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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울리는 북 소리
천지에 울리는 북 소리
  • 이연도 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승인 2016.11.17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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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연도 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이연도 중앙대 교수

“그 때 산 속의 백성들은 큰 소리로 일어나고, 천지는 그들을 위해 북 치고 종 울리니, 신들은 그들을 위해 파도를 일으킨다(則山中之民, 有大音聲起, 天地爲之鐘鼓, 神人爲之波濤矣).”

청말 사상계에 길잡이 역할을 했던 ?自珍(1785~1841)의 詩 한 대목이다. 왕조의 쇠락이 직감되는 현실에서 공자진은 ‘조정(京師)’이 텅 비고 가난해질수록, ‘백성(山中)’은 충실하고 강대해진다고 보았다. 온 천지에 북 소리 진동하는 때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을 청나라 말기의 상황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外憂內患의 위기라는 점에선 달리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됐든 국민투표의 절차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측근과 공모해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질러 왔다는 사실은 우리 국가 시스템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에 트럼프가 당선됐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는다. 현실이 ‘픽션’보다 훨씬 ‘비현실적’이니, 작가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탄식이 실감나게 들린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터질까. 한편으론 호기심이 일기도 하지만, 적잖이 불안한 생각이 든다.
 
수십만의 시민이 모여 만든 촛불의 강물이나, 광화문을 울리는 함성 소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민주화의 기억을 불러온다. 현장의 뜨거움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한다. 그런데, 시위 현장의 벅찬 감동이 사그라진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게 무엇인가.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하는데, 이후 어디로 가야 할지는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대통령은 ‘국회 추천 총리’카드를 통해 국정 혼란의 책임을 야당에게 던져놓았다. 여기에서 ‘금치산자’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다. 불의의 기습으로 잠시 흐트러졌던 매무새를 가다듬는 승부사의 모습이 보일 뿐.

언론의 푸닥거리와 소란함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설령 대통령이 하야한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기존의 정치 체제와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덜 나쁜 사람’ 찾기라는 정치 공학적 땜질에 불과하게 된다.

트럼프의 당선은 얼핏 황당한 결과로 보이지만, ‘진실’을 마주하고자 하는 냉정한 눈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마이클 무어의 표현을 빌자면, “사람들이 광대를 찍거나,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는 투표를 할리는 없다! 라는 논리로 자신을 달래는 것은 자신의 뇌가 스스로를 외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모습으로 현실을 보는 경향이 있다. 트럼프는 56번의 경선과 전당대회에서 그를 떨어뜨리려 온갖 노력을 다한 공화당 후보 16명을 누르고 대선 후보가 된 인물이다. 미국이 합중국 초기의 복잡하고 이상한 선거 제도로 대통령을 뽑는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이는 기존의 정치인들이 제도의 개혁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15세기의 정보기술을 바탕으로 19세기에 고안된 정치제도 속에서 살아간다. 이 시스템의 특징은 5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정보기술(활판인쇄술)에 맞춰 설계돼 있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곤, 극히 소수가 다수의 이름으로 매일매일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수가 할 수 있는 일은 2년에 한 번 투표하러 가는 것밖에 없다. 이런 정치 시스템에 참여하는 비용은 놀라울 정도로 높다. 정치를 하려면 상당한 재력과 영향력을 갖추고, 인생 전체를 정치에 걸어야 한다. 정당의 일원이 돼야 하고, 서열이 올라가기를 천천히 기다려야 한다. 언젠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테이블에 앉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최근 출간된 『듣도 보도 못한 정치』(이진순 외 지음, 문학동네, 2016)에 인용된 피아 만시니(Pia Mancini)의 말이다.

인터넷으로 쇼핑을 하고, 강의실에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시대에 정치는 200년 전에 고안된 대의정치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정치는 폭발물을 다루는 것과 같은 위험한 행위이니, 직업 정치인에게 맡겨두라는 전제는 과연 정당한가. 이제 다수결과 대의제의 원칙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때다.

시민들이 직접 국가 운영 시스템에 참여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직접민주주의’라는 말에 여전히 ‘유토피아’란 단어를 떠올렸다면, 이 책에 수록된 ‘듣도 보도 못한’ 지구촌 각지의 다양한 사례를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과 AI의 발전은 정치 지형의 변화에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소프트웨어 환경은 이를 수행할 능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 기억에 남는 사례 하나. 세월호 참사 이후 600만 명이 특별법 서명에 참여했다. 그 결과가 어떠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서명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단순 청원이었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선 시민들이 직접 법안발의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시민입법권’이 있었다면, 국가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또다시 ‘죽 쒀서 개 주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다.

이연도 중앙대 교양학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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