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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자들이 승리하는 시대, 정치적 중용과 균형감각의 미덕을 돌아보다
극단주의자들이 승리하는 시대, 정치적 중용과 균형감각의 미덕을 돌아보다
  • 김민혁 미국 통신원/인디애나대 박사과정·정치학
  • 승인 2017.01.1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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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대학은 지금_ 크라이우투 교수의 『중용의 다양한 얼굴들』(2017)을 읽고
▲ 『중용의다양한얼굴들』의 표지.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나아가는 곡예사의 이미지를 활용했다.
미국 인디애나대 정치학과의 아우렐리안 크라이우투(Aurelian Craiutu) 교수의 신간 『중용의 다양한 얼굴들(Faces of Moderation: The Art of Balancingin an Age of Extremes)』(펜실베니아대출판부, 2017)은 무절제한 태도와 극단적 발언들로 잘 알려져 있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미국 대통령직 당선이라는 사건과 더불어서 우리가 다시금 고민해야만 하는 주제인 정치적 중용과 균형감각의 회복이라는 과제를 진지하게 숙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 책의 부제에도 포함돼 있듯, 중용과 균형감각의 기술은 정치의 공간에서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시기에 그 중요성이 한층 부각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지난해 말 출간직후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 피터 웨너의 칼럼 「트럼프처럼 되지 않는 한 가지 방법」(뉴욕타임즈, 2016년 12월 17일자)을 통해 소개된 바 있고, 또한 최근에는 미국의 공영라디오방송(NRP)의 교양프로그램 ‘온 포인트(Onpoint)’에서도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로서의 중용」이라는 제목으로 다뤄졌다.
 
『중용의 다양한 얼굴들』이 출간된 시기가 공교롭게도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극단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는 때와 맞물리며 시의성의 측면에 초점이 모아지는 경향도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 중용(political moderation)이라는 주제에 대한 크라이우투 교수의 관심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2012년에 출간된 그의 또 다른 저작 『용기있는 마음들을 위한 덕목(A Virtue for Courageous Minds: Moderation in French Political Thought, 1748-1830)』에서 크라이우투 교수는 고대 정치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에서부터 시작해 근대사상가 몽테스키외, 그리고 프랑스 왕정복고 시기의 개혁주의 이론가 그룹의 주요사상가인 스탈(Madame de Stael)과 콩스탕(Benjamin Constant) 등의 정치사상을 정치적 중용의 측면에서 재구성한 바 있다.
 
서구 자유주의 전통 속에서 ‘중용’에 주목
프랑스 근대 정치사상사를 주요 연구분야로 하는 크라이우투 교수는 토크빌(Tocqueville)이나 기조(Guizot)와 같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정치사상가들을 비롯해 프랑스 혁명(1789년)을 전후로 한 시기의 자유주의적 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한 다양한 개혁주의 이론가 그룹의 사상가들에 대한 지성사 연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저술을 생산해왔다. 예컨대 『포위된 자유주의(Liberalism under Siege: The Political Thought of the French Doctrinaires)』와 같은 저서에서 그는 프랑스 혁명과 구체제의 복고를 경험한 이후의 프랑스 개혁주의 이론가 그룹의 사상가들이 전개시킨 독특한 자유주의 정치이론을 그들이 마주했던 복합적인 정치사회적 맥락과 연계시키며 서사를 구성해나간다. 그간 자유주의 정치이론에 대한 관심이 영국과 미국의 사상가들에 치중돼 있던 것을 고려한다면, 크라이우투 교수의 프랑스 근대 정치사상사와 개혁주의 이론가 그룹이 발전시킨 독자적인 자유주의 이론에 대한 조명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다양성을 더욱 풍부한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하나의 시도다.
 
인디애나대에서 정치사상을 공부하고 있는 필자는 크라이우투 교수를 여러 차례 만나서 그의 정치적 중용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필자가 지난해 초 그의 연구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의 연구실에 스크랩 돼 액자로 걸려 있던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스의「중용의 의미(What moderation means)」(뉴욕타임즈, 2012년 10월 25일자) 칼럼이다. 필자는 데이빗 브룩스의 온건하고 인간미 넘치는 필체를 좋아해 그의 칼럼을 오래전부터 챙겨봤었다. 그 중에서도 브룩스가 오바마 대통령과 롬니(공화당 대선후보)가 맞붙었던 2012년의 대선 선거유세 기간에 작성한 「중용의 의미」칼럼은 정말 좋은 글이라고 여겨서 여러 차례 읽어보기도 하고 주위에 소개하기도 한 특별한 글이었다. 이 칼럼에서 브룩스는 정치적 중용의 지혜는 현실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추상적 도식이나 진영주의적 사고의 오류에서 벗어나 현실의 구체적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고 절충적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는 지성적·윤리적 태도를 일컫는다고 지적한다.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그 칼럼을 찾아 읽어보니 칼럼의 말미에 브룩스가 크라이우투 교수의 『용기있는 마음들을 위한 덕목』을 언급하며 이와 같은 정치적 중용에 대한 관심이 보다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으로 글을 마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크라이우투 교수는 브룩스의 2012년 칼럼이 이후에 그의 정치적 중용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필자와의 대화에서 언급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신작 『중용의 다양한 얼굴들』은 2012년에 출간된 『용기있는 마음들을 위한 덕목』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정치적 중용의 덕목을 잘 실천했던 20세기 사상가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오늘날의 정치현실에 보다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중용의 다양한 모습들과 지혜를 탐구하는 노력을 담아낸 책이라고 평할 수 있다.
 
