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0-02-22 19:23 (토)
시와 연극으로 망명 현실을 기록 … 서방세계에선 오랫동안 의심받아
시와 연극으로 망명 현실을 기록 … 서방세계에선 오랫동안 의심받아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6.12.07 17: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8. 베르톨트 브레히트
▲ 안경 쓴 브레히트. 시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자 브레히트는 ‘적대외국인(Enemy Alien)’으로 지목돼 목록에
오르고 FBI의 감시를 받았다. 공산당당원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1947년 10월 30일에는
심사까지 받아야 했다. 매카시즘이 미국전역을 강타하던 시기였다. 전에 공산당원이었는지,
지금도 공산당원인지 묻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했다. 공산주의자이긴 했지만 사실상
공산당원인 적은 없었다. 그 다음날 파리를 행해 출발했고, 11월 5일 취리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년을 체류했다. 스위스는 브레히트에게 체류허가를 내준 유일한 국가였다.
 
독일 망명 지식인을 거론할 때, 빼놓고 넘어갈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1898~1956)다. 브레히트는 20세기 독일의 저명한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저명할뿐더러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가운데 하나다. 브레히트 희곡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고, 그의 시들은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어디나 마찬가지다. 프란츠 카프카,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국내에서 사랑받는 독일작가이지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그들과는 또 다른 바람을 몰고 이 땅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인기 작가다. 70년대까지는 감히 소개조차 되지 못하며 빨간색으로 분류되던 작가였다가 민주화의 열풍과 함께 무대에 오르기 시작하더니 무대를 내려올 줄 모르는 작가가 됐다. 대학 강의실이나 학계도 브레히트 열풍은 마찬가지다. 국내 독문학계에는 ‘한국독어독문학회’ 이외에도 개별 작가로는 ‘카프카학회’, ‘헤세학회’, ‘뷔히너학회’, ‘괴테학회’, ‘토마스만학회’가 있는데 ‘브레히트학회’ 역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만큼 학문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훌륭한 전문 학자들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웬만큼 연극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서푼짜리 오페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 『코카서스의 백묵원』이 브레히트 작품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카프카나 헤세, 그리고 릴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문학세계에 푹 빠져 작가와 함께 산보를 하며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면의 세계에 침잠하는 반면, 브레히트 애호가들은 대개가 전문가를 자처하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낭만과 순수의 작가들이 짙은 문학성을 풍긴다면, 브레히트 문학은 문학과 학문성, 시대와 현실에 대한 안목 등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과 연출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문지식을 구비해야 하는 전제조건이 그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알프레트 되블린이 현대 장편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브레히트는 현대 연극이 가야할 이정표를 제시한 거목이다. ‘서사극’ 이론, ‘소외효과’ 등이 바로 그 징표다.
 
연극, ‘소외효과’ 그리고 詩
▲ 시가를 문 브레히트. 그는 언제나 시가를 물고 있었고, 주변에는 가수와 배우들로 넘쳐났다.
브레히트의 문학적 가치는 연극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시대와 현실을 걱정하는 지식인이라면,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후손들에게」,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시편들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정말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순진하게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지만 나는 안다, 단지 행복한 자만이 / 사랑받고 있음을 / 그의 목소리를 사람들은 듣기 좋아하고 / 그의 얼굴은 아름답다(……) / 왜 나는 오로지 지나가는 사십대 아낙네의 / 구부정한 모습만 이야기하는가? / 처녀들의 젖가슴은 / 예나 지금이나 따스한데”, “지난밤 꿈속에서 /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하는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 /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는 구절들이 브레히트의 시다. 이 구절들을 브레히트는 망명지에서 읊었다.
 
