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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기록될 수 없었던 그들이 지금 온몸으로 말해주는 것들
역사에 기록될 수 없었던 그들이 지금 온몸으로 말해주는 것들
  • 김종곤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 승인 2017.01.23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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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14. ‘빨갱이’라는 ‘자기-파괴’의 기표

“비탄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골짜기의 어둠과 혹한을 생각하라.”(발터 벤야민)

2016년 3월 충남 홍성 어느 시골 마을(광천읍 담산리) 나지막한 언덕에서 20여 구의 유해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유해와 함께 정규군이 사용했던 M1소통의 탄두와 고무신, 단추 등의 유품이 유해에 섞여 함께 나왔다. 그리고 ‘병규’라는 이름이 삐뚤삐둘 새겨진 라이터가 발견됐다. 상상컨대 그 이름은 그가 죽음을 직감하고 급하게 새겨 넣은 듯 보였다. 자신이 여기에 있노라고 알리기 위해 말이다. 하지만 세월은 유해들 중 누가 그 유품들의 주인인지 그리고 ‘병규’인지는 알 길이 없게 만들었다.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낸 유해들은 작은 손길에도 부스러지기 일쑤였고, 입구가 좁은 폐광산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던 유해들은 이러 저리 섞여 제 뼈를 맞추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들은 ‘이름’을 남길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이름 없는 존재들, 그래서 역사에 기록될 수 없었던 존재들, 그들의 사연을 알기 위해서는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8년 여수 14연대가 제주4·3 진압 명령에 항거하면서 발생한 여순사건 이후 이승만 정권은 사실상 좌익 세력을 탄압할 목적으로 국민의 안전과 생존을 확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가보안법(1948년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공포)을 제정한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늘어날수록(부천형무소와 영등포형무소 등을 신설했지만) 이들을 수용할 기관은 턱없이 부족했고, 검사와 판사의 업무마저 마비되다시피 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이 고민 끝에 내놓은 방안이 ‘국민보도연맹(The Federation Protecting and Guiding the Public, 1949년 6월 5일 결성, 이하 보도연맹)’이었다. ‘保導’는 그 한자어에서 보듯이 ‘보호하며 지도한다’는 뜻을 지니지만 그 이름은 무색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본래 목적은 좌익세력을 전향시키고 포섭하면서 효과적으로 관리해 건국노선에 참여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좌익 활동과 무관한 민간인의 죽음

비극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시작한다. 전면전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의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라는 비상통첩을 무선전보로 내려 보낸다.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협력하거나 합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상’임에도 불구하고 보도연맹원은 잠재적인 ‘敵’으로 분류됐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에 대한 단속과 구금이 이뤄졌으며, ‘예상적 적’은 학살된다. 어떤 학자는 6월 28일 강원도 횡성에서의 처형을 처음으로 보기도 하지만 6월 27일 경 밀양 등에서도 집단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미뤄보자면 당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적으로 동시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확실한 집계는 없으며 또 학자들마다 그 수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만 전국적으로 적어도 10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 희생자 대부분은 국가가 내세운 보도연맹 결성 목적과 다르게 상당수가 좌익 활동과 무관한 민간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2007년 진상규명위원회 선우종원 보도연맹 기획 검사가 증언한 바가 있다. 실제로 지역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당시 관에서는 무작위로 연맹원을 모집하기도 했고, 지역주민들은 관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입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처형은 형식적인 재판조차 없이 군과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이뤄졌다. 집에서 밥을 먹다가, 논에서 일을 하다가, 산으로 들로 바다로 끌려가 그 날 총탄과 대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한 점에서 보도연맹 사건은 국가에 의해 자행된 불법적인 학살이었으며, 틀림없는 ‘국가범죄(State Crime)’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수많은 ‘병규’들의 죽음을 지배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정조(mood)다. 예상되는 적이기에 소멸시켜야 한다는 비약, 합리적인 판단과 상식의 중단, 심지어 수많은 고통에 대한 희열적 매혹, 그리고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미학화 혹은 숭고화 등. 나열된 학살의 정조는 여러 각도에서 그것에 접근하는 관점들일지 모르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한 혼란스러움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국가폭력에 의한 대량학살이 그렇듯 보도연맹 사건 속 희생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의미 없는 대상(meaningless object)’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의 책(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담은『이것이 인간인가』) 제목처럼 죽이는 자를 향해서도 죽임을 당하는 자를 향해서도 ‘이것이 인간인가’를 외치게 하는 상황이란 말이다. 제주4·3사건 때도 그랬지만 목표하는 대상자를 찾지 못할 경우에는 그의 아내, 아들, 동생에 대한 ‘代殺’까지 일어났다는 점에서 그 학살의 목적은 학살 그 자체였으며 따라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외침은 한 번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

