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3:40 (금)
조선인 170만명, 일제식민통치 종식에도 못돌아와 … 외로이 쓴 '야만의 기록'
조선인 170만명, 일제식민통치 종식에도 못돌아와 … 외로이 쓴 '야만의 기록'
  • 이진형 건국대 아시아·디아스포라연구소·한국문학
  • 승인 2016.11.07 13: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6.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식민지 경험

제국주의는 식민지의 인구와 사물을 재배치하고, 기존 지도를 다시 그리며, 피식민지인들의 정체성을 재정체화한다. 20세기 초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는 지리적 경계를 계속해서 확장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기존 조선 영토를 이른바 ‘총력전’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하고자 했다. 일련의 토지 정책을 통한 본원적 축적, 식민지 본국을 경유한 서구 근대 문물의 현지화, ‘일본인’이라는 국민명의 법제화 등 일련의 과정은 그에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식민지 조선인의 일상적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식민지화 과정이 진척되면서 조선인은 점점 더 자신이 거주하는 영토에서 ‘모국’ 또는 ‘고향’의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하거나 그 영토를 삶의 장소로 체험하기 힘들게 됐다. 이 시기 조선인의 국외 이주가 급격히 증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식민지 조선인은 삶의 장소를 박탈당한, 혹은 ‘모국’ 또는 ‘고향’에 대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그로부터 추방당한 디아스포라가 됐다.

한(조선)민족의 이주 역사는 17세기까지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이 무렵부터 조선시대 북방 지역 빈민들은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 너머 요동 지역으로 이주하곤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대규모 이주가 이뤄진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 이후였다. 정치적 탄압, 경제적 궁핍, 군사적·경제적 필요 등은 그 주요 요인들이었다. 이 요인들에 따른 식민지 시기 이주 양상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이주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 통치 초기 출판법, 신문지법, 보안법, 태형령 등 일련의 법령을 제정해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는 한편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1919년에만 7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만주로 떠났다는 사실은 이 시기 정치적 억압의 정도를 잘 알려준다. 정치적 이유로 ‘망명’을 선택한 많은 조선인들은 만주 또는 구소련 지역에서 해방 이전까지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활동을 펼쳤다.

둘째,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이주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2년 근대적 토지 제도를 수립한다는 명목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토지소유권을 지주에게 집중시키는 한편 농민 대다수를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1920년대 들어 쌀값이 폭락하면서 조선 농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결국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고, 조선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대다수 농민들은 만주로 떠나 농지를 개간하거나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 노동자가 되는 길을 택해야 했다. 만주 이주 조선인의 수가 14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많았다는 사실은 이 시기 농촌의 피폐화 정도를 잘 보여준다.

셋째,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적·경제적 필요에 의해 이뤄진 강제적 이주다. 일본 제국주의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 공포, 1939년 노무동원계획 발표, 1942년 징병제 발표 등을 통해 조선인을 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력과 노동력으로서 강제로 동원했다. 이 시기 조선인은 일부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일본 본토로 송출됐다. 그 결과 1945년 해방 직전 재일조선인의 수는 200만 명을 넘어서게 됐다.

