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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후반 중후하고 세련된 남북국 신라시대 불상 닮아 … “재조명 필요”
9세기 후반 중후하고 세련된 남북국 신라시대 불상 닮아 … “재조명 필요”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7.01.14 0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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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43. 홍천 수타사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座像)

강원도 홍천은 고구려시대 伐力川縣이었고 남북국 신라시대는 綠驍縣이었으며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개칭해 洪川縣으로 됐다. 홍천의 동면과 화촌면에는 화려한 날개의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인 孔雀山과 맑고 청정한 壽陀溪谷이 있다.
 

아름다운 명당에 자리한 공작산 壽陀寺는 수려한 경관 속에 배치된 가람으로, 본래 日月寺로 신라 성덕왕 7년(708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지만 원효대사는 686년에 입적했음으로 기록에 오류가 있는 듯하다. 고려시대까지는 禪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고 광종때 중수했다. 현재 일월사의 원 터에는 작은 3층 돌탑만이 외롭게 서있으며 조선 세조 3년(1457년) 계곡 맞은편에 현재의 수타사 자리에 옮겨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전소돼 폐허로 남아 있다가 인조 14년(1636년)에 중창을 시작해 1658년 興懷樓를 건립하기까지 22년 만에 가람의 형식을 갖추게 됐다(사진①).

이후에도 헌종 11년(1670년) 梵鐘을 주조해 봉안했고 헌종 15년에는 천왕문인 鳳凰門을 세웠으며, 숙종 2년(1676년)에 봉황문 안에 塑造四天王像을 조성했다(『월인석보』권17, 권18이 1957년 사천왕상 복장에서 발견됐다). 고종 15년(1861년)에 중수했으며 1878년 東禪堂을 재건하고 七星閣을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절터에 법당을 지으면서 중창이 시작된 이래로 약 200년간 꾸준한 佛事로 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됐고 다행히도 한국전쟁의 戰禍를 입지 않아 건축물은 물론이고 전해지는 佛具들도 온전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
 

수타사의 本殿인 大寂光殿은 비로자나불을 主尊으로 모신 법당으로 임진왜란에 피해를 입은 사찰을 중창할 시기인 인조 14년(1636년)에 工岑大師가 중건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의 다포집(공포로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꾸며 놓은 집)으로 내출목(공포에서 안쪽으로 내밀어진, 기둥의 중심에서 벗어나 도리를 받치는 나무토막)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정면의 문은 가운데 칸에 4분합 띠살문을 달고 옆문은 두 짝 분합의 빗살문을 달았다. 특히 기와지붕 기와가 밀려나지 않도록 대못으로 고정한 자리에 멋들어지게 세운 백자연꽃봉우리장식은 짜임새 있게 구성한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빛나게 해 준다(사진②).

법당 안에는 主尊佛인 비로자나불 위의 닫집(궁궐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이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닫집의 천정 가운데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黃龍이 자리 잡고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 주변에는 하늘에 떠있는 연꽃들과 天衣를 날리며 날고 있는 飛天들이 극락조와 어우러져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1천500년 전 무용총이나 장천1호분과 같은 고구려벽화고분의 천상세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형상이다. 또한 서까래 아래 붙어있는 편액(‘寂滅宮’)과 수십 겹의 공포들도 조선시대 목조각의 섬세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사진③).
 

이 외에도 다른 사찰에선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淸水를 올리는 돌기둥받침과 흥회루 안의 법고대, 영산회상도, 지장시왕도, 홍우당 부도, 범자무늬동경 등 수많은 유물들이 전래되고 있다. 그러나 이 많은 유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유물이 있으니 바로 대적광전에 모셔진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다(사진④). 이 부처님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설은 어디서도 찾기 어려우며 의견을 제시한 전공자도 없었다. 필자는 수타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이 부처님을 뵐 때마다 안쓰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로자나여래는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부처님이다.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하는 의미를 지니며 화엄종의 主佛로서 왼손은 주먹을 쥐고 검지를 세워 그 끝마디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智拳印의 手印을 한다. 남북국 신라시대 조성시기가 명확한 불상으로 석남사 비로자나불상(766년)이 가장 빠르고 장흥 보림사 비로자나불상(859년),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상(865년) 등이 정확한 제작시기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8세기경 등장해 고려시대에도 활발하게 제작됐으며 그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불상의 재료는 木造, 石造, 鐵造, 金銅造 등 매우 다양하며 전국적으로 제작됐다. 아울러 비로자나불상은 독존불로 모시기도 하지만 三尊像으로 모실 때는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로 조성한다.
수타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여러 차례의 개금불사로 인해 조성 당시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상의 전래경위나 조성시기도 그간 명확하지 않아 중요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照明받지 못했다.
 

이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신체의 비례, 相互의 짜임새, 왼쪽 어깨를 넘어 흘러내려오는 法衣를 종합해 보면 9세기 후반의 중후하고 세련된 남북국 신라시대 불상과 유사하다. 頭像은 커다란 육계에 螺髮이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이마에 백호가 있으며 눈을 약간 아래로 지켜 뜬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얼굴모습이다. 목에는 두터운 三道가 있으며 알맞게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가슴은 당당한 기운을 품고 있고 약간 잘록한 허리는 기교를 잊지 않고 있다. 몸체위로 흘러내린 법의는 매우 사실적이고 유려하며 얇게 표현돼 몸에 착 달라붙어서 신체의 아름다운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대부분의 비로자나불상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는 智拳印의 手印을 하는데, 이 불상은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처럼 오른손의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는 지권인의 手印을 하고 있다(사진⑤).      

      
이 불상과 가장 유사한 불상은 신라 진성여왕이 화엄사상을 위해 제작한 불상으로 알려진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으로 수인의 형태뿐만 아니라 신체의 비례와 이목구비, 법의 등이 거의 비슷해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상의 제작연원이나 유래에 관해 명학하게 아는 이가 없고 과거 다른 사찰에서 모셔진 것으로 口傳되기 때문에 좀 더 면밀한 학술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하루속히 불상의 제작시기를 밝혀 올바른 가치를 부여받게 하는 것은 후손의 의무다.
필자의 생각대로 ‘수타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남북국 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확인되면 우리는 잊혀 질 뻔한 9세기 신라시대 금동비로자나불의 새로운 탄생을 맞게 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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