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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의 개척자 … 미국으로 망명한 제2빈학파의 중심축
현대음악의 개척자 … 미국으로 망명한 제2빈학파의 중심축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1.10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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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10. 아르놀트 쇤베르크
▲ 프란츠 제처가 찍은 빈시절의 쇤베르크.1922. 사진출처=www.schoenberg.at

쇤베르크의 경우는 개인적인 측면보다는 독일을 대표하는 한 인재가 명명을 떠나야만 했던
한 유형으로 상정해 추적하는 게 좋다. 지성사를 염두에 둔 역사적인 맥락에서, 혹은 지식과
지식인들이 어떠한 지각변동을 일으키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 예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는 유럽 지성사 혹은 20세기 서구 지성사연구의 일부분일 수가 있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도망치듯 독일을 떠나야만 했던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식인이기 이전에 나치가 무조건 제거해야할 정적이었다. 음악 분야에서는 한스 아이슬러가 그러한 인물에 속한다. 음악사적으로 볼 때 아이슬러는 순수음악에 반항하며 음악의 사회적 기능을 실현하고자 했던 작곡가다. 하지만 망명의 원인은 순수음악에 반항한 것이 아니라, 음악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 나치체제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타도해야할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데 있다. 무엇보다도 나치와는 상극인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지식인들은 대략 1933년 2월 27일 밤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조국을 떠났다. ‘긴급조치권’ 발동으로 대대적인 체포 구금이 행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제1차 망명의 물결 때 떠나지 않았던 예술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 떠나지 않았다기보다는 아직 그래도 머무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극단적인 정치·사회적인 운동을 하지 않은 유대인 혈통의 순수 학자 예술인들이었다. 공산주의자는 무조건 타도해야할 정적이었지만, 유대인의 경우는 다만 깨끗한 아리아-독일인들의 피와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청소해야할 인종일 뿐이었다.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었다.

▲ LA에서의 쇤베르크 가족-프리츠 스티드라이.1949사진출처=www.schoenberg.at

유대인이 마치 독일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며 사는 것은 꼴사나운 일이었다.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 중에는 대대로 독일에 살며 독일식으로 교육받고 독일의 전통 속에 살았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자신이 독일인이라고 믿는 사는 경우는 허다했다. 학계나 예술계의 경우 확고한 위치에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고 보니 유대인으로 밝혀진 인사들이 있었다. 나치가 그들을 그냥 그대로 둘리 없었다. 사회적인 평판이나 지명도로 볼 때 고위인사에 속할지는 몰라도 나치에게는 그냥 청소해야할 쓰레기였을 뿐이었다. 그러한 인물의 하나가 음악 분야에서는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nberg, 1874~1951)였다.

