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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광화문을 생각한다
러시아에서 광화문을 생각한다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6.12.12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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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과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한국에서 먼 곳이다. 모스크바까지 9시간 하고도 30분,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한 시간 반을 왔다. 오후 1시 20분 출발, 여기 호텔에 당도하니 러시아 시간으로 자정이 가까웠다. 일단 자고 아침에 빨리 일어나자 하면서도 가장 먼저 확인해 보는 것은 와이파이가 되는지 하는 문제. 다음날 한국에서 탄핵 투표가 있는 까닭이다.

어떻게 잠에 빠져 들었는지 모르는데 깜박 눈뜨니 새벽 4시. 한국은 아마 아침이 넘었을 것 같다. 어떻게 되었을까. 밤새 달라진 게 있는지 확인해 본다.

별다를 게 없다. 국회에서의 투표는 오후 2시부터 시작된다 했으니 아직 멀었다. 인터넷을 연결해 보니 오후 3시에 시작이란다. 또 가결되든 부결되든 혼란이 일 것이라 한다. 10일 광화문 집회는 사상 최대가 될 것이라고도 한다.

지난 주말 광화문 집회가 ‘6차’란 소리를 들었다. 불과 두 달도 안되는 사이에 세상은 변했다. 요지부동이던 철옹성이 무너지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으로 보였던 ‘직접 민주주의’가 230만명이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끝이 아니다. 탄핵은 종착역이 아니라 중간역이다. 후세사가들이 ‘12월 혁명’이라고 부를지도 모를 역사적 과정이 이제 겨우 시발점을 지났을 뿐이다.

가결되면 헌법재판소 판결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때까지 결코 기다리지 않을 것 같다. 그같은 형식 논리를 따를 만큼 민심이 일상적이지 않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진실‘들’이 맨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 이 정부의 위기와 효력 정지는 지난 2014년 4월 16일에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후의 모든 절망과 질식은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둠 짙음이었을 뿐이다. 야만과 폭력과 음모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그 파산, 파멸은 이미 준비됐다. 듣는 자만 듣고 듣지 못하는 자는 듣지 못하는 초침 소리가 모여 이제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변했다. 우뢰 같은 소리, 벽력 같은 소리가 됐다.

국회에서의 탄핵안 투표를 넘어서 ‘12월 혁명’은 더 멀리까지 무섭게 내달려갈 것 같다. 세월호 참사라는 무섭고도 슬픈 사건이 결코 꺼지지 않는 혁명의 엔진으로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담장 안에 있는다고 모든 것이 안전할 수 있겠는지?

다시 이 12월 혁명에 대해 조금 더 시야를 넓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바로 앞에서 이 혁명은 끝이 아니요 오히려 사태의 앞부분에 해당할 것이라 했다.

이 혁명이 어디까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쉽게 점치기 어렵다. 우리 한국인들은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다가도 쉽게 식고 또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가볍게 속는 순진함마저 갖췄다. 뜻밖에 볼품없이 끝나고 말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 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12월 혁명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아니,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에서 발원한 긴 혁명의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확실히 그렇다.

지금 이 12월 혁명이 상대하고 있는 권부의 구성 요소가 바로 그렇게 ‘유구한’ 세월 동안 지배력을 행사해 온 세력이 아니던가. 우리는 망령 같은, 망량 같은 실체와 싸우고 있다.

이 12월 혁명, 여기에 함께 이어질 1월의 새로운 혁명은 긴 혁명의 일부분, 그 사이사이에 크고작은 ‘반동’과 퇴행을 가진, 기나긴 시민혁명, 운명적 사극 드라마의 일부인 것이요, 그 대단원을 알리는 신호라 할 수 있다.

아직 더 멀리 가야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목표 지점에 ‘훨씬’ 접근해 버린 시점이다. 백 년 후의 후세사가들은 그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격동의 시간들, 격류의 여울목의 흐름이 어느덧 느려지는 때, 그 멀지 않은 때에 다다르면 우리는 더 이상 원치않는 의문의 죽음들 때문에 소름 끼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기를 따르는 검은 ‘미행’의 시선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 이상 정당한 것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쫓겨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 약속의 날이 오기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 새벽에 간절히 기도해 보는 것이다. 깊은 우려와 기대 속에서 말이다.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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