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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제국’, 냉전 소련을 묶어놓은 패러다임의 덫
‘혁명과 제국’, 냉전 소련을 묶어놓은 패러다임의 덫
  • 김남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러시아사
  • 승인 2017.01.2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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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실패한 제국: 냉전시대 소련의 역사』(전2권) 블라디미르 주보크 지음 | 김남섭 옮김 | 아카넷 | 1권 409쪽, 2권 468쪽 | 1권 20000원, 2권 18000원
“저자에 따르면, 소련의 대외 정책은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하나는 제정 시대 이래로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제국적 팽창주의 동기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의 혁명적 이상이다. 말하자면 소련은 혁명 전 러시아의 제국적 충동을 그대로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이 충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프리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1991년 12월 70여 년을 버티던 소련 제국이 누구도 예상치 않게 자멸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20세기 후반 세계사를 특징지었던 동서간의 냉전도 더불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련의 계승 국가인 러시아가 지난 수년 동안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시리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등 국제적으로 개입주의 양상을 노골화하면서 최근 일각에서는 냉전 부활 가능성을 강력히 제기해 온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핵능력 강화를 외치며 힘에 의한 미국 이익의 보호를 우선적으로 표방한 일도 신냉전의 가능성을 더욱 현실화하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군사적 경쟁을 비롯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문화 등 거의 모든 인간사에 영향을 미쳤던 지난 세기 냉전이 결국 인류가 일궈왔던 유형무형의 자산을 불필요하게 소모한 과정이었음은 자명하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반복된 위기와 갈등으로 점철돼 온 우리 사회가 이 점에서 특히 고통을 받아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왜 인류는 어리석은 일로 판명 난 상호 대결과 반목을 다시 되풀이하려 하는가? 왜 인류는 문명의 총체적 절멸을 가져올 핵전쟁의 공포를 스스로 다시 겪으려 하는가? 과거의 교훈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야한다면, 지금 소개하려는 블라디미르 주보크의 책은 이 점에서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다. 한국 학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저자 주보크는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았으나 미국과 영국 등 서방에서 주로 활동하는 세계적인 국제사 전문가다.
 
냉전사 연구의 최근 경향에서 조금 비켜 선 책
소련의 냉전 경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엄밀히 따지면 냉전사의 최근 연구 경향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노르웨이인 역사가 오드 아르네 베스타가 냉전 연구에서 제3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래 세계 학계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냉전의 동서 축보다는 남북 축을 살펴보려는 경향이 강화돼 왔다. 하지만 제3세계에서 냉전의 행위 주체였던 지역 지도자들조차 미국과 소련의 개입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은 만큼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냉전을 검토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유용한 분석 틀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몇 가지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1945년부터 1991년까지의 전 시기를 대상으로 하는 통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구소련 소속 공화국과 미국, 독일, 이탈리아의 문서고, 냉전 주역들의 회고록과 인터뷰 등 1차 사료를 광범하게 동원하고 있는 점이 얼른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복잡하고 언뜻 모순적이기까지 한 지난 세기 후반기의 소련의 국제적 행동을 단순히 요약, 열거하지 않고 ‘혁명-제국 패러다임’이라는 하나의 이론적 틀로 일관되게 설명하려 했다.

주보크에 따르면, 소련의 대외 정책은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하나는 제정 시대 이래로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제국적 팽창주의 동기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의 혁명적 이상이다. 말하자면 소련은 혁명 전 러시아의 제국적 충동을 그대로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이 충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프리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주보크는 소련 지도부가 브레즈네프 시대까지는 일관되게 ‘혁명-제국 패러다임’을 견지함으로써 초강대국 미국과 평화적인 해결에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없었고, 고르바초프가 이 패러다임을 거부하면서 비로소 두 강대국 간의 적대와 대립이 종언을 맞이했다고 역설한다.