뒤늦게 ‘유대인’으로 밝혀진 쇤베르크의 망명 표정

쇤베르크는 1933년 당시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의 작곡교수였다. 더구나 저명한 음악가였다. 하지만 나치의 눈에는 그저 더러운 피가 흐르는 유대인일 뿐이었다. 베를린에 소재하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는 1694/1696년부터 프리드리히 선제후 및 후일 프로이센 왕인 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교명을 하사받아 20세기 중반까지 유지됐던 빛나는 전통의 예술 교육기관이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수많은 음악가들 역시 예술 활동을 금지당하거나 현직에서 내몰리게 됐다. 독일의 오케스트라나 오페라하우스는 대부분 국립이기 때문에 나치정권이 유대인을 색출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가를 가려내는 것은 간단했다. 오케스트라나 오페라하우스뿐만 아니라 음악대학이나 일반 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적용된 법령이 이른바 ‘공무원 신분 원상회복 법(The Law for the Restoration of the Professional Civil Service, Gesetzes zur Wiederherstellung des Berufsbeamtentums)’이었다. 줄여서 ‘직업공무원법(BBG)’이라고도 한다. 1933년 4월 7일 발령된 이 법은 유대인이나 유대인 혈통의 혼혈아를 대학이나 공공기관에서 합법적으로 퇴출시키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쇤베르크 부부는 ‘공무원 신분 원상회복 법’에 의거해 대학에서 퇴출당한 후 1933년 5월 16일 한 살배기 딸과 함께 파리로 망명했다. 이미 그해 3월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당국으로부터 인종적인 이유로 ‘당신은 학교에서 원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통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적미적 베를린에 남아 있던 중 법령이 발동되자 급기야 독일을 떠난 것이었다. 파리에 있던 매제가 그곳 독일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편지를 보내온 것도 한몫했다. 쇤베르크가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독일에 남아있던 배경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쇤베르크 자신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서있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의 음악은 독일음악사 전통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전통 속에서, 그 음악사적 흐름에서 새로운 음악을 개척한 사람이었다.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었지만 공식적인 종교는 기독교였다. 하지만 나치가 볼 때 이 모두는 독일인으로 ‘포장한’ 유대인일 뿐이었다. 더구나 유대인이 독일의 전통음악을 대표한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1933년 7월, 망명지 파리에서 원래의 종교였던 유대교로 다시 개종했다. 1898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터였다. 파리에서 몇 달을 보낸 다음 유럽을 떠나 10월 31일 뉴욕에 도착했다. 아마 이 무렵 쇤베르크는 언젠가 유럽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여유롭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는 유럽으로 돌아오지 못할 여행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쇤베르크가 떠나야만 했던 망명의 길은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 쇤베르크의 경우는 개인적인 측면보다는 독일을 대표하는 한 인재가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한 유형으로 상정해 추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치의 정적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나치를 공격한 적도 없고, 음악적으로 나치에 거슬리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쇤베르크는 지성사를 염두에 둔 역사적인 맥락에서, 혹은 지식과 지식인들이 어떠한 지각변동을 일으키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 예로 등장한다. 이러한 논의는 망명객 숙명에 관한 추적보다는, 유럽 지성사 혹은 20세기 서구 지성사연구의 일부분일 수가 있다.

서구 지성사의 한 장면 혹은 망명 음악가의 전형

쇤베르크는 망명 음악가로서 전형적인 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후기낭만파로부터 출발해 표현주의 양식을 발전시킨 음악사적인 작곡가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에 의해 음악의 틀과 방향을 전수받은 쇤베르크는 전통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대 음악을 개척한 인물이다. 특히 1910년부터 1915년 사이에 쓴 작품들은 음악적 소재를 가장 철저하게 개혁하고 신장시킨 無調(Atonale Musik)의 작품들이다. 이와 더불어 쇤베르크는 ‘무조’를 발전시킨 중심인물로 ‘12음주의’를 창시했다. ‘12음주의’는 후에 ‘音列主義(Serielle Musik)’로 발전되며 ‘신 음악(new music)’ 작곡의 토대를 놓게 된다.

후기 낭만주의자들은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예찬하거나 숭배하고, 사회와 관련된 일체의 사람이나 사건들을 멀리한 사람들이다. 정치 사회적인 추악한 현실을 외면하고 오직 인생과 예술의 세계에 침잠해 목적 없는 예술을 추구했다. 그들에게 예술이란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  (L’art pour l’art)’이었다. 가난한 자들이나 억눌린 자, 인간 불평등 혹은 사회 부조리, 사회 변혁 및 이상사회 건설 등은 별 관심이 없고 인생과 예술, 사랑과 죽음, 삶의 희열과 고독 등이 그들의 주제였다. 작가로 말하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헤르만 헤세(1877~1962), 젊은 시절의 후고 폰 호프만슈탈(1874~1929) 등이 이 부류에 속했다.

굳이 작가들을 거명한 이유는 음악과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고, 쇤베르크는 당시의 시인인 슈테판 게오르게(1868~1933)의 시에 곡을 붙여 무조 음악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슈테판 게오르게나 릴케는 매일 매일의 현실, 시사적인 문제, 스스로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시민들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감을 뒀다. 대신에 선민의식, 단어의 음악성, 단어를 선별하고 정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문예사조의 경향은 예술성이 가득한 스타일 창조, 내면화와 고행, 멜랑콜리와 엑스타시가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쇤베르크의 작곡 대상이었다.

