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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망명 유형 … 나치가 혐오한 ‘변종음악가’의 인생역전
제3의 망명 유형 … 나치가 혐오한 ‘변종음악가’의 인생역전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1.23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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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11. 파울 힌데미트
▲ 만년의 힌데미트 Photo: HULTON ARCHIVE
정치성향이 강한 나치반대파 음악가들은 망명을 떠났다. 유대인 음악가들도 망명을 떠났다. 그들은 대략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초창기인 1933년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다면 정치성이 강한 공산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 그리고 유대인이외에도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음악가들이 있었을까? 왜 없었겠는가! 제3의 유형이 있다. 저명한 작곡가 중 파울 힌데미트 (Paul Hindemith, 1895~1963)가 제3의 유형에 속한다. 힌데미트는 아이슬러나 쇤베르크와는 또 다른 망명의 형태를 보여준다.
 
파울 힌데미트는 1938년 8월 망명의 길을 떠난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지 5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다. 스위스로 망명했다. 그런 다음 터키의 앙카라를 거쳐 1940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힌데미트는 정치성이 강한 사람도 아니었고, 유대인도 아니었다. 음악가였을 뿐이다. 그리고 독일인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뒤늦게 망명을 떠났을까. 혹은 왜 떠나야만 했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는 첫 번째 열쇠는, 파울 힌데미트가 모던한 독일 작곡가, 신음악 (Neue Musik) 작곡가라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 힌데미트는 음악가였고, 자신이 추구한 음악성 때문에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힌데미트는 이미 초기 작품부터 가파른 리듬, 날카로운 불협화음, 재즈 요소 등을 가미한 도전적인 신종 음향으로 고전음악에는 물든 콘서트 관중들에게까지 충격을 줬다. 이로 인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망나니 같은 선동자 혹은 도발자라는 명성까지 얻었다. 관객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단지 파울 힌데미트라는 한 음악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몰고 온 신음악 선풍 때문이었다.
 
‘신음악 선풍’의 주인공
신음악이란 일반적으로 대략 1910년경 오스트리아 빈이나 독일을 중심으로 발생한 다양한 유파의 신종음악 형태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음악계 전반을 지배하는 총체적 개념이다. 20세기 작곡의 중심이기도 하다. 특히 선율, 하모니, 멜로디, 리듬의 매개체와 형식을 확장시킨 것으로 특징져진다. 한마디로 새로운 선율, 새로운 형식을 찾아내거나 낡은 양식에 신종을 가미시켜 종래의 전통을 발전시키거나 쇄신시킨 네오 스타일 혹은 포스트 스타일을 말한다.
 
대략 1910년경부터 현재까지라고 편하게 말하지만, 구체적으로는 1910년경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즉 모던(Modern)이라고 표기되는 문예사조 시기의 음악을, 또한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슬쩍 가린 채 제2차 세계대전 후 극단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정립된 음악을 신음악이라고 한다. 신음악이라는 용어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음악 평론가 파울 베커 (1882~1937)가 1919년 구스타프 말러, 프란츠 슈레커, 아르놀트 쇤베르크, 에른스트 크레네크를 거명하며 처음 사용한 데서 유래한다.
 
나치시대 대부분의 신음악 형식은―재즈음악 역시―변종음악으로 낙인찍혔다. ‘변종예술’ 혹은 ‘변종음악’이란 나치가 당시 ‘모던’을 표방한 예술을 비방하기 위해 종족이론에 바탕을 두고 나치의 관점에서 정립한 공식적인 나치 선전 용어였다. ‘변종’은 19세기 말 의학에서 사용하던 개념으로 나치가 예술개념에 도입해 사용한 용어다. 그들이 말하는 ‘변종된 예술’이란 표현주의, 다다이즘, 신즉물주의, 초현실주의, 입체파, 야수파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나치시대 변종음악은 공연, 유포가 금지됐다. 금지뿐만 아니라 억압당했다. 히틀러는 변종음악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모던’을 증오했다. 히틀러도 원래는 예술가가 되려던 사람이었다. 정치가가 인생의 목적은 아니었다.
 
