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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주조기술로 삼국시대부터 제작 … 신라 匠人의 숨결 가득
뛰어난 주조기술로 삼국시대부터 제작 … 신라 匠人의 숨결 가득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7.01.14 0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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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45. 일본 가시하라시 역사자료관의 신라철불(日本 柏原市立歷史資料館의 新羅鐵佛)
▲ ⑥ 철불두는 높이가 52cm나 되는 거대한 크기이다.

한국의 철불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제작시기가
앞서고 제작기법도 우수하며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불상의 한 종류로 인식됐다.
우리나라는 철불의 종주국으로 여겨져 왔다.

일본 가시하라市 역사자료관에는 우리나라의 鐵佛과 佛頭가 소장돼 있다. 이 유물들은 의사였던 일본의 한 유물소장가에게서 오래전에 기증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물을 기증받은 이후로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관리자들이 바뀌고 자료관 수장고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2013년 7월 12일 필자가 처음으로 이 철불을 실견할 때도 전시관이 아닌 수장고에서였다.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해 마침내 작은 수장고에 들어서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아미타여래상과 커다란 불두를 대면할 수 있었다. 부처님과 마주치는 순간 잠시 먹먹한 정막감에 휩싸였다. 소름까지 돋았다. 야무지게 다문 입가의 작은 미소는 천년의 신라를 대표하듯이 생생했으며, 바다건너 일본 땅에 모셔지게 된 기나 긴 사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작은 도시에 소규모의 시립 역사자료관과 어울리지 않는 걸작의 신라시대 철불을 그렇게 처음으로 실견한 것이다.
 

한국의 철불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제작시기가 앞서고 제작기법도 우수하며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불상의 한 종류로 인식돼 왔으며 우리나라는 철불의 종주국으로 여겨져 왔다. 철불은 강도가 높고 내구성이 강하며 靑銅佛에 비해 제작비가 적게 들고 대형화할 수 있으며 제작기간도 짧은 장점이 있지만 용융점이 높고 주물이 어렵기 때문에 섬세한 부분의 세밀한 표현은 鑄造하기 어렵다. 고난도의 주조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미 제철과 주조기술에 뛰어났던 古代의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철불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유물은 평양 청암리 고구려 절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고구려철불(高句麗鐵造金錯立佛)이다. 이 철불은 주조하고 난 다음에 화려한 금도금까지 입힌 불상으로 높이 약 30cm정도의 아담한 불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9년 출판된 일본책(朝鮮工藝硏究會 發刊)에 사진 한 장으로만 남아있고 현재 유물의 소재지는 불명이다.
현존하는 철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충남 서산군 운산면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항마촉지인의 手印을 한 鐵造如來坐像(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석굴암의 본존불과 가장 비슷하다.

정확한 생산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철불은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좌불(국보 제117호)로 서기 859년에 제작된 銘文이 표기돼 있다. 남북국 신라시대의 철불은 10여점 내외로 극소수가 전해지며 고려시대 철불은 60여점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대몽항쟁과 조선시대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외침과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수많은 불상이 수탈당하고 파괴당했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삼국시대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철불은 남북국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집중적으로 제작됐지만, 조선시대 숭유배불 정책의 영향으로 세계적인 철불의 제작기술도 소멸하게 된다.
10여점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은 신라시대 철불을 일본의 작은 역사자료관 수장고(사진2)에서 실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온전한 모습의 아미타여래좌상(높이 98cm)과 불두(높이 52cm는 보존상태도 놀라울 정도로 양호했다(사진1, 5, 6).

(사진1, 5)의 철조여래아미타좌상은 오른손 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올리고 왼손은 무릎에 둔 阿彌陀九品印 중에 下品中生印의 手印을 했다. 觀無量壽經에 의하면 중생들은 성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9등급으로 나눠 알맞은 설법을 해야만 구제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를 아미타9품인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높은 육계가 있고 나발이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야무지게 다문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목에는 뚜렷한 삼도가 있고 두툼한 가슴과 벌어진 어깨는 당당하며 法衣는 右肩偏袒으로 신체에 밀착한 입체감 있는 옷주름과 유려함이 돋보이며 결가부좌한 다리 사이에 부채꼴 모양으로 흘러내린다. 두 무릎은 안정적이어서 잘록한 허리에도 균형미가 돋보이고 국보 제27호인 불국사 극락전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닮았다(사진4).
 

분할주조법으로 제작해 몸체에는 이어붙인 자국이 선명하며 뒷면에는 쇳물을 부었던 구멍자국이 머리와 몸통, 엉덩이부분 3곳에 남아있다. 철불의 표면은 부식되어 두꺼운 녹이 덮고 있다(사진7). 현재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빠른 시일 내에 산화방지 등의 보존처리를 할 필요가 있으며 불필요한 녹을 제거해야 한다.

(사진 6)의 철불두는 높이가 52cm나 되는 거대한 크기다. 머리에는 커다란 육계와 나발이 붙어있으며 귀는 길게 늘어져있다. 지그시 감은 듯한 눈과 오똑한 코, 얼굴에 비해 작은 입, 머리뒷면의 쇳물 주입구 등이 (사진 1)의 불상과 동일한 계열로 추정돼 제작시기나 제작자가 같을 수 있다. 아마도 이 두 유물은 같은 곳에서 출토돼 소장자를 따라서 같은 곳으로 옮겨져 왔을 것이다. 철불 종주국의 자부심을 느끼게 할 만한 높은 예술성과 민족의 혼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원래는 철불의 요철이 있는 공간을 胡粉으로 두껍게 메우고 금도금과 화려한 채색을 더해 (사진4)처럼 화려했을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당나라 무종(재위 841~846)의 폐불정책으로 폐기됐던 철불들이 발굴되고 있다. 발굴된 당나라 철불을 근거로 당나라철불이 신라철불의 기원이 된다고 주장하는 일부 연구자가 있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이론이다. 사대주의 文化流入論에 입각한  주장으로 국내의 철불연구조차 제대로 마치지 않고 섣부른 결론을 도출시킨 결과다.

일본 가시하라市의 역사자료관 관계자들에게 신라철불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도록 충분히 설명해 주었고 보존처리 문제도 시급한 문제로 제기했다. 유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돼 보존관리에 만전을 기해줄 것이다. 다시금 철불을 바라보니, 탄생한지 1천100여 년이 지났지만 신라 匠人의 숨결과 신라 불교의 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처님의 온몸에는 불멸의 생생한 기운이 넘쳤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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