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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넘쳐나는데 ‘어른’ 찾아보기 힘든 사회라니…
‘노인’ 넘쳐나는데 ‘어른’ 찾아보기 힘든 사회라니…
  • 교수신문
  • 승인 2017.01.0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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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0. 어른스러운 어른

동지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더니, 어느새 2017년 깨끗한 달력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한 해가 밝으며,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또 한 살을 더한다. 저항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개개인의 철학이자,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젊어보이시네요!” 

누구나 싫어하지 않는 입발림 말의 1순위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어려보여요!”라는 변형으로 쓰인다. 나이보다 젊어보인다, 또는 어려보인다. 이 말은 과연 칭찬의 말일까. 

어리다는 말의 어원은 『용비어천가』(1447년)에서 ‘어리다(愚)’로 등장한다고 한다. 중세국어에서 ‘어리다’의 의미는 이처럼 ‘어리석다(愚)’였다가 ‘나이가 적다(幼)’로 변화하면서 17세기부터는 ‘어린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라 한다. ‘어린 소견’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현대어에서도 여전히 ‘생각이 모자라거나 경험이 적거나 수준이 낮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옛날에는, 뭔가 잘못을 하면 철이 없다고 속이 없다고 핀잔을 들었다. 반대로 듬직하고 조신하다는 말은 칭찬이었기 때문에, 어른스럽다는 말이 오히려 좋은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변화가 생겼다.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1979)에 이르면 ‘젊은 여자끼리 몇 살쯤 어리다는 게 우월감이 될지언정 열등감이 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고 당시의 세태가 표현되었다. 어리다는 것이 여자의 우월감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론 젊은 여자들에 한한 이야기였고, 어른은 어른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언제부턴가 봇물이 터지듯 경계가 무너졌고,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서는 도통 나이를 짐작도 못한다. 

딸을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가 이모 같다느니, 심하면 언니 같다느니, 그런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게끔 ‘어려보이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남자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 아저씨보다는 오빠로 불리기를 좋아한다던가? 어리(석)게도!

등산복이 노인의 교복이 된 시대 

어려보인다는 것, 어린 것이 아니라 어려보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젊음만이 아름다운 가치일까. 온 나라가 운동과 건강식 붐이고, 건강관리를 받는 1년 회원권이 집 한 채 값인 곳도 있다는 뉴스에도 놀라움에 슬쩍 부러움이 섞인다. 

나이 들면 젊게 오래 살자고 운동을 하는 것이 생의 최종목적이 되어버린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웃도어가 노인들의 교복이 될 줄이야. 알록달록 옷들은 노구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고 겉돌아서 보는 눈이 다 피곤하다. 구부정하고 일그러진 자태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은 것이 아웃도어다. 히말라야 원정을 가는 것도 아니면서 온갖 기능성의 이름으로 너무도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도 않을까. 

그렇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돈이 소모되고 있다. 거기에 소모된 시간만큼을 더 산다고 해도, 연장을 위해서 그만큼의 시간이 사라졌으므로 플러스-마이너스로 답은 같다. 

또 젊어보이는 것이 생물체의 사멸과도 무관하다. 이 시대의 철학은 그런 진실에 눈을 감는 듯하다. 위아래며 애어른 할 것 없이 미모 집착증이 온 나라를 삼키고 있다. 벌써 10여 년 전에 영국의 BBC에서 <한국에서의 미모의 값>이란 특집방송이 있었다. ‘미모 광(beauty craze)’에 사로잡혀 천차만별의 값을 지불하고 때로는 위험까지 감수하며 완벽한 몸을 갖기 위해 애쓰는 이상한 사람들이란 취지였다. 취업에도 필수적이라고 하니, 어쨌거나 젊어서는 미모가 중요할 것도 같다. 또 슈퍼리치들은 천문학적 투자로 미모를 사들이므로, 부와 미모는 동일 차원에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노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젊어보이는 가짜 얼굴들이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삶에까지 침투했다. 무작정 시커먼 눈썹과 억지로 파놓은 동그란 눈 때문에 오히려 밉상스러워진 이 얼굴들을 어쩌란 말이냐. 이것은 차라리 미학적 쇼크다. 우리들 원래 동그란 얼굴은 눈썹도 가늘고 눈도 가늘 때 훨씬 더 예쁜 것을! 

한글문서를 작성하면서 순간 느낀다. 문서처럼 쉽게 ‘되돌리기’를 할 수는 없을까. 요양병원에 내팽겨져서도 그 짙은 억지 눈썹이 낙인처럼 시커멓게 살아있으면 어쩌나. 소용없다. 우리는 옛날부터 따라쟁이다. 영이네가 세탁기 들여 놓았으니 순이네도 빚을 내어서라도 세탁기를 들여놓아야 했던 그 시절부터다. 영이엄마가 했으니 순이엄마도 해야 하는 그것, 야매(!)성형과 미용주사들. 자유성형공화국 만세!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 들어 예쁜 얼굴이야 있을까만, 옛날에 우리가 어려서 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괜찮았다. 어려보이는 어른이 아니라 어른 같은 어른들이었다. 그것은 세월을 초월한 조화다. 지금도 기억한다. 적당히 늙고 주름진 얼굴에 적당히 센 머리에 적당히 굽은 등을 하고 널부렁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걷는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른 나이에 있었을 많은 어려운 순간들을 이기고, 이제 다가오는 종착역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삶은 편안하게 보였다. 가지고 갈 것도 남기도 갈 것도 많지 않아서 뭔가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삶이야말로 넉넉해 보였다.

내가 늙은이가 된 지금은 주변을 돌아보면, 파리하고 살짝 빛바랜듯 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노인들의 자태가 여간해선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초록도 단풍이 들듯이, 황홀한 단풍도 우수수 바람에 날리듯이, 자연을 닮은 노인들이 그립다. 왜 지금은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른스러운 어른되기가 힘들까. 거짓과 우격다짐으로 불린 명성과 재산이 많으면 잃을까 걱정이고, 없으면 없어서 분통나고 그러는 것일까. 통계수치로 보면 옛날보다 잘들 사는데, 어른들도 젊은이들 따라서 헬조선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새 달력을 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다르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중하차하지 않고 나이를 먹는 것은 축복이다. 지구가 아직은 허락한 또 한 번의 봄을 맞게 되다니!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어려서 골목 양지바른 곳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또래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제 손녀들은 고무줄놀이 같은 것을 모르니 노래를 가르쳐줄 수도 없게 되었나? 할 수 없게 되는 일은 어차피 많아진다. 다만 한 계단 더 오른 어른으로서 덜 어리(석)자고 다짐할 일이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전남대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인리히뵐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등을 썼다. 퇴임 후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 등을 내고 PEN문학활동상,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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