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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인 질서의 형성과 신뢰할만한 제도가 시사하는 함의들
자발적인 질서의 형성과 신뢰할만한 제도가 시사하는 함의들
  • 김민혁 인디애나대 박사과정
  • 승인 2017.01.10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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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대학은 지금_미국 학계에서의 공공정책과 제도 연구 동향

필자는 지난 넉 달간 미국 인디애나대 오스트롬 워크샵에서 개설됐던 제도연구 세미나 (Institutional Analysis: Concepts and Applications)에 참여했다. 이 대학원 세미나 수업은 인간사회의 공식적 제도들(예컨대, 법 체계)과 비공식적 제도들(예컨대, 규범)이 개인적 혹은 집단적 단위에서의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방식들에 대한 학제적(interdisciplinary) 탐구를 지향했기에, 정치학·경제학·공공정책학의 세 학과에서 동시에 박사과정 수업으로 인정됐다. 이 글에서는 이 수업에 참여한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흥미롭고 유익하게 여겨졌던 학문적 자료들을 정리하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세미나는 오스트롬 워크샵의 소장인 앨스톤 교수(Lee J. Alston)와 부소장인 카루가티(Federica Carugati) 교수의 공동강의로 진행됐으며, 다양한 전공, 예컨대, 정치학, 경제학, 정책학, 인류학, 법학 분야 등의 대학원생들이 참여했으며, 더불어 오스트롬 워크샵의 방문교수들도 함께 한 가운데 한 학기동안 이어졌다.

이 세미나의 담당교수인 앨스톤 교수가 최근 발행된 인디애나대 경제학부 동창회보 (Alumni Newsletter for the IU Department of Economics, Summer 2016, VOL. 28)의 인터뷰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제도연구 및 제도관련 경제사 연구는 최근 들어 미국의 최고수준의 대학원 경제학 프로그램들에서 필수로 이수해야 할 코스로 여겨지고 있다. 비단 경제학에서뿐만 아니라 정치학에서도 제도연구는 신제도주의 이론 등의 형태로 중요한 연구들이 출간되고 있다.

과제 ‘제도는 중요하다’와 씨름한 한 학기

한 학기 내내 세미나 참여자들이 붙들고 씨름했던 학문적 과제는 ‘제도는 중요하다(Institutions matter)’였다. 그러나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시켜온 다양한 제도의 형태들과 특성들은 실로 방대한 것이었기에, 어떠한 의미에서 그리고 어떠한 맥락에서 제도가 우리의 삶과 행동양식에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탐구가 이어졌다.

학기 전반부에서는 인간이 만든 제도들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틀로서 경제학자 로널드 코즈(R. H. Coase, 199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노벨경제학상 강연원고와 그의 논문 「사회적 비용의 문제(The Problem of Social Cost)」를 중요하게 다뤘다. 이 논문에서 코즈가 주장한 중요한 통찰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 개개인이 자신의 효용을 증가시키려고 행하는 대부분의 행동들은 필연적으로 그 행동과 연결된 타인의 효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상품생산을 위한 공장설립과 운영은 깨끗한 공기를 원하는 시민들의 효용을 감소시키고, 반대로 환경보호를 위한 규제의 강화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효용과 보다 저렴한 상품구입을 원하는 다수의 소비자의 효용을 감소시킨다. 따라서 사회적 비용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문제의 상호적 성격(reciprocal nature)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상호적인 행위의 연결망 속에서 행위자(개인 혹은 집단)들의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효과적으로 조정(coordination)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규율하는 제도적 환경들(institutional settings)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청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론적 축으로서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은 계약의 형성과 이행, 그리고 재산권(property rights)과 거래비용(transaction costs)의 이슈들이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제도연구의 관점에서 규정하는 재산권의 속성은 그것이 단지 소유자의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중요하게는 그 재화를 둘러싼 다양한 타인들과의 관계까지 포괄해 정의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재산권은 ‘다양한 권리들의 묶음(a bundle of rights)’이라는 표현으로 가장 잘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특정한 행위주체가 자신이 소유한 재산권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권리행사를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 일종의 거래비용의 개념에 속한다. 예컨대, 토지의 소유주가 자신이 소유한 필지에 대해 울타리를 설치해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데 드는 비용, 혹은 특정한 권리의 소유자 집단(예컨대 부동산 소유자 집단)이 권리의 실질적 소유권 강화를 위해 정부나 의회에 로비를 하는 비용 등이 거래비용의 범주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계약과 권리는 그 내용과 이행의 측면에서 불완전성을 수반하고 있고 이에 따라서 명목상의 권리(de jure rights)와 실질상의 권리(de facto rights)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기 때문에, 어떠한 방식으로 이것을 조정하고 관련된 행위자들을 규율할 것인가(예컨대, 보상 혹은 처벌을 통해)의 문제가 제도연구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된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연구들

