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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난한 연구소에서 ‘매력’ 찾을까? … 재정 악화, 그 ‘인고’의 세월을 넘어서
누가 가난한 연구소에서 ‘매력’ 찾을까? … 재정 악화, 그 ‘인고’의 세월을 넘어서
  •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승인 2016.11.2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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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40년을 말하다_ 17.경영난을 극복하자

 

한국행동과학연구소(KIRBS)는 일정한 기금이나 정부 지원 없이 몇 개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출범했다. 반세기의 여정에서 연구소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운영돼 왔다.
앞글에서 연구를 많이 했다는 둥,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는 둥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생소하게 들리는 ‘행동과학’이란 이름의 연구소를 만들어 성취한 일로서는 그 자찬이 그리 황당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KIRBS는 창립 당시 TIP의 프로젝트인 적성검사 등 각종 심리검사의 연구와 보급, 인구연구를 위한 정부지원과 外援, 완전학습 프로젝트의 학습자료 인세 등으로부터 연구소 재정에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다. 기업체 사원 대상의 교육·훈련, 심리검사의 보급 등으로 초기 10년 가까이 KIRBS의 운영은 그런대로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몇 년 전부터 은연중 염려하던 재정난이 시나브로 현실적 난관으로 다가왔다.

염려하던 재정난, 현실로
앞에서 든 재원의 주요 원천이던 초기의 인구연구에 대한 지원이 끊어졌고, 정부의 산발적인 연구비 지원이 희소해졌다. 기업체를 대상으로 하던 교육·훈련의 기회도 드물어졌고, 학교와 기업체를 대상으로 하던 심리검사 보급도 길이 막혔다.
재정난이 겹쳐서 완전학습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인 1976년 이후 2~3년간 연구소는 인적 구성원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연구원들이 타 연구소나 대학으로 옮겨갔고, 일부는 유학을 떠나게 됨에 따라 연구 활동도 저조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량 있는 연구원 충원이 어려워졌고,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의 창안도 뜸해졌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관성에 의해 진행 중이던 연구는 계속됐지만, 재정난은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연구원 충원이 어렵게 되는 등 연구소의 여러 활동이 침체돼 재정난이 영속하는 악순환적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런 재정난은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KIRBS의 운영 재원 확보에 빨간불이 켜진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연구소 창립 초기에 연구를 추진하는 데 도움을 주던 외원이 끊어졌다. 하기야 언제까지 외원에 기댈 수는 없는 일이긴 하다. 하여튼 1970년대 인구문제 관련 연구는 미국의 포드재단, 록펠러재단, 캐나다의 국제개발연구센터(IDRC)와 하와이의 동서문화센터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COMBEF이란 교차문화연구행동연구위원회 설치를 위한 재정지원도 있었다. 1970년 중반부터 10여 년 동안 한국 저소득층 아동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가정의 부모중심교육 프로그램 연구와 보급 등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이 두 외원 중 인구문제연구는 사회 변화의 추세와 맞물린 것이어서 프로젝트가 끝나갈 무렵 원조기관에서 연구재원을 배분할 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가 더 이상 연구비 원조가 이어지지 않았다. 유니세프도 1980년부터 원조 중단을 계획하다가도 상당 기간 동안 우리의 연구프로젝트를 지원했지만, 그들도 ‘빈곤국가 원조’라는 원칙을 내세워 ‘한국도 受援國의 처지에서 벗어나 後援國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1990년 초에 우리를 떠났다. 우리의 관련 연구 활동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수십 명의 연구원이 몇 년간 불철주야 연구·개발·보급한 완전학습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투입한 노력만큼의 대가를 얻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얻은 인세가 얼마동안 연구 활동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프로젝트에 투입했던 엄청난 노력만큼의 보답이 연구소 기금의 밑천이 되기를 기대했지만, 우리의 이 소망은 충족되지 못했다.
KIRBS 학습개발연구부의 노력은 실로 대단했다. 개발한 학습자료와 부수자료 또한 엄청난 양이어서, 연구소가 처리할 수 없어 ‘능력개발사’라는 회사를 설립해 출판 보급을 하도록 하기 까지 했다. 물론 그 회사는 크게 성공했다. 이 일을 반추하는 것은 학습자료의 출판·보급을 통한 수익금이 연구소 재정을 튼실하게 해줄 기회였을 법한데 그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서다. 이때가 기금 마련의 절호의 기회였는데 하면서 그것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쉽기 때문이다.

연구소 재정난을 초래한 세 번째 사유는 기업체 사원교육에서의 수익이 급감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진행했던 기업체 사원교육은 연구소에 적지 않은 재정 소스가 됐다. 우리 연구소는 성취동기와 창의력 육성 프로그램 등 개인의 심리적 특성이 기업의 생산력 향상과 성공에 결정적 요인임을 설득하고 그 심리적 특성 개발 프로그램을 기업체 교육과정에 투입했다. 자연 수익성이 높은 활동일 수밖에 없었다.
1970년 중반부터 기업체 교육이 붐을 일으키게 됐을 때 많은 기업체가 심리적 특성과 이 특성을 육성하는 일이 지니는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자 사정은 급변했다. 기업체들 스스로 프로그램을 개발하거나 독자적으로 훈련원을 개설해 운영하기도 했다. KIRBS가 파고들어 갈 여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조직개발 연구팀의 경영학, 심리학, 교육학 계통의 연구원들이 잇따라 기업체로 옮겨갔다. 이들의 전직은 연구소의 교육 인력 부족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결국 심각한 인력 부족에 직면하면서 우리의 기업체 교육활동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넷째로 KIRBS 재정 원천의 하나였던 각종 심리검사 보급을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명맥을 잇기조차 어렵게 됐다. 1980년 쯤 심리검사 사용에 대한 비판이 대두하면서 ‘보급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가이던스’라는 심리검사 보급회사와의 계약으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그것마저 계약상의 갈등으로 보급 문제가 불투명해졌고, 당시의 학교심리검사 보급도 어려워졌기 때문에, 여기서 나오던 조그만 인세 수익도 사라지고 말았다.