브레히트는 수많은 작품과 문학이론으로 20세기 독일문학사에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그의 문학을 논할 때 망명 사실을 눈감아 버리고 유미적으로, 작품 내재적으로, 혹은 제 감정 내키는 대로 시인과 작품에 대해 말한다면 “시를 쓰면서 운을 맞추는 것은 /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작가의 말에 곧바로 무엇인가 어긋났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문학을 위해 살고 문학을 위해 죽는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을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브레히트를 앞에 놓고 생각하면 문학이란 결국 시대적 현실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브레히트가 아직 10대일 때, 첫사랑을 만났을 때처럼 “푸른 달 9월 그 어느 날 / 조용히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 조용하고 창백한 사랑의 그녀를 마치 우아한 꿈처럼 나의 두 팔로 끌어안았다”만 계속 읊조릴 수 있었다면 인생은 얼마나 풍요롭고 황홀할까! 하지만 자유로이 뛰놀던 개구리에게 돌이 던져진다면, 세상의 푸르름과 자연의 신비에 대해 황홀해 하며 계속 노래할 수 있을까? 맞아죽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도망을 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맹장 수술 직후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망명길에 올라
1933년 2월 27일 밤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발생했을 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맹장수술로 베를린의 한 병원에 누워있었다. 그 다음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병원에서 곧 바로 베를린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가족도 함께 했다. 프라하로 도망쳤다. 프라하는 베를린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도시였다. 기차를 타면 몇 시간이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망명객들이 선호한 첫 번째 망명지였다. 선호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최상의 길이었다. 부인 헬레네 봐이겔 (1900~1971)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브레히트는 독일에서 도주해야만 했다.
 
브레히트를 포함해 독일을 떠난 지식인들의 망명 원인을 추적하다보면 제국의회 방화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화재발생은 방화가 원인이었다. 마리뉘스 봔 데어루베(1909~1934)가 현장에서 범인으로 체포됐다. 네덜란드 출신 공산주의자였다. 아돌프 히틀러, 제국의회 의장인 헤르만 괴링, 히틀러 최측근인 요셉 괴벨스가 현장에 도착해 화재의 원인을 즉석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바이마르공화국시절 나치를 공격해댄 정적들을 소탕하기 위함이었다. 문인들 중에서는 칼 폰 오씨츠키, 에리히 뮈잠, 루드뷔히 렌, 에곤 에르윈 키쉬 등이 주요 소탕 대상이었다. 에리히 뮈잠(1878~1934)은 결국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법치국가의 종말을 고하는 ‘긴급조치권’이 발동되고 공산당 지도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비판세력이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됐다. 3월 중순까지 프로이센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체포당해 수용소나 고문실로 끌려갔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32년 11월에 치러진 선거 때보다 11%나 상승한 44%의 득표율을 올리며 합법적으로 나치 독재체제를 공고히 구축했다. 이를 근거로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잔재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 동독에서 발행한 브레히트 우표(1957).
정치상황이라는 것은 독재자 혼자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호응 내지는 침묵으로 용인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독재자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속된 국민들도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에른스트 톨러 말마따나 ‘독재자는 세상의 의견에 복종한다’, 그래서 ‘단어의 힘을 믿는다면 침묵해서는 안 된다’라는 가르침은 지식인들의 역할을 일깨워 준다. 침묵하면 독재자들은 꼭 바보취급을 하거나 이용하려 든다. 이제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은 서서히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암흑의 히틀러 독재체재가 공고해진 것이다. 브레히트는 이를 보며 “오 독일이여, 창백한 어머니여! / 어떻게 너는 더럽혀져 / 백성들 사이에 앉아 있는가. / 얼룩으로 더럽혀진 것들 사이에서 / 확연히 눈에 띄는 구나”라며 비통해 했다.
 
▲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억척어멈과그자식들』을 연극 무대에 올린 한 장면(1978).
1930년대 초반부터 나치들은 브레히트의 연극공연을 악을 쓰며 방해하기 시작했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1933년이 시작되자 「조치」 공연은 나치 경찰에 의해 중단됐고, 공연기획자는 국가반란죄로 기소 당했다. 브레히트는 영감에 의해 작품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관객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사실을 알리고 보여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나는 내가 본 것을 / 보여준다. / 인간시장들에서 / 나는 보았다, 어떻게 인간들이 / 매매되는가를 / 그것을 나는 보여준다, 극작가인 나는”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독재자들에게는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는 훼방꾼이었고 없애버려야 할 정적이었다.
 
