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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집단으로서 재일의식 적극 표현”
“마이너리티 집단으로서 재일의식 적극 표현”
  • 양명심 건국대 강사
  • 승인 2017.01.0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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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12.재일조선인의 삶 그리고 그들의 기록

재일조선인 문학에 대한 관심이 재일잡지로까지 확대되면서 해방직후의 <민주조선>(1946~1949)에서부터 <한양>(1962~84), <삼천리>(1975~87) 등 조국과 관련이 깊은 주요 잡지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 잡지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남북한의 통일문제, 일본사회와 재일과의 관계, 재일조선인의 정치, 사회 상황을 총체적으로 다뤄왔다.

1세대들의 분단 조국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기록하는 것에서 출발해 정주화가 현실화되면서 앞으로 이방인으로서 폐쇄된 일본사회에서 어떻게 삶을 설계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재일의 현실적 삶을 구체화했다.

그 후, 1980년대에서 90년대는 재일사회의 세대교체가 본격화되면서 재일 잡지발행 활동이 특히 활발했던 시기다. <청구>(1989~1996), <민도>(1987~1990), <우리생활>(1987~1999), <사이>(1991~), <호르몬문화>(1990~2000), <월간미래>(1988~1997), <땅에서 배를 저어라>(2006~2012) 등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성격의 잡지가 모두 이 시기에 발행됐다.

재일 잡지가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며 재일조선인의 삶의 변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대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재일 잡지가 현재는 종합지 이외에도 문예지, 뉴스, 생활 정보지, 팜플렛, 사진잡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에서도 그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재일 잡지는 구식민지 종주국에서 차별 받으며 마이너리티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재일조선인들의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삶을 현재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일문예지 <민도〉 와 재일 민중 문화의 가능성

1972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일본문단에서 주목받은 이회성(1935~)은 기존의 재일 지식인 중심의 종합잡지와 차별화된 성격으로 재일잡지의 대중화 방안에 대해 모색해 왔다. 그 결과로 재일 2세 문인들과 함께 문예지 <민도>를 기획하고 발간했다.

         

1980년대 후반은 한반도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격동의 전환기에 해당한다. <민도〉의 발행은 재일 2세대 작가들이 고착된 ‘재일’의 억압된 현실에 대한 표현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최초의 기획이었다. 민족과 민주주의, 국제주의를 잡지 창간의 이념으로 하며, 재일조선인이 일본 사회라는 현실적 공간과 남한과 북한이라는 분단된 두 개의 조국 사이에서 체감하는 의식과 사상을 ‘문예’를 통해 모색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재일 1세대들은 남도 북도 아닌 통일 조국을 자신이 귀속해야 할 곳으로 여기며 통일지향적인 민족관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2세대들은 기존의 1세대 지식인들의 조국 중심의 피상적인 거대담론보다 재일의 독자적인 문화 운동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민도〉가 그 전환점에서 가교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재일 2세들은 고국의 문화와 실제로 몸에 체현된 일본문화 사이에서 항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분단은 결국 재일조선인 사회의 분열로 이어고, 분열된 체제와 정주국 일본이라는 이중적 틀 속에서 그들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왔다. 이들이 일본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임을 스스로 받아들이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중성과 민중성이 담보된 독자적인 민중문화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필연성에서 <민도>는 출발했다.

잡지 창간을 주도했던 이회성은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의 인터뷰에서 “재일에게 문화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문화기반 없이 일본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갈 수만은 없었다. 조국으로 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을 가진 채로 일본문화 속에서 가식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위해 독자적인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이 바로 이 잡지였다”고 회고한다.

1970년대의 <삼천리〉와 그 뒤를 이은 <청구〉가 당시 일본과 조선, 남북의 첨예한 대립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재일’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면, <민도〉는 조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재일 민중들이 독자적이면서 이질적인 문화공간 속에서 어떻게 재일의 변화된 의식을 증언하고 있는지 재일의 실상을 전하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무엇보다도 재일의 전환기에 그 뒤를 이어 나온 잡지 <호르몬 문화〉, <땅에서 배를 저어라〉 등의 새로운 성격의 재일 잡지를 견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주목된다.

<호르몬문화>와 재일문화의 현재

관서지방의 ‘버리다(ほる)’에서 온 ‘쓰레기’를 어원으로 하는 호르몬(ホルモン)은 일본 야키니꾸 요리에서 일본사람들이 버린 소, 돼지의 내장 요리를 말한다. “지금까지 재일조선인이 만든 잡지의 이름은 <삼천리>, <계림>, <민주조선> 등 조선반도를 가리키는 아호가 대부분이어서 이와 달리 ‘재일’의 독창성을 보다 잘 드러낼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없을까 고민했다”고 하는 발행인 고이삼 씨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호르몬문화> 는 그 이름에서 부터 재일조선인의 실생활 속에서 고안된 잡지라고 할 수 있다.

       

<호르몬문화>가 간행된 1990년대는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일본 내 재일조선인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시대이다. 이 때 신세대들은 민족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민족과 통일 조국 지향의 1세대의 재일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일본사회의 내부자이자 외부자라는 부정할 수 없는 이중적 입장에서 마이너리티 집단으로서의 재일의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1960~70년대 재일 1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에 펼쳐진 기존의 사회, 정치적인 거대담론 중심에서, 재일 대중들의 생활사적인 경험과 현실적인 삶까지도 통합적으로 담아내었다. 여기에는 희생적인 삶을 살아 온 1세들 덕분에 학력도 재력도 갖췄지만 진로, 취업, 결혼과 같은 현실 앞에서 언제나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2세들의 현실이나, 무조건적인 일본 혐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며 국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일본 국적만은 거부하고 싶어 하는 2세들의 모순된 정체성 문제 등이 기사화되고 있다. 또한 재일 2,3세들이 ‘재일’의 문제 뿐 아니라 일본사회 내에서 차별받는 마이너리티, 소수자의 사회문제에 이르기까지 연대적 관점을 가짐으로써 신세대 재일조선인들의 확장된 재일의식도 함께 담겨져 있다.

‘호르몬’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면서 그들의 삶을 대변해 주는 음식 문화이다. 이렇게 재일조선인의 삶이 녹아있는 ‘호르몬’ 인식에서 출발한 잡지 <호르몬문화>야말로 진정한 ‘재일’ 문화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양명심 건국대 아시아·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원, 디아스포라 문학

건국대 사범대학 일어교육과 강사이며, 일본 고베대학 문화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전주대 인문과학종합연구소에서 박사 후 과정을 연수했다. 저서로 『문학·민족·국가, ‘재일’문학과 제국 사이』(공저), 논문으로 「이회성의 청춘소설을 통해서 본 일본 전후, 「재일조선인과 ‘이카이노’라는 장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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