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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는 안 하고" 비판 들으면서도 불철주야 … 난국 돌파하려 총력했던 아픔의 시간들
"연구는 안 하고" 비판 들으면서도 불철주야 … 난국 돌파하려 총력했던 아픔의 시간들
  •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승인 2016.12.12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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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40년을 말하다_ 18. 운영난의 극복

한국행동과학연구소(KIRBS)의 운영이 오랫동안 어려웠다는 것을 조금은 격한 어조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소가 쓰러질 지경은 아니었다. 하고 싶고, 해야 할 연구를 마음껏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백척간두에 서 있는 듯한 끔찍한 심사였던 때도 있었다. 운영난의 근본적 이유는 재정난이었다. 재원 없이는 연구소 운영이 어려웠다.

오랫동안 우리 연구 프로그램을 후원하던 정부, 기업체, 외국의 원조기구가 우리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기금이 될듯하던 프로젝트도 염원처럼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재원난은 일찍부터 우려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 심각도는 우리에게 점점 더 큰 압력이 돼 다가왔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어차피 기금 없이 시작한 연구소였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로 재정을 확보하는 길밖에 없었다.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고 거기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우리에게 무슨 희한하고 특출한 묘수가 있을 리 없었지만, 난국 타개를 위해 애써 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당시 우리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어렵사리 연명은 해 가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에서 심리검사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다. 그것이 우리 손에 익숙하다고 믿고 이 분야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잘할 수 있고, 전문성을 갖추고 있고, 일하는 방법과 기술이 있다고 믿었다. 물론 새로운 일을 창안하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착수하는 데 예상하기 어려운 시간과 경비가 소요될 가능성이 있고, 그 상태 또한 가늠하기 어려웠다. 당장 긴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가 벤처 기업 같은 일에 도전한다는 것도 만만찮았다.

우리가 심리검사의 보급 가능성에 주목하고 거기서 활로를 찾기로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기업체의 문을 두드려 보기로 했다. 기업체에 주목하게 된 데는 우리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KIRBS의 조직개발연구부가 과거에 기업체 대상으로 교육·훈련을 하면서 그들과 맺은 인연이 있었고, 그들의 적극적이고 전진적인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기업체의 전진적 분위기란 운영자들이 인사관리에 있어서 과학적 접근에 상당히 개방적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간파한 것은 사원 채용에 있어서 심리학적 방법인 심리검사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당시 우리가 학교를 대상으로 한 검사 보급이 난관에 부닥쳤다는 것도 기업체를 보급대상으로 생각한 이유다. 우리는 검사 보급 대행기관과 몇 년 동안 협조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심리검사를 보급하는 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시장을 형성하면서 경쟁이 심해졌다. 우리 대행기관은 경영난을 내세우며 우리 검사의 보급에 소극적으로 됐다. 우리는 어차피 소극적인 대행사에게 적절히 대응하고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KIRBS의 축적된 심리검사 연구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이 방면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했다. 앞의 여러 글에서 KIRBS의 연구활동에 심리검사를 포함한 각종 심리척도를 개발하고 사용한 예를 많이 들었다. 우리는 심리검사에 대한 축적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또 대학 시절부터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심리연구실에서 정범모 교수가 심리검사를 제작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면서 검사에 대한 기본을 어깨너머로 배웠고 국내에서와 외국 유학 시에 심리검사 관련 공부를 했다. 미국 아동병원에서 상당기간 심리검사에 관한 연구와 실무체험도 했다. 대학에서의 학업경험과 병원에서의 실무경험으로 이 분야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어차피 검사 분류의 타깃을 지속가능한 곳으로 바꾸기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학교를 떠나 기업체로 기수를 돌렸다. 기업체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부터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1992년에 희망퇴직 등으로 다시 한 번 구조조정이 있을 때다.

일단 연구소 분위기가 수습된 뒤 이 일을 맡을 태스크 포스를 구성해 전열을 가다듬고 과거의 기업체와의 인연을 찾아 나섰다. 우리 프로젝트팀의 과제는 크게 검사의 실시, 고객 관리, 그리고 검사의 보완과 개정 등이었다.

첫째, 검사의 실시. 우리의 고객이었던 대부분의 기업체는 대형 회사로서 신입사원의 채용시험에 수백명 또는 수천명이 지원해왔다. 이 대집단에 대한 검사 실시, 지방 소재 자회사에의 출장 검사, 수십명의 검사자 동원과 훈련, 검사 실시 감독, 보안 문제 등, 방대한 행사였다. 그 뒤에 검사 결과의 신속한 처리가 이어진다.

1990년대 초반에는 인성검사 결과를 컴퓨터가 해설해 인출하는 기술이 완비되지 않았었다. 검사결과를 전문가가 직접 해설해야 했다. 이 작업은 이 방면의 석·박사 과정 이상의 교육을 받은 연구원이 맡아, 일차적 선별과 해설까지의 작업을 해야 했다.

