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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특정집단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책임의 전승과 연결된다”
“이것은 특정집단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책임의 전승과 연결된다”
  • 이나영 중앙대·사회학,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
  • 승인 2016.11.1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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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 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7.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와 의미
▲ 1000차 수요집회와 소녀상 제막식 사진제공 이나영 교수

2015년 12월 28일, 우리는 환원불가능한 역사적 부정의가 되풀이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부정의는 새롭게 도래한 동북아 신냉전질서와 이 정권의 부도덕성에 기원함을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됐다. 역사를 지배자의 관점에서 일방 서술하고자 하는 측과 역사적 진실을 부인하고 왜곡하고자 하는 한국정부와 일본정부는 상호 간 죄를 추궁했던 형식적 과정마저 땅에 내팽개치고, 기실 오랜 동지였음을 ‘외교적 언사’로 만방에 공표했다. 그들은 이제 가면을 벗어 던지고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로 ‘법적 책임’이 이미 끝났다고 기만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다시 식민화하려 한다. 애초에 시민들의 의식과 열정, 헌신으로 출발했고 진행됐듯, 이제 운동정신의 계승 또한, 선조들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손에 맡겨졌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와 의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는 일제시기 식민지 조선 소녀들의 처참한 경험에서 출발한다. 혹자는 운이 좋아, 더러는 집안이 살만해 악운을 피했지만 수많은 여성들은 ‘단지 조선에 태어났다는 죄’만으로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비명은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고 감추어진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유령들’의 비명이 공적인 장에 들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자신이 직접 행하지는 않았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타인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의 오랜 고민과 개별적 호기심을 출발점으로 이를 정치적 어젠다로 확대시킨 이효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1970년대부터 원폭 피해자 문제, 일본 관광객들의 기생관광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온 교회여성연합회(이하, 교회연)의 조직적 뒷받침에 힘입어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비로소 발아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의 만남이 집단적 운동으로 성장한 배경에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성장한 진보적인 여성운동단체들의 실천적 동력과 적극적 연대가 있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1990년 11월 16일, 37개 여성운동단체들과 다른 시민, 종교, 학생 단체들이 결집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결성된다. 1991년 8월 14일, 피해자(고 김학순)가 최초로 세상에 스스로를 공개했으며, 미국과 일본에서 각각 정신대 관련 자료가 발굴되고 공개되고 외국에 관련 여성단체들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1992년 1월 8일, 정대협 주도하에 정부의 공식 사과와 만행에 대한 역사교육 실시 등을 요구하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처음 열면서 시작된 수요시위는, 2011년 12월 14일, 1,000차 기념 평화비(일명, ‘소녀상’) 건립으로 이어졌고, 2016년 3월 현재 세계인들의 관심 속에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위안부’ 운동은 민간단체들이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사회·정치적으로 쟁점화하고 세계적인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한국(여성)운동사에 주요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여성들의 경험에서 나온 분노와 집단적 저항,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 수집과 축적, 운동의 조직화 경험이 이론화를 촉발한 사례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스트 슬로건을 극명하게 부각한 사례가 됐다.

운동은 고정돼 있거나 단일하지 않다. 시간을 따라, 상황에 부딪히면서 변화한다. 따라서 운동의 의미를 단순화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나, 필자는 편의상 여섯 가지로 나눠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1991년 당사자인 김학순 씨의 최초의 증언으로 촉발된 피해자들의 연이은 커밍아웃은 역사적 부정의에 의해 침묵 당하던 ‘유령’들이 시간을 훌쩍 넘어 비로소 피해자이자 생존자, 동지라는 사회적 형체를 입게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운동이 진행되면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 피해자이자 생존자로 드러나고, 다시 활동가로 거듭나게 되면서, 운동은 차츰 당사자들의 트라우마를 해체하고 포스트식민 국가 내/간 서발턴끼리 서로 말을 걸게 하는 효과를 야기했다.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 조건의 마련,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운동성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둘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위안소가 단순히 행정체계도 아니었고, 명령에 복종한 병사들의 일상적 행위도 아닌 조직적 폭력과 인권침해의 현장이었음을 공적 발화 행위를 통해 낱낱이 ‘기록’해 왔다. 여성들의 경험을 무시하거나 배제한 거대서사에 도전하고 공식적 기록물이 아닌 여성들의 목소리에 기반한 ‘역사 다시쓰기’는 그렇게 시작되고 확산됐다.

▲ 2016년 6월 9일 열린 정의기억재단 설립 총회

셋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초기부터 남성중심적 민족주의의 이중성을 폭로하고 탈민족주의의 무기력함에 저항하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출발했다. 민족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의 적대적 공존관계 안의 여성/젠더의 복잡한 위치성을 재고하게 했다.
넷째, 그러므로 ‘위안부’ 운동은 대한민국에 잔존하는 내부의 식민성(coloniality)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역할과 위치성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이효재는 식민지배 당시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이 청산되지 못한 데서 나타나는 가장 상징적 문제’로 위안부 문제를 지목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뿐만 아니라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민족에게도 책임을 묻고 있다. 그의 깨달음은 한국적 민족주의의 발로라기보다는 사실상 우리 안에 숨겨진 종족 민족주의의 비굴함과 식민주의의 불온한 무의식적 그림자에 대한 인식이었던 것이다.

