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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제도틀로는 창의력 교육 못한다.
고정된 제도틀로는 창의력 교육 못한다.
  •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교육철학
  • 승인 2016.11.0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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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교육철학

이 글은 <월간교육> 2016년 11월호에 실린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의 「창의성 교육의 전략」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이돈희 명예교수

내가 영재교육기관에 속하는 민족사관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 제도상의 문제 두 가지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나는 대학입시라는 절박한 상황을 앞에 두고 있는 고등학교에서 영재교육의 프로그램을 제대로 운영하는 데는 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경직된 학교제도에 맞춰 영재교육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영재교육은 앞서 언급했듯이 잠재적 창의력이 실현될 수 있도록 계발하는 교육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늘의 여건 속에서 창의력 교육은 심각한 제도적 장벽을 경험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창의력 교육의 문제는 영제교육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영재교육을 하는 학교라고는 하지만 민사고도 우리나라의 학제상 3년의 고등학교이고 도리 없이 대학의 진학을 위한 준비교육을 해야 한다. 이 학교가 실질적으로 영재교육을 하고 있고 그러한 성과를 거둔 학교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대학선발정책에서는 어떤 특전이나 고려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의 사정관 제도와 같은 정성적 평가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는 소규모의 영재학교는 내신등급 등에서 오히려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영국이나 미국의 전통적 사립학교가 문법학교(Grammar School)는 영재교육이니 지도자 교육이니 하는 건학 이념의 천명 없이 본래가 대학의 준비학교(Preparatory School)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민사고도 그러한 서양의 사립학교와 유사하게 대학의 준비학교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지금까지 교육의 성과도 진학의 실적으로 말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에, 어쩌면 외국의 경우에도, 대학의 진학을 준비하는 교육은 영재의 계발을 위한 교육과 상당한 정도로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창의력 교육의 장벽을 설명하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중학교는 비교적 대학입시와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영재교육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적어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해 6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면 영재교육과 대입 준비를 더욱 균형 있게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웃 일본에서 영재교육을 위한 학교들 중에 초기 중등의 중학교와 후기 중등의 고등학교를 한 체제로 연계한 ‘一貫中等學校’로 개편한 사례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만약에 일본의 일관중등학교와 같은 제도가 허용되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우리의 學制가 바뀌어야 한다. 기왕 학제의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교육부와 연구기관의 주변에서 학제의 개편에 관한 이야기가 가끔 흘러나오고 있다. 초등학교를 5년으로 한다든가 고등학교를 4년으로 한다든가 등의 아이디어들이 검토되고 있는 것 같이 들린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마도 미래에도, 학생들의 국가 간 이동이 매우 빈번할 것이고, 국제적 취업구조에도 적응해야 할 것이므로, 매 학년도의 신학기를 3월에 시작하는 것으로 돼 있는 학기제를 국제적 동향에 맞춰 전년의 9월로 앞당기는 방식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외곡, 특히 서양의 경우보다 6개월 정도 늦게 취학하고 있다.

요컨대, 미래의 교육은 고정된 제도적 틀로써는 변화에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투자적 동기에 의한 교육계획이거나 복지적 동기에 의한 교육정책이거나 간에,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교나 중학교에서까지도 학생 선발의 규칙, 교육운영의 체제, 교육내용의 조직, 학습활동의 범위를 기계적으로 고정시켜 놓고서 국제적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혹은 교육받는 각자에게 충분히 봉사하는 제도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한꺼번에 온갖 것을 고쳐버릴 수 는 없으므로, 국가는 교육의 여러 부문에서 크고 작은 교육적 실험이 가능하도록 국가적 통제의 경직성을 풀고 오히려 이를 지원하는 적극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의 교육정책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사고와 실천의 여지를 허용하기보다는 규격성과 획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통제와 규제가 너무 많은 편이다.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교육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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