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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벼농부 연구자
행복한 벼농부 연구자
  • 이현숙 충남대 박사후연구원·식물육종학
  • 승인 2016.12.05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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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전공이 농대 응용생물학이지만 실험실에 발을 들이고 벼 초기 생육에 관한 연구보조를 시작하고서야 처음 벼를 보았다. 그 당시, 23년 평생 벼라고는 무식하게 쌀이 달리는 풀로 정도로 알고 있던 나에게 벼를 연구하라는 주문은 정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식물학에 매력을 느끼고 식물에 대해 무엇이든지 더 많이 알고 싶다고 철없이 생각했던 터라 대학원까지 진학하면서 벼를 연구, 아니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 이현숙 박사(오른쪽 흰색 상의)가 논에서 보식(발아가 불량한 곳이나 이식 후에 고사(枯死)한 곳에 보충적으로 이식하는 것)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현숙 박사

봄에는 장화를 신고 논에 주저앉기 일쑤였고 여름 무더위에는 식물잎을 샘플링하고 형질조사를 하며 볏잎에 살갗이 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런 모든 과정이 지나면 벼는 성장해 서늘한 가을날 황금들판을 선사해 주었다. 수확기가 되면 벼이삭에 내려앉는 참새, 오리들과 전쟁을 치루지만 가만히 부는 가을바람이 벼이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길이 보이면 이 모든 어려움이 한순간에 실려 가버렸다. 

이렇게 나는 일본으로 건너가 여전히 한손에 벼를 들고 박사학위를 받았고, 올해도 수확을 마친 빈 논을 바라보고 있다. 긴 시간 벼를 공부하지만 벼를 연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의 능력 부족도 있지만 생물의 한 가지, 정말 작은 한 가지 현상을 관찰하고 가정하고, 또 실험해서 확인한 후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연구하는 식물유전육종학 부분에서는 멘델과 같이 식물을 교배하고 특정 표현형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아 기능을 밝히지만 막상 이렇게 선택된 유전자 1~2개만으로 식물의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현대 연구에서는 정확한 목적 형질을 정하고 돈이 투자된 빠른 분석, 대량 정보를 이용해 많은 연구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진정한 학문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는 지금 왜, 무엇을 위해 연구하고 있을까?

내가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지금은 정년퇴임한 지도교수께서 하루는 “school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답은 탁상에 둥글게 둘러앉아 토론하는 모습이었다. 실제 어원에 따르면 ‘여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즉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여유롭게 자기의 생각을 나누고 주장하며 증명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학문을 하는 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자신이 만든 지식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탐구한다. 연구비에 허덕이며 탐구의 즐거움이 아닌 지식의 양을 보여주는 정량적 목표를 채우기 위해 많은 논문을 찍어내고 그 숫자를 채우기에도 너무나 힘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기에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열심히 달리지 않고 잠시 쉬려하면 내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며, 논문 한 편이라도 더 인쇄해 손에 들고 퇴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학문은 즐거워야 한다.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인생은 0.001%라도 즐거운 일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진정 학문을 한다면 단순히 지식 쌓기만이 아닌 탐구의 즐거움과 고민에 산책하며, 가끔은 동료들과 한여름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감사한 바람에 어깨를 기대도 보고, 가을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나 역시 힘든 일이라 늘 수월하지 않고 때론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많은 친구들이 작물을 키우고 연구하는 일이 어렵다는 편견을 갖고 있는 것도 안타깝다. 식물을 연구하면서 식물을 사랑하고 키울줄 모른다면 그것이 무슨 연구자의 모습인가 싶다. 나도 진정한 농부가 되기엔 아직 갈길이 멀고 또 멀지만 파이펫을 잡은 멋진 농부가 되는 날을 기대한다. 그리고 농장 시험포에 내려갈 때마다 떠올리는 글귀를 되뇌어 본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 이현숙 충남대 박사후연구원·식물육종학

이현숙 충남대 박사후연구원·식물육종학
생명과학 전공으로 일본 동북대(TOHOKU대)에서 박사를 했다. 벼의 유전연구에 관한 논문을 다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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