이러한 이론적 틀을 기반으로 학기의 중반과 후반부에서는 정말 다양한 형태의 공식적·비공식적 사회제도에 대해 살펴보고 개별적인 제도들의 특성에 관한 토의가 진행됐다. 예를 들어서, 캘리포니아 골드러쉬 시기의 금광채굴권과 분쟁조정 제도(Clay & Wright의 2005년 연구), 아이슬란드의 의료기록의 사용과 관련된 재산권 제도의 진화(Eggertsson의 2001년 연구), 중세 잉글랜드 타운들의 준-공유토지에 대한 자원남용 억제 시스템(Smith의 2000년 연구), 다이아몬드 산업에서의 도매계약에 관한 독특한 규칙들과 사회적 평판에 의한 질서유지 매커니즘(Bernstein의 1992년 연구) 등에 관한 연구들을 비교분석하며 제도의 다양성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이번 학기의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세미나의 참여자들은 매주 부과되는 이론적 틀에 관련된 자료들과 사례연구를 연결시켜서 1페이지 분량의 잘 정리된 요약 및 분석 페이퍼를 제출해야 했고, 담당교수는 제출된 모든 페이퍼에 대해 평가와 제안을 포함한 상세한 답변을 제공했다.

학기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제도연구의 관심은 보다 공식적인 정치제도에 대한 것으로 발전됐다. 이익단체(6주차), 입법부와 행정부(7주차), 관료기구(8주차), 사법부(9주차), 헌법 차원의 정치질서형성(11주차) 등의 주제를 차례로 다뤘다.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특히 흥미를 가지게 됐던 논문들을 떠올려보면, (1)잘 조직된 이익집단과 반면에 조직되지 않은 일반대중들이 재선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자 노력하는 정치인들에 의해서 어떻게 대표되는가의 논리를 게임이론의 틀로 분석한 연구(Denzo & Munger의 1986년 연구), (2)의회 내 위원회 제도를 통한 안정적인 이해관계 연합의 형성과 유지(Weingast & Marshall의 1988년 연구), (3)17세기 영국 명예혁명 시기의 의회제도의 진화와 의회의 실질적 거부권 확보를 통한 새로운 질서의 신뢰형성(North & Weingast의 1989년 연구) 등은 이미 정치학에서도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연구들임과 동시에 오늘날의 정치현상을 분석함에 있어서도 유용한 통찰을 마련해줬다.

무엇보다도 이번 학기의 오스트롬 워크샵 제도연구 세미나를 통해서 내가 가장 크게 배운 점이 있다면, 공공정책과 제도연구에 대한 유의미한 탐구들은 단순한 비용-편익 분석이나 추상적인 이론적 틀을 통해서가 아니라 각각의 제도가 위치한 맥락과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제도 내에 위치한 개개인들의 이해관계와 믿음체계, 계약이 담보하는 신뢰성 등에 대한 탐구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왜 한국의 상가임대차 계약에서는 새로운 세입자가 이전의 세입자에게 상당한 금액의 권리금을 지불하는 관습이 형성되고 이어져왔는가? 이것은 단순히 비합리적인 관습이고 철폐되어야 할 관습인가? 아니면 그 관습 내에는 나름의 합리성이 내재돼 있고 이와 관련된 사회적 분쟁을 감소시키기 위한 보완적인 제도개선이 필요한 문제인가? 사실, 이것은 필자가 이번 학기 제도연구 세미나를 통해 발전시킨 페이퍼의 연구 질문이기도 하다. 학기를 마치면서 필자는 제도연구의 학문적 영역에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느낀다. 더불어 제도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우리사회가 처한 복잡한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해줄 것으로 믿는다.

※ 오스트롬 워크샵의 2016년 가을학기 제도연구 세미나와 관련된 보다 상세한 내용(참고문헌 서지사항을 포함)은 워크샵 공식홈페이지에 올라와있는 강의계획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민혁 미국 통신원/인디애나대 박사과정·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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