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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이별
어떻게든 이별
  • 교수신문
  • 승인 2016.11.1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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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詩_ 류 근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빛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외상값은 현금지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아아, 그럴 수 있을까 우리 동네 가난한 극장은 천장이 무너져서 결국 문을 닫고 수리 중, 이다 로터리에서 사라질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극장에서 극장이 이별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옛날 애인은 결국 초경 후 폐경하였다 이별이다 아아, 어떻게든 이 별!

  나는 황소표 빨랫비누로 머리 감던 시절을 기억한다 머리카락이 담벼락과 잘 결합하던 시절이었다 노란 곰인형을 팔아서 우리 노란 전구를 살까 애인은 남영역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때 인천행 전동차는 서울역과 이별하는 것이고 내 친구 김세연이는 망을 보는 것이고 삼표 국숫집 리어카는 나를 태우고 한낮의 전봇대와 충불하는 것이다 선생님, 더 이상 학교 다니고 싶지 않아요. 부산항에서 민들레는 봤어요. 노랗던데,

  그러니 나의 이별을 애인들에게 알리지 마라 너 빼놓곤 나조차 다 애인이다 부디, 이별하자.


―『어떻게든 이별』(문학과지성사, 2016.8)


□ 시인 류근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시단에 나왔다. 18년간 공식적인 작품 발표를 하지 않았다. 시집 『상처적 체질』과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등을 출간했다. 그의 관심사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연애, 추억, 음주, 가족, 육체 등과 관련된 일상적 사건이나 생각 들이다. 류근은 그런 것들을 입가에 웃음기가 피어오르게 만드는 어법으로, 매우 솔직하게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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