1938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된 ‘변종음악’ 전시회에서 파울 힌데미트는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쿠르트 바일 같은 작곡가들과 함께 변종음악가로 낙인찍히며 비난 리스트에 올랐다.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변종음악 대신 나치들은 나치 문화정책 측면에서 볼 때 해가되지 않는 경음악, 소희가극인 ‘오페레타(Operette)’, 춤곡, 행진곡 등을 장려했다. 특히 선전이 들어간 민속음악은 우대를 받았다. 민족의 전통이 강조되고 학문적으로 독일민속학이 활기를 띄던 시기였다. 나치 예술가들과 나치 학자들은 독일민족의 우수성 내지 민족정기 확립에 전력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결국 변종음악가로 낙인찍힌 수많은 작곡가와 음악가들은, 게다가 유대인들은 눈에 띄게 박해를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프란츠 왁스만 (1906~1967)과 에른스트 크레네크(1900~1991)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파벨 하스 (1899~1944)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파울 힌데미트도 망명을 떠났다.
 
▲ 지휘하는 힌데미트
슐레지옌 출신의 부친이 음악적 재능 열어줘
힌데미트는 1895년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위치한 소도시 하나우에서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난에 찌들었지만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열 살이 되던 해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음악적 재능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아홉 살부터 음악 개인교습을 받았는데, 열두 살이 되던 해 바이올린 선생이었던 아돌프 레프너(1876~1967)의 추천으로 프랑크푸르트 ‘콘서바토리엄(Konservatorium, 음악원)’에 입학했다. 빈 출신인 레프너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하우스의 제1 바이올린 수석 연주자와 프랑크푸르트 콘서바토리엄의 교수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힌데미트는 이 학교에서 바이올린 공부를 시작했는데 비올라, 바이올린, 피아노,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음악 신동으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힌데미트는 프랑크푸르트와 그 근교에 살았지만 부모의 가계는 슐레지엔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1870년 슐레지엔에서 프랑크푸르트 인근으로 이주했다. 슐레지엔은 대부분 오늘날의 폴란드 땅에 속하고, 독일의 북동부와 체코의 일부도 슐레지엔이다. 슐레지엔은 독일 역사에서 영욕의 영토다. 힌데미트의 아버지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44세의 나이에 보병에 자원입대해 1915년 샹파뉴 가을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버지는 피 끓는 독일인이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그는 세 자녀―파울(1895년생), 안토니(딸, 1898년생), 루돌프(아들, 1900년생)―에게 어려서부터 음악교육을 시켜 ‘프랑크푸르트 삼남매 트리오’라는 예명으로 무대에 서게 했다. 파울 힌데미트의 동생 루돌프 힌데미트(1900~1974)는 어려서부터 첼로 신동으로 인정을 받았고 후에는 지휘자와 작곡가였지만, 유명한 형 파울 힌데미트의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형은 망명을 떠났고, 동생은 나치 독일에 남아 음악활동을 한 비운의 형제였다.
 
힌데미트는 18세 때인 1913년부터 이미 프랑크푸르트 오케스트라를 이끌기 시작하며 음악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1915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하우스 제1 바이올린 수석 연주자를 지냈다. 그 외에도 레프너 실내 오케스트라와 현악 4중주단에서 제2바이올린을 맡기도 했다. 1917년 8월 징집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18년 1월 서부전선에 배치됐다. 군악대와 군 현악 4중주단에서 연주하며 군복무를 했다. 수많은 전투와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속에서도 다행히 부상을 당하지 않았고, 1918년 11월 10일 벨기에에서 종전을 맞았다. 보병으로 참전해 전사한 아버지와 달리 그에게 행운이 깃들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작곡에 열중했고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작품은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혹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음악성 때문이었다. 1919년과 1921년의 작품에서는 폭력과 성이 등장하고,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는 재즈와 나이트클럽이 삽입되고, 사이렌소리가 악기로 등장하기도 한다. 1919년에는 저명한 음악 출판사인 마인츠의 쇼트 출판사가 젊은 작곡가인 힌데미트를 눈여겨보게 된다. 드디어 1921년 ‘도나우-에슁어 실내악의 날’에 성공의 돌파구를 마련한다. 힌데미트는 1921년에 창단한 사중주단(Amar-Quartett)으로 이 음악제에서 당대 재현예술가로 명성을 굳힘과 동시에 하룻밤사이 독일 내 아방가르드 음악의 최고봉에 올라서게 된다.
 