쇤베르크는 작곡을 소명으로 생각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순히 예술을 즐기거나 유용한 것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신의 부름에 대답하듯 예술의 본질에 열중했다. 잡다한 세상사를 음악의 세계에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리, 음악을 위한 음악을 했다. 음악은 본질이지 매개체나 사용물이 아니었다. 쇤베르크는 “왜냐하면 이것이 예술이라면, 그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예술은 대중이나 인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명의 길이었다.

예술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예술에는 어떠한 격앙도 있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예술은 차갑다.”라고 엄격히 가르쳤다. “예술은 일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축제일을 위해 있는 것”이라며 예술을 유희하듯 대하는 저질 예술과 진정한 의미의 예술을 분명히 구분했다. 이에 따라 “예술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만 한다에서 오는 것, 즉 k?nnen(can)이 아니라 m?ssen(must)”이라며 예술 작업에 대한 전력투구를 지시했다.

이러한 예술관이 암시하듯 쇤베르크는 소명의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열정적인 음악 선생님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수없이 많은 저명한 작곡가, 지휘자, 음악학자들이 쇤베르크의 제자들이다. 쇤베르크는 빈과 베를린, 그리고 미국에서 작곡과 화성학을 가르쳤다. 안톤 폰 베버른를 위시해 이른바 빈(비엔나)학파와 베를린학파가 모두 쇤베르크의 제자들이다. 20세기 현대음악의 출발점이자 스승인 셈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출생지인 빈으로 돌아가 보자.

빈은 자타공인 세계적인 음악의 수도다. 왈츠의 탄생지로 유명한 음악가나 작곡가들이 이곳 출신이거나 이곳에서 활동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요셉 하이든,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가족, 요하네스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가 빈과 관련된 음악가들이다. 오늘날에도 오페라공연, 콘서트, 연극공연은 빈 사람들에게 매일 매일의 일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빈에서 음악과 문화는 일상사이다. 이곳 빈에서 쇤베르크가 탄생했고, 제2빈학파를 형성하며 중심인물이 됐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황제제국 영토에 속했던 헝가리 출신이고, 아들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태어나기 20여 년 전부터 빈에 살았다. 어머니는 보헤미아 지방인 프라하에서 출생하고 프라하에서 자랐다.

▲ 쇤베르크가 빈에서 길러낸제자 알반 베르크

쇤베르크는 아홉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작곡은 독학으로 공부했다. 학교는 실업학교를 다녔고, 이 시기 행진곡과 폴카를 작곡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을 부양해야 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은행에서 일했다. 음악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자, 야외에서 공연하는 콘서트를 구경하며 스스로 음악을 깨우쳐 나갔다.