▲ 크라이우투 교수
진보-중도-보수의 정치적 중용, 그 다양한 표정들
이 책에서 크라이우투 교수는 다섯 명의 사상가의 목소리를 통해 정치적 중용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을 차례로 열거해보면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프랑스의 정치사회학자),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영국의 역사가, 철학자, 정치사상가), 노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 이탈리아의 법철학자, 정치이론가), 마이클 오크숏(Michael Oakeshott, 영국의 철학자, 정치이론가), 아담 미흐닉(Adam Michnick, 폴란드의 사회운동가, 언론인, 저술가) 등 다양한 기질과 더불어 진보와 보수, 중도를 아우르는 정치적 성향의 인물들로 구성돼 있다.
 
예컨대 영국의 철학자 오크숏은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에 관하여(On being conservative)」라는 제목의 그의 에세이에서도 드러나듯이 급진적 사회변화에 경계를 표명하고 전통과 기존의 질서에 대한 보다 큰 존중이 있어야 함을 그의 정치이론에서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폴란드의 언론인 미흐닉의 경우에는 폴란드 공산주의 독재정권의 통치 하에서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주장하며 적극적인 사회개혁운동에 앞장선 바 있다. 이와 같이, 정치적 중용의 덕목은 이념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공간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복합적이고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극단적·이데올로기적 판단을 피해가는 절충적이고 실용적인 자세와 판단 태도에 가깝다고 크라이우투 교수는 주장한다.
 
이 책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20세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유리한 입장(today’s vantage point)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지난 세기에 있었던 과도한 이데올로기적 투쟁, 공산주의 국가들의 억압적 통치와 몰락, 기술문명의 진보에 대한 과도한 믿음 혹은 환상 등의 사건들은 많은 지식인들과 사회운동가들을 때로는 극단적인 입장으로 몰고 갔고 심각한 오류에 휘말리게 한 주요한 원인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오류를 범한 이들과 바른 길을 택했던 이들을 나누는 일은 후대의 평가자의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와 복잡한 현실 속에서 외줄타기 곡예사가 균형을 잡아나가듯이 올바른 입장을 찾아나가야 했던 당대의 정치적 행위자들의 판단상황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판단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들이 발휘했던 지혜와 균형의 원칙들을 복원하는 것은 그보다 까다로운 해석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크라이우투 교수의 노력 역시 이 후자에 해당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저자는, 그리고 우리 독자들은 균형적 사고와 정치적으로 지혜로운 판단능력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정치적 사유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다.
 
아쉬움 혹은 미완의 과제들
책장을 덮으며 필자의 머리 속에 맴돌았던 아쉬움 혹은 미완의 과제들에 대해서도 몇 가지 말을 덧붙인다. 우선, 정치적 중용의 다양한 모습들을 접한 이후에도 그것이 가지는 차별적인 혹은 매력적인 특성이 무엇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료한 답을 얻지 못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대화의 기술’, ‘절충적 문제해결방법’, 그리고 ‘진리 앞에 겸손한 태도’등을 그 답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 책을 읽기 이전에도 알 수 있는 자명한 내용들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논의가 단조로워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러한 순간들을 견뎌내는 것도 독자가 지녀야할 중용의 미덕인걸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보다 다양한 독자들이 매력적으로 책의 서술에 빠져들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좀 더 전략적으로 고려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끝으로, 이 책에서 저자가 여러 차례 강조하듯이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덕성은 민주주의의 제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핵심적인 요건에 해당한다. 유사한 제도적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이한 운영성과를 보이는 조직이나 국가들을 우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민주정치에 꼭 필요한 시민적 덕성이 결핍돼 간다는 것은 민주주의 질서 자체의 근본적 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크라이우투 교수는 정치이념의 극단화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미국과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현실에 맞서서 오랫동안 잊혀져왔던 가치인 정치적 중용을 다시금 꺼내어들고 나왔다. 오늘날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극단의 시대를 살아왔던 20세기의 사상가들이 마주했던 현실과 그들이 보여준 다양한 모습의 정치적 중용의 실천들을 되새겨봄으로써 우리는 21세기의 새로운 모습을 한 극단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김민혁 미국 통신원/인디애나대 박사과정·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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