이름 없는 작곡가에서 ‘에른스트 크레네크’와 앙상블 연주자로
1922년 ‘도나우-에슁어’ 음악제에서는 지금까지 그저 젊고 이름 없는 작곡가로만 치부됐던 힌데미트의 작품이 예외적으로 에른스트 크레네크와의 앙상블로 선정됐었다. 지금까지 이 축제에서 없었던 일이었다. 어떤 작곡가도 이렇게 힌데미트처럼 대성공을 거둔 적은 없었다. 1923년 제3회 ‘도나우-에슁어 실내악의 날’에서 힌데미트는 에두아르트 에에드만 (1896~1958) 후임으로 음악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위원으로 선출됐다는 것은 곧 1924년에 개최되는 음악제를 직접 기획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하여 신음악의 대가인 쇤베르크와 안톤 베베른의 음악이 1924년 이 축제에서 최초로 울려 퍼졌다. 그 다음 두 해는 ‘실내악의 날’에 작곡분야의 특정한 장르만을 선정해 매력적인 프로그램이 되도록 기획했다. 1925년에는 당시에 유행하는 합창음악을, 1926년에는 군악오케스트라, 금속악기 음악, 합창음악을 선정했다. 높은 음악성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실내악의 날’은 그야말로 흥겨운 축제분위기였다. 당대의 저명한 어떤 신음악 기획자는 “저녁의 음악축제는 끝날 줄을 몰랐고, 흥은 밤새도록 이어졌다”라고 기록했다. 힌데미트는 배우기질을 겸비한 신음악가였다. 힌데미트는 고상한 음악보다는 평범한 음악, 즐기는 음악을 추구했다.
 
힌데미트의 음악적 배경은 표현주의와 신즉물주의였다. 표현주의 개념을 배경으로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수많은 오락음악 이외에도 번안곡과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힌데미트는 무엇보다도 신즉물주의 음악의 선구자로 불려진다. 신즉물주의 음악은 감상적이지 않고, 분별이 있고, 확고한 형식을 첨가하고, 한눈에 알 수 있고, 간결하다는 특성을 지닌다. 표현의 풍부함, 즉 풍부한 표현을 배격한다. 가능한 한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예사조 양식상 오래전의 음악, 예를 들면 바로크음악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음악을 추구하는 의도는 사회에서 직접적인 원군을, 즉 사회에서 음악을 찾아 문화생활에 도움이 되고, 문화생활을 유용하게 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힌데미트는 “자신을 위한 작곡의 시대는 아마도 영원히 지나갔다. 그와는 반대로 다른 측면에서 급박하게 필요로 하는, 그리고 작곡가와 소비자가 소통하는 음악수요는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무엇보다도 음악에서의 수요를 강조했다. 작곡가와 청중의 소통을 중시했다. 즉 오페라나 콘서트 그리고 실내악과 같은 음악생활의 조직 내지 시설을 위한 음악을, 그리고 라디오와 금속 악기 같은 새로운 매체를 위한 음악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힌데미트의 음악관은 실용음악(Gebrauchsmusik)의 창안으로 연결됐다. 그는 수시로 실용음악을 작곡했는데 그가 생각한 실용음악은 콘서트음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힌데미트는 실용음악 창안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만년에는 실용음악이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모든 음악은 ‘실용능력’이 있고, 무언중에 그것이 전제된다는 게 이유였다.
 
1920년대 말 힌데미트는 당대 가장 성공적인 작곡가일뿐더러 저명한 재현예술가의 지위에 오른다. 1927년에는 베를린 음악대학의 작곡과 교수가 된다. 약동하는 대도시 속에서 힌데미트는 문화적인 삶이 제공하는 수많은 가능성을 즐겼다. 편안한 기분으로 산보를 했고, 당대의 신문물인 영화관을 즐겨 찾는 영화광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명사들과 교류도 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프란츠 슈레케 등과 친구관계를 맺었다. 알프레트 되블린, 베르톨트 브레히트, 고트프리트 벤, 칼 추크마이어 등 문인들과도 알고 지냈다. 브레히트나 고트프리트 벤과도 공동으로 작업했다. 결국에는 벤 쪽으로 기울었다. 문인들 중 브레히트는 대표적인 망명객이고, 고트프리트 벤은 나치 쪽에 기울은 시인이다. 힌데미트는 20년대 후반의 베를린 분위기가 제공하는 스포츠 정신에도 활짝 열려 있었다. 매일 아침 숲속 조깅과 체조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복싱과 수영강습에 라틴어와 수학까지 배웠다. 이러한 여유는 힌데미트처럼 명성과 지위를 지닌 사람만이 즐긴 것이 아니라, 당시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독일인들의 일상적인 삶이나 감정이 그랬다.
 
