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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로 떠나는 여행
무인도로 떠나는 여행
  • 정병섭 전북대 박사후국내연수과정·철학과
  • 승인 2017.01.2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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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정병섭 전북대 박사후국내연수과정·철학과

5~6평 남짓의 연구실. ㄱ자형 테이블 위에 모니터 2대와 컴퓨터, 노트북. 의자 뒤 책장에는 필요한 모든 책들이 구비돼 있고, 연구실 크기에 맞지 않는 널찍한 책상에는 논문, 원서, 각종 사전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다. 매일 아침 이곳에 들어와 나는 밤늦도록 무인도로 여행을 떠난다. 박사후국내연수과정은 내게 무인도로 떠날 수 있는 티켓이 됐다.

인문학에 종사한다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인문학이라는 폭넓은 개념만큼 모호하고 막연하기도 하다. 그래서 인문학 전반에 적용되거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보다는 내 경험으로 한정해서 서술해보기로 한다.

학부 때 전공한 유교철학, 흥미가 생겨 같은 전공으로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석사과정에서 느꼈던 것은 무언가를 분석하고 논증해 새로운 주장을 입증해낸다기보다는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도구를 습득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외국 논문과 서적들을 읽어야 했기에, 중국어와 일어를 공부해야 했고, 특히 번역서가 없는 원전들을 읽기 위해 한문을 익히는 데 석사과정의 대부분을 소비해야 했다. 이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고차방정식에 해당하는 문제를 풀고자 하면서, 그 이전에 덧셈과 뺄셈이라는 지극히도 기본에 해당하는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매우 힘들고 지루하기 때문에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했고,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 나름대로의 자기변명으로 선택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그 결과 석사논문을 작성할 때는 대체로 자신이 흥미를 느껴하는 분야에 도전하기보다는 선행연구가 많이 진행돼 있고, 연구주제에 해당하는 원전이 번역돼 있느냐가 선택의 중요한 잣대로 작용한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들을 정리하고 요약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됐고, 번역서가 있는 원전들로 주제의 범위가 축소되기도 한다. 군 제대 후 다시 같은 전공으로 박사과정에 진학했는데, 박사과정생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차 자료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적 능력이라는 것은 학자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문이라는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그것을 철저히 마스터하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2차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양철학의 각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자기 분야와 관련된 원전들을 자세히 번역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본적 토대가 마련돼야만, 이것을 바탕으로 다양한 학문적 논의가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점을 자각하고 내가 전공분야로 삼은 ??예기??에 대해서 연구와 함께 번역서 출판을 진행했다. 그러나 번역과 연구를 병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자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받게 되니, 생계라는 현실적 문제에 당면하게 됐고, 그로 인해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강의를 하고 다양한 사업에 참여하게 돼 정작 학자 본연의 임무인 연구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논문을 발표하는 것에 비해 작게는 몇 배 많게는 몇 십 배의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번역 작업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박사후국내연수 과정은 내게 연구와 번역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주었고, 나는 매일 낙원과도 같은 무인도 여행을 하며 십여 권의 번역서를 출판했고, 관련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정병섭 전북대 박사후국내연수과정·철학과
예기의 성립과 사상체계 연구로 성균관대에서 박사를 했다. 전국말기 전한초기 유가의 예학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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