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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BS는 한국 학계의 인재양성 요람 … 연구원 대부분이 대학 교수로 진출”
“KIRBS는 한국 학계의 인재양성 요람 … 연구원 대부분이 대학 교수로 진출”
  • 교수신문
  • 승인 2016.11.1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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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40년을 말하다_ 16. 행동과학, 연구의 승화

 

한 사회에 변화의 조짐이 보일 때 그 사회는 뜻밖의 변화와 예기치 못한 변혁에 대처해야 한다. 변혁기에는 변화된 새로운 사회조건에 대응하는 지혜와 행동양식이 요청된다. 새로운 문제가 끊임없이 출현하고 행동과학이 해결해야 할 연구문제도 많아진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KIRBS)는 1968년 9월에 설립됐다. 사회과학 연구가 황무지였던 때 탄생한 KIRBS는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일을 하면서 생존해 왔다.

필자가 미국 생활을 마치고 1970년 4월 KIRBS에 왔을 때, 연구소는 이미 많은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처음에 필자는 연구소에 자문교수로 나가다가 2년 뒤 부소장으로, 그리고 다시 2년 뒤인 1974년 1월에 소장 소임을 맡아 연구와 관리·행정에 종사하다가 4년 전인 2012년에 연구소를 떠났다. 나는 이 시리즈의 앞글들에서 KIRBS의 과거의 연구 행적을 소개했는데, 이 글에서는 그것을 종합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 이들 연구 활동을 가능케 한 관리 즉 행정·재정적 측면에 관해 간단히 언급할까 한다.
필자가 KIRBS의 연구 활동에 관해 기술하는 내용은 1972년부터 2015년 5월까지의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1972년 이전의 연구에는 내가 건성으로 참여하고 깊이 관여하지 않아서 잘 모르고, 연구소 일에서 완전히 물러난 2015년 5월 이후는 KIRBS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잘 모른다. 내가 재직하던 40년간의 연구 활동 내용을 우선 몇 가지 숫자로 알아본다.

숫자로 보는 KIRBS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설립 초기 몇 년간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돼 연구소 조직은 빠른 속도로 확대돼 5~6년 뒤에 초기의 검사개발 영역을 포함해 사회, 학습, 조직, 아동, 상담 등 6개 팀을 꾸릴 수 있었다(창립초기에는 검사개발, 능력개발, 행동과학연구 등 세 부서로 구성됐다). 명실공히 종합연구소로 발돋움했다. 연구원 수가 130명을 웃돌던 시기도 있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수행한 연구과제 수는 250여 편, 출판된 연구물은 350여 편에 이른다. 이 연구들은 KIRBS의 성취를 방증하는 주요 산물이다. 연구소 자체가 기획했거나 정부, 기업체, 외원단체 등이 의뢰한 결과물로, <리서치 블레틴>이나 연구노트 등 적절한 출판물로 발표됐다. 그 밖에도 단행본 80여 종, 각종 교육·훈련프로그램이 50여종이다. KIRBS가 제작한 심리검사가 80여종 되고, 연구 프로젝트에 사용한 체크리스트, 질문지 등을 합치면 그 수는 부지기수다.

KIRBS는 설립 당시부터 교육기관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 풍토 속에서 그동안 연구소를 거쳐간 직원의 수는 약 400여명. 그 중 연구원이 250여 명인데, 대충 200여 명이 국내 및 외국에서 경영학, 심리학, 교육학, 사회학, 인류학, 행정학 등 행동과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들 대부분이 대학 교수로 진출했는데, 대학 총장이 6~7명, 부총장·학장을 위시해 대학의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일부는 타 연구기관과 기업체로 진출하는 등 여러 전문기관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KIRBS는 명실공히 한국 학계의 인재양성 요람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연구프로젝트의 특징
연구에 관한 KIRBS의 기본 태도는 뚜렷했다. 인간행동에 관한 종래의 사회과학적 접근에 비해 훨씬 더 실증적이며 체계적일 것을 추구했다. 연구방법론 상의 보다 분명한 실증적 자료와 높은 엄격성을 지향하는 과학적 탐구정신을 견지하고 일체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배제하면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적 조건을 이해하려는 정신을 잃지 말자고 다짐한 것이다. 우리가 수행한 프로젝트의 특징을 아래에 종합해 본다.
첫째, KIRBS의 핵심적 역할은 행동과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이론적 연구다. 필자가 여기서 굳이 이론적 연구라는 말을 쓰는 것은 행동주의와 행동과학을 혼동하는 경향을 의식해서다. 행동과학은 행동주의와는 다르다. 사회주의가 사회과학과 다르듯 말이다. 행동주의는 심리학자 왓슨(J.B.Watson)이 제창한 심리학의 한 입장으로, 內省法에 의한 意識의 연구를 배제하고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행동만을 관찰과 실험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에 반해 행동과학은 인간의 외현적 동작을 포함해 판단, 사고 등 내재적 행위도 연구의 목적으로 한다.
‘行動科學硏究’라는 <리서치 블레틴>과 <리서치 노트>로 발표된 우리 연구소의 논문들이 그 제목에 가치관, 태도, 자아개념, 기초학습력, 고등정신기능, 창의력, 성취동기, 지능 등 인간의 내재적 행위에 관한 개념들을 표제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행동과학이 행동주의 심리학과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의 이론 연구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가족계획 행동을 심리학적 개념으로 설명한 연구, 인간의 성장·발달을 장기간 추적한 종단적 연구 등이 있다. 우리는 또 흔히 저평가 되기 쉬운 조사연구와 평가연구의 가치에도 주목했다. 이런 연구는 평소의 고정관념과 편견의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모든 연구는 현상의 정확한 평가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한 예를 들어보자. 한국 교육이 난국에 봉착했다는 등의 의견이 파다할 때였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학교 교육의 어떤 측면이 문제이며, 왜 그런 문제에 봉착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초등학교 교육을 전국적으로 평가해 한국의 초등교육이 당면한 문제를 구체적·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었고, 거기서 확인된 교육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처방법을 계획할 수 있었고 관련 연구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조사·평가연구는 아동발달, 조직개발, 학습개발 연구 등 거의 모든 영역의 사전 사후 평가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프로세스다.

