. 그 계획의 실질적 사업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당시의 한국교육개발원(KEDI)은 敎育課程 및 교육자료 등 교육의 투입 부문을 담당하고, 교사연수 및 현장지도 등 교육의 過程 부문은 중앙교육연구원이 담담하기로 했다. 교육 성과인 학력평가 부문은 한국행동과학연구소가 담당하는 게 타당하다고 문교부가 판단했던 것이다.

KEDI와 중앙교육연구원은 각기 특징 있는 기관으로 이미 상당히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기관들의 특성화를 위해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계획돼 있었다고 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교육의 출력부문인 교육의 성과 평가를 위해서는 독립된 기구를 설립해야 한다. 하지만 독립기구 신설의 경우, 과다한 예산 투입, 전문인력 확보의 어려움, 시행착오의 우려 등이 예상된다. 전국 학력평가의 경험이 있는 KIRBS가 인력과 기구 및 조직을 다소 조정하면 전국 학력평가와 관련 연구 사업을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부의 계획이 성안된 뒤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역량을 높이 평가해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했다. 하지만 전국적 학력평가와 대학입시제도와 관련된 엄청난 국가적 사업을 우리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되도 좋고 안 되도 좋고’라는 엉거주춤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여하튼 정부의 일이어서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동안 이 계획은 우리 손을 떠났다.

오래된 일이지만 그때 우리는 우리 연구소가 입시제도나 학력평가 전담기구에 본격적으로 참여해 신경을 쓰게 됐다면 우리가 소중히 공언한 행동과학 연구 본디의 색채가 퇴색하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작은 규모로 대형 출판사 역할도 수행

셋째 이야기―연구 프로젝트 수행을 지원하는 관리·서무부서의 공헌에 관한 일. 연구소의 많은 연구활동 중에서 완전학습 프로젝트 진행 때의 이야기 한 토막을 꺼내겠다. 이 프로젝트에 관해서는 앞에서도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연구원들이 학습 교재를 만들 때 관리부 직원들은 그 교재를 책으로 만드는 일을 했다. 당시 연구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을 종합적으로 꿰뚫고 있던 김화영 선생(나중에 능력개발사 사장 역임)과 천영희 선생(나중에 삼성그룹 상무)은 그때 사정의 한 단면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출판 일을 전업하는 기관이 아닌 그리 크지 않은 연구소가 엄청난 양의 학습자료를 매주 인쇄해서 공급하는 대규모 출판 작업을 했다.”

당시는 용지난이 유달리 심각하던 때였다. 용지 조달을 위해 을지로의 용지 도·소매상 상인들과 접촉하고 용달차를 수배하고, 중림동인가 어딘가에 있는 인쇄소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학생들에게는 학교 수업계획에 맞춰 학습자료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공급이 늦어지면 큰 낭패혔다. 연구원이고 관리부 직원이고 너나없이 밤새워 자료 교정을 봐야 했다. 때때로 표지가 뒤바뀌거나 내용이 빠지는 등 사고가 비일비재했으니, 뒤이은 항의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인쇄·보급의 일이 연구소의 처리능력을 넘어서서 능력개발사라는 출판사가 떠맡게 됐다.

넷째 이야기―비영리 연구소가 세금 맞은 일. 우리 연구소는 비영리 공익 연구기관이다. 그 재정은 회비, 국고 보조금, 국내외 연구용역비, 연구저작물의 인세, 찬조금 및 기타 수입으로 충당한다고 정관에 적혀 있다. 초기에는 이들 여러 항목이 연구비를 충당하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정의 실질적 원천은 심리검사의 보급과 기업체 대상 교육·훈련 수익으로 대체됐다.

그런데 연구소에 세무서에서 세금을 내라는 통보가 왔다. 창립 때부터 우리는 연구활동을 통해 취득한 수익금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오랫동안 정관에 적힌 대로 연구용역비나 연구저작물 인세에 의존해 연구활동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세무당국은 기업체를 대상으로 한 교육·훈련 용역비와 검사보급 등의 수익금을 문제 삼았다. 이런 수익활동을 사단법인의 범위를 넘어선 영리행위로 판단했던 것이다. “돈 벌었으니 세금 내라”는 말이다. 오랫동안 내지 않은 세금을 소급해 연체금까지 합해서 납부하라는 통보였다.

우리는 인정된 정관을 내세워 세금을 내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세무서는 끈질기게 독촉해왔다. 결국 우리는 조세심판원인가 하는 기관에 호소했다. 하지만 조세심판원은 우리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낭패였다. 문제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봤지만 뾰족한 성과가 없었다. 어디서도 우리에게 유리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세금은 내야한다는 것이다.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 일을 영리 수익사업으로 간주하는 세무당국이 원망스러웠으나 법이 그렇다니 도리 없는 일. 부가세 연체 가산세 등 우리의 빠듯한 재정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아까운 돈을 내야만 했다.

비교적 단출한 살림이라 오랫동안 별문제 없이 지내왔다. 경리직원도 타자 등 일반사무를 처리하는 직원이었으나, 가계부 꾸리는 정도의 일도 척척 잘 처리했다. 그래도 재무행정에 비교적 밝은 준전문가 정도의 책임자는 있어야 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우리의 불찰이었다.

결국 우리는 수입원인 회사가 납세의 책임을 지는 방침에 합의했다. 께름칙하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기는 했으나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모두들 후회막급이었다.

교육발전과 학자의 자기성장 함께 모색하기도

다섯째 이야기―함께 공부하자고 ‘스터디 그룹’하던 일. 연구소에 자구 드나들던 대학교수급 학자들 사이에 한국교육에 대한 대화의 모임을 꾸려보자는 의견이 돌았다. 그러던 중 1995년 3월에 예닐곱이 경주 나들이를 갔다. 거기서 이 스터디 그룹에 대해 구체적으로 의논했다. 내 기록에 의하면, 우리가 내세운 모임의 매니페스토는 거창했다. 이르기를 학자들 간 학문적 대화의 기회 확대, 전문가들의 교육문제 공론화 기능의 활성화, 그리고 건전한 학풍 조성과 사회적 영향력 강화 등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교육의 이론적·실천적 문제에 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자유롭게 개진해 격의 없이 토론하면서 교육 발전뿐 아니라 학자로서의 자기성장도 도모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1995년에 출발한 이 모임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7년간 일 년에 한번 또는 두 번 모여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을 나눴다. 우리의 대화는 때때로 팽팽한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토론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이 논의를 독점하는 경향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특히 비교적 젊은 학자들의 참여를 권장했다.

이 대화의 모임을 계속하면서 우리는 그 내용을 한국교육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고 고뇌하는 많은 교사와 학부모와 교육정책 입안자에게도 공개함으로써 대화의 광장을 넓혀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대화의 내용을 보완해 책으로 출판했다. 우리나라 교육의 중요한 현안 문제를 심층 분석한 책 14권을 출판했던 것이다.

원래 이 대화의 모임은 정범모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정 선생의 호를 받들어 ‘雲洲교육포럼’으로 출발했다. 출범 당시 10여명 회원이 나중에 ‘한국교육포럼21’로 개칭했고, 회원수도 50명 가까이 늘었다. 내가 연구소를 떠난 2012년 이후에는 이 모임은 성격이 바뀌어 다른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간주곡으로 별 재미는 없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내 記憶庫에 서성거리는 것이라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반세기 연구소에 있었던 일은 여기서 쓴 것의 여러 곱이 될 것이다. 아쉬웠던 일, 난처했던 일, 추회되는 일, 재미있는 일 등 가지각색의 우발사건 등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내가 따로 준비하고 있는 책에 쓸 것이다.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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