다섯째, 탈식민주의 운동이 단순히 점령/비점령, 식민 종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환기하면서 동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전쟁과 여성인권 문제를 선제적으로 이슈화해 적극적 연대를 이끌어 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로컬에서 출발한 초국적 페미니스트 운동의 전형을 구축했다. 지난 25여 년 간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활동가와 당사자들은 UN 등 국제기구 활동과 피해당사국 간의 아시아연대회의를 포함한 국제연대의 구축과 확장 등을 통해 피해자의 존재를 알리고 고통의 성격을 드러내며, 공감된 청중을 새롭게 구성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마지막으로 그러므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단편적 분노표출이나 앙갚음이 아니라 책임의 전승과 연결된다. 공동체 성원들이 국가가 과거에 (공동체 내외부에) 저지른 부정의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 및 요구되는 배상을 제공할 책임(liability)을 인지하게 하고, 우리 스스로 부정의를 시정해야 할 의무를 일깨웠다. 예를 들어, ‘소녀상’을 비롯한 전 세계 각 지역의 ‘기림비(평화비) 건립’,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나비기금’, ‘나비네트워크’ 등은 과거를 단순히 기념하거나 찬양하기 위함이 아니라 운동의 기원을 계승하고 전승된 책임을 기꺼이 지고자 하는 실천행위다. 특히 시민들의 자발적 성금으로 만든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과 당사자들이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기꺼이 자신의 손을 내밀고자 만든 ‘나비기금’(일본군 ‘위안부’제도의 생존자인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여전히 전쟁과 성폭력으로 고통 받는 세계 각지의 여성들을 당사자로서 연대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뜻을 강력히 피력했고 이에 2012년 제38회 여성대회를 계기로 공식화됐다. 자세한 내용은 정대협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은 덜 부정의한 미래를 위해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전시 성폭력의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개입을 요구하는 운동의 적극적 계승 방식이다. 또한 역사 속에 반복되는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대면을 기반으로 전지구적 정의(global justice)의 구현에 우리 모두 힘을 기울이겠다는 미래지향적 책임의 상징이기도 하다.

시민사회의 대응과 책임의 전승
한일합의문이 발표된 직후인 2015년 12월 29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즉각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 합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피해자들의, 그리고 국민들의 이러한 바람을 철저히 배신한 외교적 담합”이라 규정했다. 무엇보다 피해생존자들은 분노와 울분을 터뜨리며 정부의 결정에 대해 반발하기 시작했다. 나눔의 집 이옥선 할머니는 “이렇게 고생하고 기다렸는데 정부에 섭섭하다. 우리는 돈보다 명예를 회복 받아야 한다”며 피해자들의 희망을 재삼 확인해 줬다. 이들을 포함한 피해생존자 10명은 2016년 1월 28일, “한·일 합의 조사해 달라”며 유엔에 청원서를 제출해, 국제적으로 이번 협상의 문제점을 환기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전 국민적 반발이 조직적 운동으로 확대돼 왔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겠다며 비닐 거적을 쓴 채 매일 밤을 지세고 있으며, ‘소녀상’ 세우기 운동과 수요시위가 전국 각지에 들불처럼 일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운동의 의미를 환기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 세계행동이 확산돼 미국, 유럽, 일본 등지의 일본 대사관 앞에 교포들과 현지인들이 각종 시위와 퍼포먼스가 진행 중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조직화하기 위해 2016년 1월 14일, 전국 400여개 단체와 개인들 참여한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이 결성돼 ‘합의’ 파기를 위한 지속적인 시위와 단체 활동을 전개 중이다. 그 중 가장 주목할 점은 합의 준수의 조건인 10억 엔과 재단설립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들의 모금으로 2016년 1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손잡는 정의와기억재단 설립을 선언하고, 6월에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이 공식적으로 출범한 부분이다.

이로써 한국의 시민들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단편적 분노표출이나 특정 집단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책임의 전승과 연결됨을 분명히 하고 스스로 부정의를 시정해야 할 의무를 일깨우고 있다. 다시는 우리 스스로 환원불가능한 부정의를 저지르지 않도록, 그러한 부정의로 미래를 식민화하지 않도록, 우리의 현재적 잘못으로 미래 세대가 책임지는 일이 없도록 다짐하는 것이다. 역사적 부정의의 책임자인 우리 모두는 기꺼이 그 쟁투에 참가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소녀상’의 소녀는 그 발뒤꿈치를 땅에 딛지 못하고 있다. 12월 28일 한일합의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나영  중앙대·사회학,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총무  
필자는 미국 메릴랜드대(콜리지 파크)에서 여성학으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젠더의 관점에서 민족주의, 포스트식민주의, 섹슈얼리티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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