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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이 높다하되
태산이 높다하되
  • 석희태 편집인/연세대·의료법학
  • 승인 2017.01.0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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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석희태 편집인/연세대·의료법학
▲ 석희태 편집인

세월은 무심하고도 쏜살같이 흘렀다. 100만의 인명 유린을 당한 두 차례의 왜란이 끝난 지 30년도 채 안된 1627년 1월 또 다시 이 땅의 민초―우리 조상들은 북녘으로부터의 호란을 겪게 됐던 것이다. 왜 우리는 그리도 처참한 고난을 연거푸 당했을까?

평화와 행복을 기원해야 하는 희망의 정유년 새해 아침에 문득 ‘인종청소’까지 겪은 정유재란과 장차 수십만 ‘부녀상납’의 치욕을 초래할 정묘호란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당대의 君臣이 호국과 호민은 차치한 채 개인의 영달과 붕당의 이익만을 위해 권모술수로 국정을 농락한 탓이었던가. 현장과 실리는 외면하고 헛된 탁상의 명분논쟁으로 세월을 허송한 탓이었던가. 열도와 대륙의 정세변화에 무지했거나 태평성대의 백일몽 속에서 자신을 기망하고 있었던 탓이었던가.

무릇 파당의 경쟁을 기초로 하는 정당정치의 본지는 부조리의 견제와 혁신의 상호 자극에 있다. 그러므로 정치 公僕이 자신의 입지강화만을 위해 이른바 ‘정치공학’에 몰두하고 반대파와의 논쟁에서는 끝장보기 대결로 시종해 초월적 협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치의 범주에 들지 않는 바다. 국가의 이익은 따지지 않고 독선적 형식논리나 당파성 이데올로기에 집착함으로써 적시의 정책수립에 실패한다면 그 또한 정치라고 할 수 없다. 세상 물정 안 살피고 한때의 우물 속 평온을 大局 평화로 착각해 치명적 미래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작태는 기실, 정치에 대한 배신이요, 정론의 미명 아래 민생을 볼모로 하고 국가를 식재료로 삼는 정상배의 나눠먹기에 불과한 것이다.  

현금 세계의 경제와 군사 정세는 재편의 격동기에 진입했다. 그리고 새해는 특히 우리 국가 운영의 방식과 담당자를 새로이 선택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다. 선택의 실패가 곧 국가와 민족의 실패로 귀결될 수 있는 숙명의 시기다. 이때야말로 지식인의 지혜로운 언설과 처신이 요망되는 때다.

우리가 待望하는 정치 공복은 이렇다. 정치를 사익 도모의 수단으로 삼는 인물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일신을 희생해 가는 과정으로 삼는 인사여야 한다. 인심이나 인기를 끄는 몇 가지 성공으로 단기간의 명망을 얻은 인물이 아니라, 오랜 경륜으로 국가 운영의 역량이 충분히 인정되는 인사여야 한다. 짧고 선정적인 정치 修辭로 대중을 선동하는 버릇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깊은 철학·넓은 시야·원대한 미래구상을 긴 호흡으로 표출해 대중을 설득하는 인내심과 지구력을 지닌 인사여야 한다.

단순한 지위확보나 권력쟁취의 정략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인물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반대파당과도 협치와 공동혁신의 길을 견지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지닌 인사여야 한다.

대저 저러한 인사의 행로는 正道를 지켜나가되 더디고 덜 감동적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행로야말로 미래 大計의 기초이자 우리를 통합과 번영의 대해로 나아가게 하는 필요적 방책이므로, 우리는 저러한 인사를 지향하고 식별해내고자 애써야 하는 것이다.

역사를 회고하면, 정론 추구와 생산적 통합의 길은 멀고 험난했다. 그래도 그 일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그 정점이 태산같이 높아도 결국은 닿아야 할 시대의 목표다.

새해 아침에 간절한 심경으로, 일찍이 임진란을 예측한 봉래 양사언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나무가 자라 고사하지 않음이 흙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임과 같이, 국가가 평안하며 위태롭지 않은 것은 선비가 그 기운을 부축 배양하기 때문이다.”(‘殿策’ 중에서. 홍순석 교수 글 재인용)

석희태 편집인/연세대·의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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