오늘날 국외 거주 한(조선)민족의 수는 700만 명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 중 중국, 일본, 구소련 지역에 400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시기 이주자와 그 후예들로 이뤄져 있다. 식민지 시기 만주, 일본, 사할린 등 국외로 이주한 한(조선)민족의 수는 약 400만 명에 이르는데, 그 중 170만 명 이상이 식민 통치 종식 이후에도 여전히 귀환하지 않은/못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미귀환자들은 현재 한반도 주변 국가들에서 한(조선)민족 2, 3, 4세대를 형성하며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국외 이주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고향’ 혹은 ‘모국’에서 진행된 토착민의 디아스포라화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 통치 초기 조선 국토의 약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국유화한 뒤 이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 토지회사와 일본인 이민자에게 무상 또는 저가로 불하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 농민들과 지주들이 ‘고향’과 ‘모국’을 떠나 국외로 이주했지만, 토지의 소유자 변경과 산업 구조의 급속한 재편 속에서도 ‘고향’과 ‘모국’을 떠나지 못하는/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1938년 6월 소설가 김남천이 발표한 짧은 소설 「美談」(<비판>)은 그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美談」의 주인공 박왈수는 김좌수 댁 소작인지만 농사뿐만 아니라 마을 대소사까지 다 돌볼 정도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생활상의 진리’는 ‘着實’이고, 소망하는 바는 ‘배추라도 심어서 팔 개똥밭’ 정도 구입하는 것으로 매우 소박하다. 그래서 그는 금광 열풍이 조선 전 지역을 휩쓸 때도 고향에 남아 ‘착실’하게 마을 일을 돌보며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다만, 그 역시 그 열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어서 농사 일을 쉬는 날이 되면 사금을 캐거나 鑛區에 나가 일을 하곤 한다. 개인 소유지가 없는 소작농이 ‘배추라도 심어서 팔 개똥밭’ 정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광맥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하루 종일 점심도 거른 채 정질을 하지만 간혹 운 좋게 몇 원 얻을 수 있을 뿐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벌어진 바위 틈새에서 금광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 틈을 정으로 내려치지만, 거기 남아 있는 화약이 폭발함으로써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美談」의 서술자는 박왈수의 비극을 ‘우리 고을 당대 미담의 주인공의 비참한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美談」을 과도한 물욕에 집작한 ‘착실’한 박왈수에 대한 풍자, 즉 배금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죽음은 영토와 산업의 재편성이 급속히 진행되던 식민지 시기, 기존 삶의 방식과 삶의 장소를 상실하게 된 조선인의 운명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박왈수의 죽음은 사금을 캐거나 광구에 출입하는 순간 예정돼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소작인으로서 농사를 짓고 땅을 개간하는 데 능통한 인물이었지 바위틈을 헤집고 다니며 화약을 터뜨리는 데 능통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사금을 캐기 위해 강물로 뛰어들거나 금을 얻기 위해 바위틈을 헤집는 행위는, 그가 계속 기존 영토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 또는 ‘모국’을 끊임없이 상실해 가는 과정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수대에 걸쳐 살아온 영토에서 자신의 삶을 위한 장소를 잃게 됐고, 죽음을 통해 그 상실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게 됐다.

식민화의 경험은 모든 원주민을 잠재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디아스포라로 만든다. 원주민은 기존 영토로부터 이주하든 거기에 계속 거주하든 기존 삶의 장소를 상실하게 된다. 그들은 국외로 떠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만, 국내에 남은 채 ‘네이티브 디아스포라(native diaspora)’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하는 상실과 고통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식민정책학자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는 식민지 시기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지만, ‘식민’의 ‘문명화 작용’에 대해서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식민은 ‘양적·질적인 의미에서 인류 경제의 발달’을 가져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영토를 점령한 후 사회 전 영역의 ‘근대화’를 시도했다. 조선총독부는 각종 법률을 제정한 뒤 그를 통한 ‘합리적’ 법치를 시행하고자 했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도입함으로써 세계적 흐름에 부합하는 ‘근대적’ 경제 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는 경성을 중심으로 몇몇 ‘근대적’ 건물이 들어서기도 했고, ‘근대적’ 지식과 문화가 유입돼 식민지 조선인의 일상을 세련되게 디자인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인의 디아스포라화는 이와 같은 ‘식민지적 근대화’의 이면, 혹은 그 지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합리적’ 탄압 과정이자 조선인 농민에 대한 ‘근대적’ 축출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 시기 한(조선)민족의 이주는 일부 ‘자발적’ 선택에 의해 이뤄진 측면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것은 ‘강요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고향’과 ‘모국’에 남아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고향’과 ‘모국’을 떠나 이주민의 삶을 살 것인가, 이는 결코 ‘자율적’ 선택을 위한 질문이 아니다. 이 점에서 오늘날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제국주의적 폭력과 그 현재적 연속성에 대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는 발터 벤야민의 명제를 빌려 말하자면, 그 존재는 ‘문화의 기록’ 이면에 있는 ‘야만의 기록’ 그 자체다.

 

이진형 건국대 아시아·디아스포라연구소·한국문학

필자는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후 과정을 연수했다. 식민지 말기 비판적 사상과 문학, 그리고 지구화 시대 디아스포라 문제에 관해 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193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의 소설 이론』, 『한국 다문화주의 비판』(공저)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