비극의 정조를 재생산하는 ‘잔혹함’은 사라졌나?

그래서 잔혹하다. 단지 (국가)권력과 폭력의 상관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잔혹함’이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이때의 잔혹함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둘 모두가 ‘날개 없는 두 발 달린 짐승’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죽이는 자는 자신이 인간의 생명을 박탈한다는 감각이 없으며, 따라서 죽임을 당하는 자는 먹이사냥에 성공한 맹수 앞에 놓인 한낱 고기 덩어리에 불과했다. 죽고 죽이는 전쟁 중에도 나름의 수칙을 세우고 인도주의를 요청해왔던 규범의 역사는 인간이 동물의 한 種이기를 거부하면서, 고통과 죽음의 우연성 앞에서도 인간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아니었던가.

문제는 여전히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계에서 ‘빨갱이(혹은 종북)’라는 기표는 그와 같은 비극의 정조를 만들고 잔혹함을 반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국가정책에 대한 비판과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의 요구가, 거친 바다 속에서 아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왜 그들이 국가로부터 생명권을 보호받을 권리를 박탈당했는지 진상을 규명하라는 요구가,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군사시설에 대한 반대가 利敵이 된다. 그/그녀가 진실로 빨갱이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도연맹 사건에서 그랬듯 ‘빨갱이’로의 분류는 손쉽고 강력한 무기가 된다. 요구와 반대를 외치는 자들은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이 되고 죽어도 되는 타자가 된다. 그래서 보도연맹을 소재로 한 다큐 영화 「레드 툼」에서 한 할머니가 내뱉는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 엄연히 존재하는 잔혹함과 실제적인 불안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혹시나 또 그런 세상 돌아올까 싶어서 겁이 나요. 옛날 세상 돌아올까 싶어서 겁이 나는 거라. 이 뭐… 아직까지 남북이 갈려서 안 있는교. 갈려 있는데, 겁이 안 날 턱이 있는가. 겁이 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가 통일이 되면 일거에 해소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국가, 민족과 같은 전체성에 통합되지 않는 것을 배제돼야 하는 차이로 여기는 한 ‘敵vs我’의 이분법에 근거한 분단의 논리는 통일이 된다하더라도 여전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남과 북은 분단 이후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다는 점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성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런 대비 없이 통일이 이뤄진다면 ‘빨갱이’는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새로운 타자의 기표가 돼 인간인 우리를 동물이게 하는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게 할 것이다.

따라서 통일을 준비함에 있어, 통일 이후 한반도의 삶이 그 이전과 다르게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금부터 역사를 거울삼아 차이에 대한 사유를 전환하는 것이다. 차이는 나와 다르기에 소멸돼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생성의 출발이라는 사유로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통적인 민주주의 개념에도 부합하는 것이지 않는가. 오히려 차이에 근거해 ‘빨갱이’라는 기표를 승인하는 것이 반민주적이었다는 점은 지난 1970~80년대의 역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자명하지 않은가.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거리의 상식에 또다시 ‘빨갱이’의 잣대를 들이밀려는 비상식이 버젓이 고개를 드는 오늘날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 ‘빨갱이’가 결국 ‘자기-파괴’의 기표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김종곤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건국대 철학과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그 치유방법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역사적 트라우마’ 개념의 재구성」, 「남북분단 구조를 통해 바라 본 ‘탈북 트라우마」’, 「기억과 망각의 정치, 고통의 연대적 공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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