KIRBS의 활동 가운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부문은 개발연구였다. 개발연구는 이론적 연구와 맞물려 돌아가는 바퀴와 같다. 연구소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에는 반드시 이론적 뒷받침이 있어야 했다.
개발영역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1969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된 완전학습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중학교 교실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할 만큼 영향력이 컸던 개발연구로 평가됐다.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개발한 프로그램 학습자료, 형성고사, 총합고사 등은 줄잡아 1천200종을 넘는다.
프로그램 개발을 이론적으로 지지해 주는 연구에는 연구소 초기에 진행한 아동의 지적능력 개발의 가능성에 관한 연구가 있다. 이 연구는 지능개발을 위한 다양한 자료 개발과 지능개발을 겨냥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제작을 가능케 했다.

우리가 수행한 다양한 연구프로젝트에 각종 심리검사를 제작 사용했는데, 그 의도는 종래의 질문지법이나 면접법 등을 보완해 연구방법의 엄정성을 높이는 데 있었다. 가족계획 연구에서 각종 질문지를 사용하면서 가치관검사, 태도검사 등을 사용한 것이 그 한 가지 예다.
셋째로 KIRBS는 사회의 여러 조직체의 능률향상을 위한 교육과 훈련을 중요한 과업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기업체 간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창의력과 성취동기 육성 프로그램은 기업체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또한, 상담활동과 부모교육도 우리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상담전략으로 면대면 개인상담과 병행해 새로운 포맷인 집단교육식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접목했다. 전통적 상담의 접근법을 벗어난 새 시도였으나 호응은 예상 밖이었다. 부모교육의 일환으로 실시한 자녀와의 바른 대화 기법은 가정에서, 그리고 행동분석학의 응용분야인 행동수정 기법은 학교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됐다.

넷째, KIRBS는 사회의 특수 집단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관심은 특수학생과 교육적 환경이 열악한 가정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특수학생의 성장·발달과 이들의 환경에 대한 이해는 생활능력의 개발에 한정되지 않는다. 특수학생 연구는 인간의 지적·정의적·행동적 특성의 본질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접근으로 알려져 있다.
학습부진아의 학습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들에게 기초적 지적기능을 개발하고, 학습에 대한 의욕을 고취시키는 프로그램의 개발과 실시, 재활기관의 학생들에게 생활기능을 습득하게 하는 종합계획 수립, 그리고 도시 및 농촌 벽지 등 교육적 환경이 열악한 가정의 부모와 아동들을 위한 가정 중심 교육프로젝트 등은 ‘교육적 환경’이 인간의 지적·정의적 발달에 필요불가결한 영양소라는 인식을 깊게 했다.

연구프로젝트의 발전을 위한 길
행동과학은 인간행동에 대한 사변적 이해를 넘어서서 과학적·객관적 시각으로 조명하려는 노력이다. 우리의 이런 노력이 의미 있고 생산적·발전적 변화로 귀착되기를 바란다. 행동과학의 연구방법이 더욱 세련되고 발전되기를 바라는 한편 장차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통찰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늘 다짐하곤 했다.
발전을 지향하는 연구 프로그램은 장래를 내다보고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장래를 예견하고 연구프로젝트를 미리 확정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장기적 전망 없이 시류에 영합하는 연구프로젝트에 집착해 일시의 성공에 만족하는 것은 단견이다. 장래를 그르칠 수 있는 행위다. 미래지향적인 장기적 전망을 품은 계획성이 요긴하다. 그런 장기적 전망이 없다면 그것은 태생적으로 한계를 의미한다. 그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방도를 애초부터 생각해야 한다.

연구프로젝트를 미리 결정할 수 없는 것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연구문제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과학적 연구의 범위와 성격을 규정하기가 막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럴수록 가치 있는 연구문제를 생성해내는 학문영역을 골고루 커버하는 마스터 플랜이 필요하다.
사회과학 연구의 불모지 같은 1960년대 중반의 한국적 상황에서 정부의 재정지원 없이 사회과학 계열의 연구소를 설립한다는 것은 분명 리스크가 적잖은 일이었다. 그럴수록 재정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야 했다. 재정 확보의 길이 있을 때 그 기회를 逸失해서는 안 된다. 기금 없이 연구기관을 지탱하기란 쉽지 않다. 행동과학연구소가 겪어야 했던 장기간의 재정적 난관, 그리고 그 난관을 뚫고나가기 위한 노력은 다음 글에 적는다.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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