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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버렸다’ 가슴에 맺힌 한 … 왜 우린 유독 사할린 동포에게 인색한가?
‘조국이 버렸다’ 가슴에 맺힌 한 … 왜 우린 유독 사할린 동포에게 인색한가?
  • 최상구 지구촌동포연대 사무국장
  • 승인 2016.11.2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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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 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9.사할린에 울려 퍼지는 망향의 노래
▲ 사할린주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한글신문 <새고려신문>의 사진기자 이예식 씨의 사진집 『귀환』(눈빛출판사)에 수록된 사진들이다. 「헤어짐의 눈물」(1993, 사진 왼쪽)과 「영주 귀국자들을 바라보는 한인들」(1992), 이 두 사진만으로도 이들 사할린 동포의 가슴아픈 슬픔을 엿볼 수 있다.

10월의 마지막 주, 일본대사관이 멀지 않은 한 갤러리에서 <새고려신문>(사할린주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한글신문)에서 일하는 이예식 사진기자는 전시회 준비로 분주했다. “참, 오래 걸렸다.” 출판사에서 온 사진집을 드디어 두 손에 받아 든 이예식 기자의 첫마디였다. 그런데 사할린 동포들에게 참 오래 걸린 건 사진집만이 아니다.

사할린 카레이스키, 고려인? 한인?
연해주 옆, 홋카이도 위에 위치한 한반도 80% 크기의 섬, 사할린. 1905년 러일전쟁으로 북위 50도 이남을 일본이 차지해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됐다. 19세기 말부터 연해주를 거쳐 사할린으로 이주를 하기도 했지만,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이주는 일본의 사할린 개발과 관련돼 있다. 1937년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 북사할린의 조선인 1천여 명도 함께 이주해, 1937년 이후에는 일본 영토인 남사할린에만 조선인이 거주하게 됐다.

우리는 흔히 구소련 영토의 카레이스키를 ‘고려인’이라 부른다. 연해주에 정착했다가 중앙 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이들은 스스로 고려 사람들이라 부르기도 했기에 고려인이라는 호칭에 거부감이 없었지만, 많은 사할린 동포들은 스스로를 ‘한인’이라 칭했다. 상당수가 경상도 출신인 이들은 일본 영토인 남사할린에 강제동원 등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다. 즉 1945년 남사할린이 소련 영토에 편입되지 않았다면 ‘재일동포’였을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할린 거주 한인 1, 2세들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과는 그 정체성이 다르다.

꿈에도 못 잊을 ‘귀환’, 그리고 분단의 아픔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한인들은 해방된 민족이지만, 패전국의 국민이었기에 이들의 운명은 승전국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됐다. 소련의 점령 지역에 대한 귀환 문제는 미소협정에 의해 처리됐고, 각 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할린의 한인들은 섬에 억류됐다.
1946년 미소협정에서 귀환 대상자를 정할 때 일본호적에 등록된 사람, 즉 식민지 조선의 호적에 등록된 사람들은 그 명부에서 제외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입장이 관철됐고 급격한 인구 감소로 점령지의 유지를 우려한 소련도 한인들의 귀환을 최대한 미루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해외 동포들이 급격히 귀국하면 주택과 식량 문제로 인한 사회혼란이 가중될 것을 염려한 미군정은 사할린 동포들의 귀환에 대한 세 차례의 민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들의 귀환을 외면했다.

만삭의 아내를 두고 5대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형님을 대신해 사할린에 왔던 이도 있었고, 사할린 현지에서 일본 본토로 또 다시 ‘이중 징용’돼 아버지와 헤어진 가족들이 일본에서 소련으로 바뀐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소련 시절 아이들이 점점 자라 대학에 갈 무렵 북한에서 파견된 선전원들은 학습조를 만들어 대학 진학과 취업을 할 수 있다며 북한 국적 취득과 북한행을 그들에게 권했다. 수천 명이 대학진학과 결혼을 위해 60년대에 북한으로 갔다고 하나, 이후 연락이 두절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대부분 남한 출신인 이들이 북한 국적을 취득한 이유는 통일이 되면 빨리 조국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식민으로 인한 이산의 고통과 분단으로 인한 고난을 이중으로 감내해야 하는 그들의 수난은 그 후손들에게 대물림됐다. 고향에 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에게 민족 고유의 풍습은 헤어진 가족들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전히 손 없는 날을 따지고 음력으로 농사와 집안일을 처리하는 1, 2세들의 모습에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그리움의 깊이를 어렴풋이 가늠해 본다.

역사 속의 ‘세월호’, 사할린 한인들
대하소설 『아리랑』을 통해 사할린 동포들을 알린 작가 조정래는 사할린 동포들의 처지를 ‘역사 속의 세월호’라 부를 만 하다고 말했다. 냉전의 벽에 가로막혔던 시절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러수교 이후에도 이들이 ‘조국’이라 부르는 한국은 여전히 그들에게 냉담했다. 한일 양국 적십자에 의해 2015년까지 실시한 영주귀국 사업은 1945년 8월 15일 이전 사할린 거주 혹은 태생인 사람을 ‘1세’로 규정하고, 이들을 영주귀국 대상으로 한정했다(2007년 이후 1세와 결혼한 배우자, 장애아 자녀 1인으로 대상이 확대됨). 사할린으로 갈 때 가족들과 헤어졌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식들과도 다시 헤어지라고 강요한 것이다. ‘사할린 동포에 관한 지원 특별법’은 10년째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국외 강제동원 피해 조사를 위해 몇 차례씩 이런 저런 서류를 제출했지만 사할린 현지에 있는 피해자 가족들은 러시아 국적이라고 위로금도 받지 못했다.

사할린 동포들에게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여전히 가슴에 맺혀 있다. 사할린 현지에 그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역사기념관’과, 1세들에 대한 지원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그 동안 그들이 감내한 상처와 고통을 보듬어 사할린 동포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사업도 요구된다.
우리나라가 OECD 가입 국가로서 공적개발원조(ODA)에 지출해야 하는 돈은 약 2조원에 이른다. ‘부자 나라’ 대열에 들어섰다고 의무적으로 써야하는 돈이 2조원인 반면, 재외동포재단의 연간 예산은 약 5백억원에 머무른다. 해외 원조는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갖고 챙겨야 할 동포들에게는 왜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다.

재외동포들의 역사는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그리고 강제동원 등 식민지 역사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특히 중국과 연해주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세력의 후예들도 그렇지만 강제동원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된 사할린의 한인들도 오롯이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지난 1990년까지 외교 백서에는 중국과 구소련 동포들은 아예 포함되지도 않았다. 남북 대결 속에서 이들을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재외동포들의 역사는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 잊고 살았던 ‘우리의 역사’다.
따라서 동포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지원 사업은 호혜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응당 책임져야 할 국가적 의무다. 분단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길은 동시에 고난으로 점철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기도 하다. ‘참, 오래 걸린’ 이예식 기자의 사할린 사진집처럼, 오래 걸려도 결국 해야만 하는 그 무엇들이 우리에겐 남아 있다.

 

최상구 지구촌동포연대 사무국장  
2011년부터 사할린 희망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 영주귀국 동포들의 구술을 기록해 2015년 『사할린, 얼어붙은 섬에 뿌리내린 한인의 역사와 삶의 기록』을 출간했다. 러시아 달력에 음력과 절기, 한국 명절을 표기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만들어 연초마다 사할린 동포들에게 전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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