브레히트는 천성이 작가였다. 아니, 오히려 예술가적 기질을 지녔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독일의 동남부에 위치한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만을 졸업하고 상인 수업을 받았지만 제지공장에 입사해 고속 승진하고 지배인을 거쳐 상업부서장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가톨릭신자였고, 어머니는 개신교를 믿었지만 부부 합의하에 아들 브레히트는 개신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당시 아우크스부르크는 가톨릭이 대세로, 개신교도는 소수자에 속했다. 브레히트는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수업을 받았고, 그중에서도 기타를 즐겨 쳤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 때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문예지를 발간했다. 시, 산문, 희곡을 썼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지역신문에 르포 기고하기도 했다. 18세가 되던 1916년부터는 후일 전집에도 실리게 되는 시를 쓴다. 천성이 작가였다. 브레히트는 뮌헨대에서 의학과 철학과에 등록했지만 의학 강의는 거의 출석하지도 않았다. 다만 현대문학 강의에 집중했고, 작가 프랑크 베데킨트, 오토 차렉, 한스 요스트 작품에 감격해 했다. 11월 혁명 후에는 아우크스부르크 노동자 평의회와 병사평의회 회원이 됐다. 여자관계는 다채로웠다. 만나면 사랑에 빠졌고, 끊임없는 육체관계와 임신으로 이어졌다. 주변에는 가수와 배우들이 항상 있었다. 그리고 브레히트는 가죽잠바에 빵모자를 쓰고 시가를 문채 그녀들 앞에서 누구나 감동하는 연출을 지도하는 작가 겸 이론가이자 감독이었다.
 
문학 위해 공산주의 선택 … 독일공산당엔 입당하지 않아
20대 초반 뮌헨에서 희곡작품을 초연으로 무대에 올렸고, 1924년에는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겨 칼 추크마이어와 함께 연출가로 일했다. 1926년부터는 혁명을 목적으로 공산주의에 빠졌지만 전 생애를 통해 독일공산당에는 입당하지 않았다.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자였다. 브레히트는 정치적인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문학실현을 위해 공산주의를 택한 셈이었다. 이때가 20대 후반이다. 브레히트의 마르크스 수용은 교조적이 아니었고, 무당파인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이러한 면은 칼 코르쉬(1886~1961)나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도 마찬가지다.
 
1927년 저명한 감독 에르윈 피스카토르(1893~1966)와 공동으로 작업했고, 1931년 『서푼짜리 오페라』가 영화로 개봉됐다. 쿠르트 바일(1900~1950)과 공동으로 서사극이론을 정립시켰다. 브레히트는 연극에만 정열적인 것이 아니라, 시, 가곡, 단편소설, 장편소설, 방송극 등 필요한 모든 장르를 작업에 자신의 재능을 모두 동원했다. 작품을 통해 사회구조를 간파하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문학과 인생을 위해 세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해설하고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해 처방전을 제시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1928년 쿠르트 바일이 작곡한 『서푼짜리 오페라』가 초연됐다. 이해 한스 아이슬러(1898~1962)와 우정을 맺기 시작했는데, 이 둘의 관계는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작가와 음악가 사이의 동반자 관계로 평가받는다. 이것이 대략 망명 전 브레히트의 이력이다.
 
망명 초반기 브레히트는 독일의 주변도시인 프라하, 빈, 취리히, 파리 등지를 돌아다녔다. 망명이 그리 오래가리라고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망명객들도 정통성 없는 히틀러 정권은 그리 오래 갈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벽에다 못을 박지 말자 / 저고리는 의자 위에 걸쳐 놓자 / 왜 나흘씩이나 머무를 준비를 하는가? / 나는 내일이면 돌아갈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웃나라로 여행을 떠나온 듯이 “어린 나무에 물을 줄 필요도 없다. / 나무는 또 왜 심겠는가? / 그 나무가 한 계단의 높이도 자라기 전에 / 나는 즐겁게 여기를 떠나갈 것이다”라고 커다란 근심걱정 없이 읊조렸다. 하지만 망명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1933년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그의 책이 분서를 당했다. 1935년에는 독일 국적을 박탈당했다.
 
