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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란한 가을날에
이 찬란한 가을날에
  • 박순진 편집기획위원/대구대·경찰행정학과
  • 승인 2016.11.17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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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박순진 편집기획위원/대구대·경찰행정학과
▲ 박순진 편집기획위원

우리 동네에는 조그만 개울이 있다. 얼마 전까지는 일에 바빠 돌아볼 겨를이 없었는데 학교에서 맡고 있던 몇 가지 일을 내려놓고는 조금 여유가 생겨서 저녁 무렵이면 종종 하천 길을 따라 걷기를 즐겨하고 있다. 느릿느릿 걸으면서 담소를 즐기는 가족도 만날 수 있고 삼삼오오 자전거를 타면서 질주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대도시에서 한쪽 편으로는 아파트가 줄지어 있고 다른 편으로는 산을 끼고 돌아가는 하천이 있다는 사실은 제법 큰 즐거움을 준다.

수년 전부터 하천이 정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오며가며 알고 있었지만 그런 류의 사업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로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터였다. 정부가 국민의 혈세를 허투루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마뜩찮게 생각했고 토목국가에 대한 반감이 생활 주변에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을 마다하게 만들었다. 전국의 강이란 강은 다 파헤치고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인 것에 대해서는 삽질하는 국가의 표상이라 생각돼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지만 소하천을 정비해 시민들이 이용하게 한 것에 대해서는 반감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개울을 따라 걸으며 누리는 작은 기쁨 하나에도 선뜻 마음이 누그러지는 스스로의 소시민다운 모습에 멋쩍고 어색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1980~1990년대 외국에 나가면 대도시의 동네마다 잘 정비된 공원을 만나거나 좋은 시설을 가진 놀이터를 보면서 부러워하곤 했더랬다. 당시에는 우리는 언제쯤 저런 시설들을 만들어 시민들이 쉽게 즐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새 우리도 얼추 비슷한 수준이 됐다 생각하니 짐짓 뿌듯한 느낌이 든다.

지난 주말 잠시 짬을 내어 강변길을 따라 걷다가 샛길로 접어들면서 마주친 갈대는 정말 장관이었다. 울긋불긋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잠시 멈춰 서서 감상에 빠져들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좋은 경치가 바로 곁에 있어도 일반 서민들로서는 가을 정취를 편하게 느낄 여유가 많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네 서민들은 크고 작은 삶의 무게도 힘들고 이런저런 일상과 문제를 헤쳐 나가느라 바빠서 잠깐의 여유도 선뜻 가질 수 없다.

강을 따라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노니는 장면을 보다가 차량 경적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세상이 온통 혼돈스럽다.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와 나라꼴이 참으로 기가 막힌다.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인사들이 끼리끼리 작당하여 비선실세니 뭐니 하면서 국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아귀처럼 사리사욕을 채우는 짓거리를 거리낌 없이 해대는 일이 과연 21세기 문명화된 국가에서 가당키나 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온 국민이 귀신에 홀린 듯하다.

어쩌다가 위정자가 국민의 뒤통수를 치고 오히려 시민들이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갈까 노심초사해야 하는 이런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바르게 정치하고 풍족한 경제를 만들어 달라고 국민이 잠시 맡겨둔 권력을 사적으로 나누고 국민을 배신하는 정치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국민이 맡겨둔 권력을 자기 것인양 사유화해 전횡을 일삼고 대를 이어 지저분한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생각했다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지난 반세기 이상 모든 국민이 합심 노력해 나라가 발전하고 국가의 품격이 제법 높아진 줄로만 생각했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우리네 서민들의 분하고 속상한 마음이 풀릴 길이 없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 학생들이 느끼는 허탈감은 어떻게 할 것이며, 건강하고 풍요로운 국가와 시민들이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하여 묵묵히 일하는 직장인들의 분노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한가로이 강변을 거닐면서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것조차 선뜻 허용하지 않는 요즈음의 세태가 참으로 슬프고 씁쓸하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어수선한 시국에 찬란한 가을 정취를 말하는 것마저 사치스럽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 권력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만큼 마음도 스산하다. 이번 겨울은 유독 매운 한파가 길게 갈 듯하다. 이런 힘겨운 시절일수록 우리네 서민들은 눈 부릅뜨고 정신 바짝 차리면서 살아야겠다.

박순진 편집기획위원/대구대·경찰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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