검사팀의 두 번째 과제는 고객관리. 대부분의 회사는 매년 채용 행사를 실시하기 때문에 일단 우리의 고객은 매년 반복해 우리 검사를 사용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심리검사에 대한 부정기적 뉴스레터의 배포와 회사가 관심을 가질만한 토픽에 관한 소규모 분속을 실시해 제공하는 서비스 등을 포함했다. 우리가 과거에 조직개발연구의 일환으로 기업체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할 당시의 심리검사 활용 세미나도 지속했다.

셋째 과제는 검사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추후연구. 우리는 검사를 실시하고 결과를 제출하는 일에서 끝나지 않았다. 검사 문항을 분석하고 그 결과로 재표준화하고 피드백 해 개선하곤 했다. 검사의 재표준화는 부분적인 경우와 전면적인 경우가 있었으나, 우리의 독특한 기법으로 검사 문항을 부분적으로 재표준화하기도 했다.

검사팀이 기업체와 접촉하면서 대형 기업 그룹에서 인성검사와 적성검사의 중국어 및 영어판 제작을 의뢰해 왔다. 영어판은 그 회사의 동남아 소재 자회사 사원 모집에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검사는 홍콩에서 실시했다. 중국어판은 중국에 진출한 자회사의 현지 사원 선발에 사용되고 국내에서는 중국인 지원자 선발에 사용됐다.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제작된 외국어판 인성·적성검사는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됐다.(이 일은 박소연 연구원이 느끈히 해치웠다. 박 박사는 지금 숙명여대에서 강의하면서 ‘MindUp’이란 심리검사 관련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에피소드 한 가지―2006년에 검사 문항을 CD로 제작해 컴퓨터용 사인펜과 함께 다량 중국으로 수송했는데(2006년 당시 중국에는 컴퓨터 펜이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함), 통관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영문판은 인성검사 문항을 미국인 변호사가 인권문제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십수년간 KIRBS 검사팀은 오로지 원활한 연구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불철주야 뛰어야만 했다. 이 검사팀을 움직이게 한 것은 연구논문을 집필하고 발표하는 등 연구 성과를 내는 것에서 만족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복잡하고 귀찮고 신체적으로 힘든 일, 익숙하지도 않은 자금조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무엇으로 보상해야 하나?

연구소의 목적이 연구인데 연구는 안 하고 검사보급에 현안이 돼 뛰어다닌다고 비난할 만도 하다. 연구하겠다고 연구소에 온 사람들이 다른 일을 하다니. 활발히 연구하던 KIRBS가 연구를 못 할 때의 아픔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 검사팀을 이끌어 나간 핵심인물은 주영림 연구원이었다. 기업체 인사 담당 임원을 접촉하고 검사의 성격을 설명하고 채택을 권유하는 어려운 일을 했다. 부산으로 제주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누볐다. 검사가 실시되는 현장의 감독 일을 3~4명의 스태프와 함께 일사불란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밤새워가며 검사결과에 대한 코멘트하는 일을 소화해냈다. 이 엄청나게 복잡한 일들을 새로운 작업 네트워크의 시스템으로 구축한 원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IRBS는 이렇게 해서 사정이 회복돼 정상 궤도에 오를 계제가 돌아왔다. 상당히 오랫동안 버틴 성과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넉넉하진 못했지만, 유니세프가 1994년까지 도와줬고, 문교부와 보건사회부가 장기간 띄엄띄엄 지원을 해줬다. 인원 조절, 임금 조절 등 구조조정을 거듭하면서 연구소는 연면히 유지되고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연구소 연구 분위기의 실마리가 만들어지길 바랐고, 내가 연구소를 떠날 때 내 뒤를 이어 올 소장에게 운영비를 남겨놓고자 한 계획도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회한에 빠진 나를 발견했다.

우리가 재정확보를 위해 총력 투쟁을 하고 있을 때 “연구는 안 하고”라는 말이 들려 왔다. 당시의 연구소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런 인상을 가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연구소와 가까운 주변에서 그런 말이 들려 올 때는 그냥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한 편에서는 “연구소 이러다 넘어가지”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가상타”라고 격려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연구비 걱정을 좀 덜게 됐으니 그동안 그렇게도 갈망하던 연구를 하자. 이제 KIRBS의 진면목을 보이자”고 했다. 재정난에 재정 투쟁을 한 궁극적 목적은 우리 KIRBS가 연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한국행동과학연구소가 돈벌이하자고 출발한 게 아니었고, 돈벌이에 만족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어떤 개인의 영달을 위한 연구소도 아니다. 흡족한 기분으로 연구하자고 꿈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떠나지 않는 상처의 여운이 있었다.

십수년 전부터 고급 인력의 외면과 다른 유사기관의 화려한 발전, 그동안의 KIRBS다운 연구의 기근 등은 연구소 발전에 아픈 상처를 남겼다. 한 번 받은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았다. 쾌유를 위한 주삿바늘을 빼고 붕대를 뗐으나 그 상처는 눈에 띄는 흔적을 남겼다. 상처가 난 자리, 상처는 나을 때가 더 아프다고 했다던가. 내가 했어야 할 일을 다 못한 것이 많아, 그 아픔은 두 배가 됐다. 다만 이 상처가 영광의 상징으로 남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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