엇갈린 평가 속에서 ‘나치 공격’을 사소하게 취급
1924년에서 1929년 사이 ‘도즈 안(Dawes Plan)’에 의해 바이마르공화국 독일 경제는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통화가 안정된 이 시기 독일인들의 일상적인 감정을 그 당시 독일인들은 ‘아메리카주의’라고 불렀다. 미국자본의 유입으로 독일인들의 내적 삶과 외적 삶의 형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형태도 변했다. 대도시에는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가 말했듯이 이른바 ‘점원문화’ 혹은 ‘직원문화’가 탄생했고, 영화 라디오 등 새로운 매체가 급속도로 발달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신음악을 작곡하고 실용음악을 창안한, 더구나 재즈 음악과 나이트클럽 음악을 수용한 파울 힌데미트는 당연히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의 총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힌데미트의 위치는 눈에 띄게 추락했다. 이미 1920년대 말 국수주의적이고 민속적인 음악비평가나 정치가들은 힌데미트를 격렬하게 공격해댔다. 1930년에 드레스덴에서 공연하기로 했던 그의 단막극이 마지막 순간에 제외됐다. 공연기획자가 나치들의 방해에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후 나치 이론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일파는 힌데미트를 ‘몰락의 선구자’로 몰아 세웠다. 그의 음악이 문화볼셰비키적이고, 유대인 동료와 동업했으며, 그의 부인이 유대인 혈통의 피가 섞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와는 반대로 나치 문화정책가들 중에서는 힌데미트를 음악분야에서 ‘미래의 기수’라고 치켜세우는 자들도 있었다. 힌데미트는 초반 이러한 상황을 보며 별로 크게 개의치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곧 지나가버릴 사소한 일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젊은 음악가들 중에 힌데미트만큼 독일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린 인물도 없지만, 나치에게 힌데미트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1934년 12월 괴벨스는 한 연설에서 힌데미트를 ‘무조의 소음을 만들어내는 자’라고 비방했다. 왜냐하면 “국가사회주의(나치)는 정치 사회 뿐만 아니라, 국가의 문화적 양심”이라는 게 이유였다. 괴벨스가 연설하기 하루 전 대학당국은 힌데미트에게 휴직을 강요했다. 1935년 학생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직을 휴직하고 터키 앙카라에 장기간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힌데미트의 작품들은 독일에서 공연이 금지됐다. 1937년 베를린 음악대학에 교수직 사표를 제출했다. 1938년 5월 ‘변종음악’ 전시회가 개최됐을 때, 망명을 떠나야만 된다는 사실은 확정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1938년 8월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고, 터키 앙카라에 머물다가 1940년 2월 미국에 발을 디뎠다.
 
예일대 교수 역임하다 귀환 … 예술적·사회적 명성 누려
미국은 새로운 세계였다. 미국으로 망명한 초반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망성 없는 나라로 여겼만 그가 본 미국은 긍정적이었고, 그것에 대해 감사해했다. 1946년 1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평생 미국국적을 유지했다. 1940년부터 9월부터 1953년까지 예일대 교수를 역임했다. 처음 한 학기는 객원교수였고, 그 다음 학기부터는 정교수로 근무했다. 성공적인 작곡가로, 누구나 탐내는 훌륭한 작곡선생으로, 자극적인 음악이론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연주실무가로 힌데미트는 미국에서 그 누구도 과소평가할 수 없는 업무를 완성했다. 살아있는 저명한 음악가로 명성도 날렸다. 엄격한 수업으로 미국 제자들도 길러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곧바로 힌데미트의 음악은 다시 독일에서 성황리에 공연됐다. 힌데미트는 이것을 보며 오히려 의아해했다. 힌데미트는 ‘사람들이 오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인을 대단하게 인정해주는 것을 보며 유럽으로 귀환해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고, 결국 취리히대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1950년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빈 콘서트하우스협회의 명예회원이 되기도 했다. 힌데미트 부부는 스위스 레만 호 근처에 거처를 정하고 살았다. 훈데미트는 고향 프랑크푸르트에서 1963년 12월 28일 사망했다. 급성장염(acute pancreatitis)이 死因이었고 향연 68세였다.
 
서장원 독문학자
 
메인=힌데미츠 Photo: HULTON ARCHIVE
사진출처=http://www.hindemith.info/de/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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