‘혁명-제국 패러다임’이라는 개념 틀 하에 일관된 소련 냉전사 해석을 도모하는 주보크의 저서는 시간적 흐름에 따라 10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그 중에서도 이 패러다임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흐루쇼프 시대와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의 냉전 경험을 묘사한 장들이다. 1953년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한 후 소련의 새 지도자로 등장한 흐루쇼프는 1956년 제20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을 시작하면서 대외적으로 동서 양 진영 간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는 사상을 내세웠다. 이 ‘혁신적인’ 정책에 따라 소련은 스탈린 시대의 고립주의를 과감하게 버리고 경제적·문화적 교류를 적극적으로 진작하는 등 서방과의 협력을 고무했다. 하지만 서방과의 협력 확대가 냉전의 종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련 지도부는 다른 한편으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반식민주의 민족주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유럽에서는 베를린을 자유 도시화할 것을 주장하며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쿠바에서는 미사일 위기를 일으키는 등 전세계적으로 모험주의적 행동을 자주 벌였다. 주보크에 따르면, 이런 공격적 행동은 기본적으로 흐루쇼프가 공산주의의 전세계적인 최종적 승리를 믿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흐루쇼프에게 평화 공존 사상은 생활수준의 향상 같은 비군사적 경쟁을 통해 세계의 공산화를 이루는 또 다른 정책 수단이었던 셈이다.

브레즈네프의 대외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주보크가 보기에 전쟁을 절대적으로 혐오했던 평화주의자 브레즈네프는 집권하자마자 서방과의 데탕트(긴장 완화)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그 결과 서독과 불가침 협정을 조인하고 미국과 경제 협력을 도모하는 등 1970년대 초까지 서방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이와 동시에 군비를 대대적으로 증강시켰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앙골라, 에티오피아 등의 아프리카 대륙 및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국의 ‘과잉확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대규모의 군사적 공세에 나서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 모순되는 브레즈네프의 대외 정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브레즈네프가 이러한 팽창주의 정책 결정에 직접 관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아 당시 소련 지도부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혁명-제국 패러다임’의 틀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회고록 등 개인 증언과 개인 성격 분석에 의존
고르바초프의 경우는 ‘혁명-제국 패러다임’을 포기함으로써 냉전의 종식을 가져온 지도자였다. 대외적으로 ‘신사고’를 표방하면서 국제무대에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세계는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으로 양분돼 있으며, 사회주의 체제가 계속 팽창해 종국에는 자본주의 진영을 압도할 것이라는 레닌 시대 이래의 믿음을 과감히 버리고 협력과 대화를 통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인류 공동체의 건설을 강조했다. 이러한 소신에 따라 새 소련 지도자는 발트 3국, 그리고 동유럽과 중부유럽에서 반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중대한 소요가 발생했을 때 전혀 개입하지 않았고 그 나라의 운명을 자국민들에게 맡겨뒀다. 그 결과 1989년부터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가 맥없이 무너지고 독일이 재통일되면서 오랜 동서간의 냉전은 마침내 종결됐다.

물론 하나의 개념적 틀로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소련의 국제적 행동을 설명하려는 주보크의 노력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료 문제에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때 회고록 같은 개인의 증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이 자주 보인다. 인간 기억의 한계나 사후 정당화의 가능성 때문에 회고록을 인용하는 일은 언제나 신중해야 할 것이다. 또 소련의 지도자가 가진 개인적 신념이나 성격 중심으로 대외 정책의 변화를 기술하다 보니 소련 사회가 당면했던 구조적 한계에 대한 탐구가 소홀했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평범한 소련 일반인들이 겪었던 냉전 경험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책이 갖고 있는 장점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다. 지난 세기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둘러싸고 인류가 품었던 우려와 공포, 희망과 기대를 깊이 살펴보는 이 책이 신냉전의 위험이 점점 고조되고 있는 오늘날의 국제관계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영감을 주고 도움이 됐으면 한다.
 
김남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러시아사
필자는 인디아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탈린 시대의 노동 수용소와 흐루쇼프 시대의 소련 사회 등 소련사의 다양한 주제에 관해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소련 경제사』, 『속삭이는 사회』, 『러시아사 강의』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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