음악의 길에서 만난 세 사람의 조력자들

▲ 쇤베르크가 미국에서 키워낸제자 존 케이지

음악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 크게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의사이자 음악가였던 오스카 아들러(1875~1955)는 음악이론의 기본지식을 깨우쳐 줬고, 시문학과 철학도 가르쳤다. 음악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다비드 요셉 바흐는 윤리학과 도덕은 물론 ‘저속한 것과 흔해빠진 대중성에 대해 저항해야 함’을 일깨워 줬다. 마지막으로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1871~1942)에게 도움을 받았다. 지휘자인 쳄린스키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1898년 쇤베르크가 빈 음악동호회에서 연주하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작곡 수업도 해줬다. 그가 직접 말해주는 한 두 마디에,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쇤베르크는 브람스, 바그너, 말러, 모차르트 등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스스로 공부하고 깨우쳤다. 쳄린스키를 통해 빈에서의 음악생활 토대가 마련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빈과 베를린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뷜마 폰 붸베나우(1898~1902), 알반 베르크(1904~1911), 안톤 폰 붸버른(1904~1908), 에곤 뷀레쉬(1904~1905), 에르윈 슈타인(1906~1910), 프릿츠 츠바이크(1910?1912), 에른스트 바흐리히(1916~1917), 에르윈 라츠(1917~1920), 빅토르 울만(1918~1919), 한스 옐리넥(1918~1919), 루돌프 제르킨(1918년 이후), 루돌프 콜리쉬(1919~1922), 한스 아이슬러(1919~1923), 요셉 루퍼(1919~1933), 오트마 슈타인바우어(1920~1921), 요젭 코플러(1921~1924), 한스 에리히 아포스텔(1922년에서 1923년), 로베르트 게르하르트 등이 빈 시절의 제자들이다. 이들 중 쇤베르크의 개인 집에서 교습을 받은 한스 아이슬러, 루돌프 콜리쉬, 에르윈 라츠, 막스 도이취, 칼 랑클 등은 위대한 음악가나 작곡가가 됐다. 이들 중에는 무보수로 교습을 받은 제자들도 있었다.

빈과 관련해서는 제2빈학파를 잠시 집고 넘어가기로 한다. ‘제2빈학파’란 음악사에서 20세기 초반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중심으로 모인 작곡가들을 말한다. ‘新빈학파’라고 하기도 하고 ‘빈 무조 학파’라고도 한다. 이 학파는 ‘新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쇤베르크 이외에 쇤베르크의 수제자인 알반 베르크와 안톤 붸버른이 중심인물이다. 1908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무조 기법을 발전시킨 다음 1920년대에 12음 기법을 완성했다. 그 기법을 쇤베르크의 제자들이 수용해 발전 시켰다. 빈학파는 1930년대 해체됐다. 쇤베르크가 망명을 떠나야 했고 1935년 알반 베르크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작곡계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쇤베르크는 1925년 베를린 소재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에 초빙을 받아 교수직을 수행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이 음악적 巨頭를 추방했을 때, 쇤베르크는 개인적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고, 분개했다. 자신의 음악이 독일 전통음악사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것과는 무관하게 인종적인 이유만으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쇤베르크 개인의 망명은 독일 전통음악의 망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제자인 알반 베르크는 스승의 망명을 보며 “이것은 확실히 무서운 일이다. (……) 모국어를 말할 수 있었던 나라에서 추방돼, 집도 없이 (……) 어디에서 무엇으로 살아간단 말이냐”라며 한탄을 했다.

1933년 뉴욕에 도착한 후 쇤베르크는 보스턴과 뉴욕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쉬지 않고 작곡도 했다. 1934년 로스앤젤레스로 거주지를 옮겨 남가주 대학교(USC)에서 개인교습을 했다. 음악은 보통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세계적인 언어라고 한다. 하지만 망명음악가들에게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쟁이 여간 심하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곳 자본주의의 나라 미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배우러 온 사람들 중 처음부터 수업료를 낼 처지가 안 된다고 털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빈에서처럼 그들을 받아 가르쳤다.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신음악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존 케이지(1912~1992)다.

‘신대륙’ 미국에서 길러낸 제자 ‘존 케이지’

존 케이지는 엄격한 스승 쇤베르크를 만나 엄격한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러한 결과로 과거 불협화음과 협화음 사이의 논쟁을 극복하고 ‘소음과 음악적인 음 사이의 논쟁’을 예견했다. 어떻게 보면 쇤베르크가 존 케이지 같은 이러한 혁신적인 제자를 길러낼 수 있었던 것은 전통음악이나 형식으로 꽉 막힌 유럽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신대륙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은 유럽에 비해 문화나 전통으로 한참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었지만 망명 지식인을 통해 전통위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있었다. 쇤베르크와 존 케이지가 바로 그러한 관계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쇤베르크보다도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음악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과 학문분야에서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1941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미국 UCLA 교수를 역임하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영면했다.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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