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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반복된 죽성과 쇠락, 그 메타포의 의미
역사에 반복된 죽성과 쇠락, 그 메타포의 의미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2.12.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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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대권주자들이여, 유목을 보라

역사는 끊임없는 축성과 수성, 그리고 쇠락의 과정으로 점철된다. 몰락한 고대의 제국도, 현대의 기업도, 철의 장막을 친 권력자도 결국은 쇠락한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말일 것이다. 과연 ‘城’은 어떤 의미를 내포할까. 혹시 그것은, 보르헤스의 추측대로 하나의 메타포는 아닐까.

보르헤스는 ‘성과 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진시황의 축성이 서적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걸 지적하면서, 그가 시간의 始原을 재창조하려는 욕망을 품었다는 것, 제국의 허망함을 알았기 때문에 성을 쌓은 것 아니겠냐고 조심스레 물은 적이 있다. “채소밭이나 정원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평범한 얘기일 테지만, 제국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결코 상식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시황은 축성과 더불어 책을 불태웠다. 보르헤스는 계속 의심한다. “게다가 가장 유서깊은 민족이, 신화건 사실이건, 자신의 과거 기억을 저버리려는 기도 역시 그냥 지나쳐버릴 만한 것이 아니다.”

“진시황은, 아마도, 어머니의 부정이라는 단 하나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과거를 통채로 말살하고 싶었는지 모른다”라고 추정한 보르헤스의 안목이 빛나는 대목은 다른 곳에 있다. 그는 이렇게 질문했다. “혹시라도 성은 하나의 메타포였을까, 혹시라도 진시황은 과거를 동경하는 자들을 그리도 무모하고 허황되며 과거만큼이나 거대한 작업의 노역형에 처했을까. 혹시라도 그것은 하나의 도전이었으며, 그래서 진시황은 이렇게 생각했을까: 인간은 과거를 사랑하며, 그 사랑에 맞서서는 나도, 나의 망나니들도 별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나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어, 내가 책을 파괴했듯이 나의 성을 파괴하고, 나의 기억을 말살할 것이며, 나의 그림자와 나의 거울이 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리라.”

성을 쌓는 것은, 고된 과거와의 싸움이다.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노역형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완고한 단절이다. 그것은 바람과 동물과 공기의 흐름까지 막아버리는, 閉塞한 공간이다. 성을 가장 두려워한 자들, 그러나 금방 이 성을 함락할 지혜를 쌓은 이들은 바로 유목민들이었다. 그들은 거친 초원의 바람처럼, 성벽을 넘어 닫힌 세계를 함몰시켰다. 천년 전의 바람은 오늘도 불어온다. 보라. 30년을 넘게 버티는 기업들이 얼마나 되는지!(일본 니케이 비즈니가 펴낸 ‘기업의 수명은 30년이다’라는 책에 실린 데이터에는, 일본 기업 1백년 사에서 기업의 평균 수명이 30년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국내 기업도 사정은 같다. 50년대, 60년대의 기업 가운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얼마나 되는가.)

이미 오래전에 미디어 학자 마셜 맥루한은 “미래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전자제품을 이용하는 유목민이 될 것이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지만 어디에도 집은 없을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세계는 더욱 유연하게 변화하고 있다. 경계도, 국경도, 인식의 극점도 뒤바뀌거나 전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사에 명멸했던 무수한 성들의 명멸사도 언뜻 이해됨직하다. 개인도 집단도, 심지어는 민족도 자신의 성에 갇힐 때 더 이상 ‘초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메타포다. 저 지루한 동일성으로부터의 탈주, 역동적인 에너지, 끊임없이 확산되는 수평적 사유 등은 더욱 곱씹어볼 만하다.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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