재정의 원천이 여기저기서 난관에 부딪치자 우리는 그 역경을 뚫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직원의 급료, 건물 임대료, 경상비 등 각종 자원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부분의 연구비는 연구의 직접비용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규모가 상당히 큰 프로젝트도 연구소의 경상비에 도움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예컨대, 10여 년간 이어졌던 유니세프의 재원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컸지만, 재원 대부분은 프로젝트 자체의 직접 운영비와 자료 제작비로 지출됐다. 완전학습 프로젝트의 인세가 연구소를 유지하는 추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빈약한 마중물에 불과했고 얼마 안가서 그 水源이 고갈되고 말았다.

운영난의 부작용과 영향
연구소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닥쳐왔다. 재정난이 연구소 운영의 여러 면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크게 신경 쓰이는 것이 연구소의 ‘평판 문제’였다. 재정난을 겪더라도 연구소 평판에 금이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만해도 연구소가 연구원 채용공고를 일간지에 냈을 때, 10명 정도 선발에 70~80명의 석사 학위 소지자가 응모하곤 했다. 1980년대 가까이 돼 연구소의 빈약한 재정상태가 알려지면서 연구원 확보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누가 가난한 연구소에서 ‘매력’을 찾겠는가.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고급인력들이 KIRBS를 피하는 듯한 경향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한 사람들도 귀국 후 친정 찾듯 연구소에 와서 얼마 쯤 일하다가 경제적으로 대우가 좋고 근무가 보장되는 대학 등으로 옮겨갔다. 권장할 일이지만 우리는 서운했다.

대학뿐만 아니었다. 기업체나 정부가 설립한 연구 환경 좋고 보수가 많은 연구기관에 취업해가는 경향도 뚜렷해졌다. 전에는 흔치 않던 각종 전문 연구기관들이 설립돼 고급인력을 흡수했다. 종로에서 서초동으로, 다시 거기서 대치동으로 전셋집을 전전하는 KIRBS같은 가난한 연구소에는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연구 에토스―학문에 대한 열정, 그것은 연구소가 설립되던 1970년대에서 1980년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많이 달라져갔다.
재정 악화로 유능한 연구원을 초치할 수 없었고 그래서 연구 생산성에 차질을 초래했으며, 그것이 또 재정확보의 길을 막게 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연구소 안에서는 우선 인건비가 가장 급한 일이었다. 이때 쯤 연구소 사정을 눈치 채고 있던 연구원들은 무슨 조치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은 별일 없이 일하면서 감내하고 있었지만, 그런 인내는 오래갈 수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3개월간 무급, 그 다음으로 월급의 50% 지급, 이때 연구소에 약간의 동요와 소장에 대한 항의가 잇따랐다. 큰 분란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평소에 위기가 오리라는 것을 여러 번의 모임에서 미리 의논했기 때문이었다. 사표가 띄엄띄엄 내 책상 위에 놓이게 되고, 타 연구기관으로 옮겨가고, 미루고 있던 외국 유학을 서둘러 떠나고…. 나의 기분은 참담했다. 연구에 대한 열정이 박봉의 고통을 이길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상주의적 허깨비임을 나는 체험했다.

난국이었다. 월급날이 내일인데 급료가 준비되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손을 못 쓸 때, 밤에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회장님이 현금으로 도와준 일도 한두 번이 아니고, 소장인 나는 나대로 친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다반사였다.
백방으로 뛰었으나 모든 것이 무위로 끝나는 듯 했다. KIRBS의 재정난국은 이어져서 1970년대 중반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근 20년 동안 어렵사리 근근이 버티면서 살아왔다. 한 번도 쨍하고 해 뜰 날이 없었다. 그 20년 동안 이미 계약해 진행 중이던 연구는 중단할 수 없는 일이어서 떠난 사람의 자리를 매울 수밖에 없어 또 다른 사람을 어렵게 보충하는 등 어려운 세월이 이어졌다. 진행 중인 연구로 연명을 하게 된 것은 연구과제가 많지는 않았지만 띄엄띄엄 들어오는 연구비가 간헐적 강화가 돼 연구 활동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간신히 연명해가고 있었다. 연구소는 寒村이었고 赤貧無依였다. 우리의 생활은 모질었고, 살아가기 힘들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에 치열하고 처절하게 악을 썼다고 해야 옳다.
“행동과학? 매력적이야”라는 말은 심리학 공부를 하고 미국에서 갓 돌아온 사람이 나에게 한 첫마디다.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이 교차하는 영역의 연구를 하는 ….” 내가 늘 듣고 하던 이 말을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듣고 있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박사학위를 하고 취업 면접을 할 때 경영학, 심리학, 사회학 등등 자신의 전공을 내세우지 “행동과학입니다”라고 말하진 않는다. 행동과학이란 말이 듣기에는 매력적이지만 자기가 잘하는 것, 내가 전공하고 자신이 있는 것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급하면 젖먹이 때처럼 ‘엄마’를 외친다. 운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여태까지는 칭얼거리면서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하지만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다음 글에서는 그 경위를 적는다.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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