독일 주변을 떠돌던 브레히트는 망명지를 덴마크로 옮겼다. 수많은 망명시편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반 나치를 위한 투쟁이 주요 주제였다. 장르별로 굳이 구분한다면 時代詩였다. 브레히트는 ‘1933년 분위기’를 시로 옮겼고, 망명지에서 맞이하는 「1938년 초봄」, 「분서」, 「망명객이라는 표기에 대하여」, 「망명」, 「칠장이 히틀러에 관한 노래」, 「피난처」등의 시를 통해 망명현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외에도 망명을 하면서 본 ‘망명지 풍경’, ‘고향 아닌 고향이 되어버린 망명지’와 ‘조국에 대한 눈물’을 시를 옮겼다. ‘나무들에 대한 대화’, ‘신화와 회상’, ‘암울함에 대해 말할 수 없음’ 등의 주제가 시어를 타고 문학으로 형성되고 기록됐다.
 
1939년 덴마크에서 ‘희곡이 아니라 서사극’이라고 표기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가 발표됐었다. 1943년 9월 취리히에서 초연됐고, 한스 아이슬러가 음악을 담당했다. 자연과학의 책임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여되자 많은 물리학자들이 원자폭탄 제조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브레히트는 원래의 내용인 자연과학과 권력(교회)과의 교류관계를 변경해 지식의 가치와 이용성, 그리고 자연과학의 정치 사회적 조건을 중심 주제로 내세웠다.
 
1939년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브레히트는 전쟁의 위험을 느껴 망명지를 스웨덴으로 옮겼고, 1940년에는 독일군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로 진격하자 핀란드로 또 다시 망명지를 옮겼다. 결국에는 유럽을떠나 미국으로 망명지를 옮겼다. 1941년 5월 미국 입국비자를 받고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배편으로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도착했다. 미국 영화사에 영화대본작가로 취업 시켜주면 아주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으나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그가 미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문학이나 정치적인 글로 미국에서 생존할 가망성은 희박했다. 그는 절망해 자기 자신 스스로를 ‘학생 없는 선생’이라고 불렀다. 미국 친구와 함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마침내 1947년 비버리 힐스에서 공연됐다.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자 브레히트는 ‘적대외국인(Enemy Alien)’으로 지목돼 목록에 오르고 FBI의 감시를 받았다. 공산당당원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1947년 10월 30일에는 심사까지 받아야 했다. 매카시즘이 미국전역을 강타하던 시기였다. 전에 공산당원이었는지, 지금도 공산당원인지 묻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했다. 공산주의자이긴 했지만 사실상 공산당원인 적은 없었다. 그 다음날 파리를 행해 출발했고, 11월 5일 취리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년을 체류했다. 스위스는 브레히트에게 체류허가를 내준 유일한 국가였다. 미군정지역인 서부 독일은 그의 입국을 거절했다.
 
브레히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이전부터 독일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귀환하라는 종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연출해 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취리히에서 우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948년 소련 군정지역에 극장이 다시 개관을 하자— ‘도이치 테아터’와 ‘폭스뷔네’가 다시 예술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자—1948년 10월 브레히트는 동베를린으로 갔다.  ‘민주재건독일 문화연맹’의 초청이었다. 취리히로부터 프라하를 경유해 베를린으로 귀환했다. 망명을 떠난 길을 거꾸로 거슬러 고국으로 귀환했다. 동베를린에 도착해 다시 활발히 예술 활동을 개시했다. 브레히트는 동독에서는 환영받고 본인의 예술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했지만, 오랫동안 서독과 서방에서는 의심받는 친구였다. 동독도 사실은 환영했다기보다는 브레히트를 필요로 했고, 브레히트 역시 자신의 작품을 실현시키기 위해 동독 행을 감행했던 것이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그는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브레히트의 고향은 아우크스부르크로 서독에 위치해 있다. 고향과 예술, 브레히트는 고향보다는 예술을 택한 사람이다. 이러한 인생사를 보며 독일역사와 망명, 인간과 사회, 고향과 예술 등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서장원 독일학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