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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종말
권력의 종말
  • 김정규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문화원·시인
  • 승인 2016.12.0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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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김정규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문화원·시인

“바사니오 님, 소녀는 여기 서 있는 보시는 바 그대로 저 올시다. 저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이 이상 더 좋아지려는 야심은 품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위해서는 스무 배를 세 곱절한 만큼 훌륭한 여자가 되고 싶고, 천배나 더 아름다워지고 싶고, 만 배나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 대사는『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샤가 연인 바사니오에게 바친 사랑의 헌시다. 살아오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 보았을 숭고한 소망의 표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데 그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불행하게도 우리는 현실에서 작은 소망이, 그것이 아름다움이든 권력이든 거대한 욕망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자주 목도할 수밖에 없다.

권력은 일상의 일부이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직원으로서 혹은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릴 때, 자기가 지닌 권력의 범위와 한계를 고려한다. 선거든 일하는 방식이든 휴가계획을 짜는 것이든 우리는 늘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타인의 행동을 강제할 능력이 있는지를 따져 본다. 그리고 타인이 권력으로써 나를 통제하려고 하면 불편함을 느낀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권력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권력은 물질적이면서도 심리적이고 실체적 측면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상품이나 물리적 힘처럼 명확히 정의하거나 수량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상황을 결정짓는 동력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권력을 더 가진 자는 누구인가.

예컨대 G8 정상회담에 참석한 각 정부의 수반들이 손을 잡고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들은 모두‘현재 정권을 잡고 있다’는 면에서는 동등하나 하나의 힘으로서의 권력은 다르다. 회담장에서 누구의 주장이 관철됐는지, 어떤 이들이 제휴를 하고 누가 양보했는지도 힘의 기준이 된다. 저마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예산이나 범죄, 부패 문제를 다룬다고 했을 때 그가 강력한 다수당을 거느리고 있는지, 연립정권에 의지하는지, 스캔들에 휘말려 정치적으로 취약한지에 따라 권력의 힘, 즉 직책에 따른 권력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달라지게 된다.

권력이란‘다른 집단과 개인들의 현재 또는 미래의 행동을 지시하거나 막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모이제스 나임의 저서『권력의 종말』(김병순 옮김, 책읽는 수요일, 2015)에 나오는 말이다. 베네수엘라 무역산업부 장관과 세계은행 상임이사를 지내고 현재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연구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임은 이 책에서, 권력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해지고 있지만 권력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분야에서 권력의 수명은 급격히 짧아지고 있으며, 어렵사리 손에 쥔 권력마저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거대기업이 둘러친 진입장벽에 균열이 생기고 있으며, 정부와 정당의 정책이 거센 비판과 도전에 좌초되기도 하는데, 이는 결코 단순한 권력의 이동, 분산, 쇠퇴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이 우리가 그동안 이해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므로, 이를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급변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로서 양적 증가, 이동, 의식이라는 세 가지의 혁명적 변화에 주목한다. ‘양적 증가’는 권력의 통제를 어렵게 하고, ‘이동’은 권력이라는 장벽을 우회할 수 있도록 하며, 고양된 시민‘의식’은 권력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권력의 종말은 강력한 지배세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 할 수 있지만, 정부의 통치력을 무력화시켜 혼란과 마비를 초래할 수 있으며, 지나친 경쟁으로 산업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거대함, 자본, 폭력, 독점 등이 필수조건이라 여겨졌던 권력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야 하고, 점점 다극화되고 있는 권력의 세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임의 이러한 주장은 미시권력인 시민과 거대 정치권력의 충돌현장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 집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한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정치권과 박 대통령은 이 도도한 시민권력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셈법에만 갇혀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셰익스피어는 희곡『폭풍우』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 한 번이라도 프로스페로와 같은 지도자를 가져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지도자, 권력의 정점에서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준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느냐는 말이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권력을 초개 같이 던져 버린 이들은 분명 존재했다. 켄지 요시노 뉴욕대 로스쿨 교수는『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김수림 옮김, 지식의날개, 2012)에서 이런 지도자로 조지 워싱턴을 꼽았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 승리 후에 총사령관직을 사직하고 자신의 칼을 의회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8년의 임기를 마치자 유력한 후보였음에도 차기 선거에 불참을 선언했다. 이런 행보는 권력을 내놓는 것은 고사하고 부패권력을 유지하기 위해‘국가 교란’도 서슴지 않는 자들이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매우 보기 드문 일이라는 것이다.

김정규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문화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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