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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유성이다. 그것은 수천 개의 운석이 돼 흩어진다”
“책은 유성이다. 그것은 수천 개의 운석이 돼 흩어진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11.2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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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 장-뤽 낭시 지음, 이선희 옮김, 도서출판 길, 95쪽, 10,000원

책은 언제나 불타는 운석이 되기를 꿈꾼다.
서점은 경험과 위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데아로부터 모든 형태와 모든 특성을
넘어서는 것을 일별하는 자유로운 공간을 연다.

흔적과 지문과 어렴풋한 기억이 축적돼 있는 그 깊은 곳, 서재로 던져진 책은 이 지하의 침잠 속에서 자유로운 공기로의 가볍고도 폭넓은 비행을 경험한다. 길거리의 상점은 이 서재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추어진 이면에 불과하며, 책은 기억, 되풀이하는 말, 중얼거리는 암송을 통해 그렇게 전송된다.

책은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이데아에서 이데아로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펼쳐 유쾌하게 훑어본,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위에서 아래로, 혹은 반대 방향으로, 여러 가지의 가능한 조합을 통틀어서 본 책장들, 인내심을 가지고 꼼꼼하게 아니면 바쁜 마음에 게걸스럽게 한 독서의 경험들, 연구와 해석, 주해, 분석, 모방과 패러디는 언제나 보다 멀리, 언제나 보다 더 만져지지 않을 정도로 이데아의 본질을 확대할 뿐이다. 이데아는 마침내 소멸돼 다른 어떤 책으로 변신하고, 윤회하며, 은유가 돼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책으로, 혹은 소책자로, 풍자문으로, 논문으로, 팸플릿으로, 소논문으로, 그리고 다시 또 2절판으로, 4절판으로, 8전판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무한정의 수가 배가되고 전달돼 의미의 먼지, 이데아의 먼지를 공중에 흩뿌린다. 재가 된 이데아는 화염에 불타버린 재가 아니라(끔찍한 종교재판의 소각 명령으로 발생한 연기는 정확하게 책의 대척점을 의미한다. 장작더미는 서점과 책장들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관대하게 광활한 우주로 보내져 재가 된 그리고 우주에서 이데아라는 별똥별이 비처럼 내리며 빛을 발하는 이데아의 먼지다. 책은 유성이다. 그것은 수천 개의 운석이 돼 흩어진다. 그것들의 떠돌이 운항은 새로운 책과의 갑작스러운 충돌이나 재회, 응결을 야기한다. 또는 이제껏 보지 못한 성질의 도면, 증보되거나 수정된 새로운 판본, 한마디로 거대한 별들의 운행을 만든다.

책은 언제나 불타는 운석이 되기를 꿈꾼다. 불붙은 꼬리가 이데아를 무한의 영광과 경험으로 태워버리는 그런 혜성이 되기를 꿈꾼다. 서점은 경험과 위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고 이데아로부터 모든 형태와 모든 특성을 넘어서는 것을 일별하는 기회의 자유로운 공간을 연다. 언제나 서점은 가슴 속에 방문 책판매원, 등짐 가득히 심지어 늘어진 옷자락이나 모자 속에까지도 12절판이나 16절판 소형 책자를 들고 다니며 그것들을 다 팔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거나 필요하다면―마농 레스코, 젊은 베르터,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외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의 면모를 간직한다. 서점은 떠돌이 장사꾼이자 이야기꾼이다. 유랑 시인이다. 행상인, 싼값에 책을 파는 외판원이다. 들판이나 모래 언덕에서, 해가 뜨나 비가 오나 신작로를 다니는 책방이다. 서점은 언제나 대로변에 있다. 그것은 책에서 책으로 말고는 어느 곳으로도 통하지 않는 길이며, 그 자신에게만 이어지는, 무한히 재인쇄되는 흔적과 활자만을 따라가는 길, 그 길을 따라가면 감동적이면서도 섬세한 사유의 거래가 끊이지 않는 큰길이 있다. 그 안에서 바로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것의 순수하고도 언제나 새로운 형태가 요약되거나 소진된다.

1940년생인 저자 장-뤽 낭시는1968년부터 2004년까지 스트라스부르대에서 철학 교수를 지냈다. 캘리포니아대 교수직을 역임했으며, 버클리대와 베를린대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자크 데리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오랜 친분을 이어가며 현대 철학의 전통, 비평의 문제에 대한 공동 관심사를 연구했다. 철학 분야 이외에도 작가, 영화감독, 안무가, 화가 등의 예술가들과 협업을 통해 현대 공동체 사회, 인간의 육체, ‘기독교의 파괴’를 주제로 한 다양한 저술 활동과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철학의 망각』, 『무위의 공동체』, 『민주주의의 진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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