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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꿈같은 이야기
[學而思] 꿈같은 이야기
  • 한경구(국민대·문화인류학)
  • 승인 2001.01.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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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6 17:59:33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여건이 어느 정도는 따라주어야 한다. ‘날카로운 송곳도 주머니에 넣어야 비로소‘라는 고사도 그래서 있지 않은가. 신진 학자들이 대학에 자리를 얻지 못하고 여기저기 시간 강의를 다니면서 늙어 가는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열심히 학문을 닦았건만 차분히 연구하여 뜻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하다니 얼마나 가슴 아프고 쓸쓸한 일인가. 세월은 사정없이 흐르고 아이들은 커 가는데 매일 출근할 연구실조차 없다니. 똘똘한 제자를 키울 기회가 없다면서 ‘간판이 뭐길래!’라 탄식하는 ‘非일류대’ 교수들의 사정도 딱하지만, ‘보따리 장수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불평하기가 미안하다.
요즈음 인문사회계 기초학문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적(?) 구박을 당하고 있지만, 기초가 약하면 제대로 돈을 벌 수 없다는 냉혹한 사실도 알아야 한다. 만화산업의 발전을 바란다면 고등학생 시절부터 만화 그리는 훈련을 시킬 것이 아니라 역사책이나 문화인류학책, 그리고 온갖 소설 따위를 신나게 읽히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된 스토리를 생산 못하는 만화산업이란 다른 나라의 하청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컴퓨터게임 등 소프트웨어산업이 발전하려면 컴퓨터를 잘하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리 정보의 편집과 가공 능력이 중요한 시대가 된다고 하더라도 독특하고 풍부한 컨텐츠, 그리고 독립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다면 짜깁기와 포장기술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정보화가 진전될수록 인문학적 소양은 점점 더 중요해지는데, 안타깝게도 정보화는 ‘컴퓨터를 잘 다루는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기초분야의 학자들을 속으로 비웃으며 자장면 배달부를 ‘신지식인’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 청소년들은 이러한 일부 어른들의 태도를 ‘21세기에는 골치 아픈 공부 따위는 안해도 웬만한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시중에서 ‘영어공부 하지 말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노력 안하고도 잘한다’는 희망과 기대가 얼마나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돼있다. 다가오는 ‘문화의 세기’는 기초학문 없이는 정말로 헤쳐나가기 어려운데, 기초학문의 신진 기예 중 상당수는 길거리에 팽개쳐져있다. 자칫 학문의 후속세대가 위태로운 상황이다. BK21도 좋지만, 수혜 대상이 적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유와 비판 정신, 그리고 장기적 전망을 필요로 하는 인문사회계 기초학문의 풍토와는 운용방법이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딘가 지하철역이 가까운 곳에 커다란 빌딩을 구해서 ‘보따리 장수’ 소장학자들에게 연구실을 하나씩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구실에는 LAN이 깔려 있고 건물의 지하에는 서점, 문구점, 복사집, 편의점, 분식집 등이 입주하면 좋겠다. 장서는 많지 않아도 좋으니 각 대학 및 공공 도서관과 상호 대출 협정을 체결한 소규모의 전자도서관이 있으면 좋겠다. 세미나실 같은 것도 크고 작은 것이 몇 개 있어서 활발히 토론도 하고 공개강의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건물을 24시간 개방한다면 연구실이나 실험실에 들어가려고 홈통을 타다가 추락사하는 황당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매달 1백만원 정도라도 보조비를 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지원 조건은 3년에 3건씩 짭짤한 논문을 게재하거나 번역서를 출간하는 것 정도로 하고 ‘불조심’ 외에는 일체 간섭하지 말자. 예산은 이것저것 합쳐도 한사람 당 연간 2천만원 정도면 충분할 것이니, 1년에 60억만 있으면 자그마치 3백명의 선비가 기를 펴고 살 수 있겠다. 10년만 계속하면 엄청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을까. 억지로 교섭단체 하나 더 지원하는 것보다 얼마나 보람있고 유익하게 세금을 쓰는 일인가. 통치자금이건 정치자금이건, 그 수십 분의 일만 이렇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운 천년이 밝았다. 꿈 같은 이야기지만, 실현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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