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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사회의 그림자 ‘순장’ … 사람 대신한 부장품 ‘사실묘사’ 뛰어나
신분사회의 그림자 ‘순장’ … 사람 대신한 부장품 ‘사실묘사’ 뛰어나
  • 교수신문
  • 승인 2016.11.0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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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41. 고구려 陶俑(彈琴仙人)
▲ 사진⑬ 고구려도용(개인소장)

신라는 왕이 서거하면 남녀 10명을 순장했다. 고령에 위치한 대가야 역시 발굴된 44號墳에서 복합적인 고대국가의 순장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신라 지증왕 3년조(502년)에 왕이 순장을 금지하기 전에는 무덤의 주인공과 시중을 받들던 주변인을 함께 묻는 순장제도가 고대국가에서 일상으로 받아들여졌다.

▲ 사진⑭ 무용총 벽화의 탄금선인(현실 천청부고임 오른쪽)

고구려의 경우, 순장의 흔적을 보여주는 고분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삼국사기』에는 “東川王이 서기248년 서거하자 왕을 따라서 죽어 함께 묻히려는 신하들이 많아서 아들인 中川王이 이를 금지했지만 장사하는 날에 무덤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사진①)의 고구려 碧碑가 2005년 한국토지공사 박물관에서 발표된 바 있다(中川王 卽位敎書 壁碑와 東川王 讓位敎書 璧碑). 이 사료와 유물을 근거로 보아 고구려의 자발적인 순장의 한 단면과 순장을 금지한 시기를 동시에 짐작할 수 있다. 백제는 순장에 대한 기록이나 유적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고구려와 같은 夫餘國 계통으로 순장제도가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사진20 도용의 뒷면

순장은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주변에서 시중을 들던 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임을 당해 來世에서도 현세처럼 주인을 계속 모시게 하기 위해 무덤에 함께 묻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순장제도가 폐지된 것은 그만큼 순장제도의 폐해가 심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종이라도 원치 않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장이 금지된 이후에는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사람이나 동물의 모형을 만들어 부장품으로 매장하게 되는데 재질에 따라서 크게 陶俑, 木俑으로 양분된다. 대부분의 목용은 부식돼 사라지기 쉬워서 건조한 기후 지역에서 발견되며 도용은 磁器質의 도용과 土器質의 도용으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크기가 작아지면서 자기질로 변한다. 대표적인 토기질의 도용은 진시황릉의 兵馬俑으로 실물크기로 만들어 졌으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도용의 크기가 작아진다(사진③~사진⑤).
우리나라의 도용은 신라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사진⑥ ⑦ ⑧)의 도용처럼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며 器物의 장식으로 붙여 사용한 토우(사진⑧)들도 도용의 부류로 볼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부여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陶製人物像(사진9)을 도용으로 보는 경우가 있으나(무덤출토가 아니고 탑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탑에 안치하는 塑造像으로 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무덤의 도용과는 거리가 멀다. 남북국시대 신라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용강동고분(1986년 발굴)의 28점의 인물도용을 들 수 있는데 도용의 종류도 다양하며 얼굴모습과 자세도 각기 다르다(사진⑩). 당나라의 의복을 착용했으며 회를 바르고 채색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모두 무덤의 주인공을 보좌하는 현실세계의 인물상들이다.
고구려의 도용도 알려진 사례가 거의 없으며 중국 요령성 여순시 철산구에서 출토된 3점의 인물도용과 박선희 상명대 교수가 발표한 고구려 侍女陶俑(‘晋永和乙巳年’銘)뿐이다(사진⑪).
고려시대는 도용을 부장한 사례가 거의 없으나 간혹 작은 청자말 등이 출토되거나 일상용기로 부장품을 대신 하게 되고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나무로 만든 목용이나 자기질의 白磁陶俑이 성행하는데 明器라고 불리게 된다(사진⑫).

(사진⑬)은 필자가 확인한 고구려 도용인데 거문고를 타고 있는 神仙의 모습으로 ‘彈琴仙人’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인 무용총의 현실 천정부 고임 오른쪽 부분에 그려진 탄금선인(사진⑭)과 모습이 거의 유사하다. 왼쪽 뒤로 기울어진 상체는 거문고에 심취해 열중하는 모습이며 무릎 위에 올려놓은 거문고 줄을 튕겨내는 손가락까지 빠짐없이 묘사했다(사진⑮). 기다란 목과 三山冠형태의 머리는 무용총벽화의 圖上과 일치하며(사진16), 天衣사이로 살짝 나온 발도 비슷하다(사진17). 중국의 도용처럼 섬세하게 제작되지 않았으나 노련함과 거침없는 기상이 엿보인다. 사각 판의 점토위에 앉은 인물상을 조성해 붙였으며 사각 판의 바닥에는 고구려기와에서 보이는 shard와(사진18) 麻布痕迹이 있고 중앙에 ‘太齊宮OO’ 銘文이 있다(사진19). 도용의 표면에는 전체적으로 灰가 들러붙어 있는 상태이고 붉은색 점토질로 철분이 많이 함유된 태토에 산화소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출토된 대부분의 도용은 무덤 주인공과 관련된 현실세계의 인물이나 동물들과 진묘수 등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도용이 가장 많이 출토된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彈琴仙人’의 고구려 도용은 현실세계가 아닌 天上世界의 도용으로 매우 이례적이며 중국문화와는 또 다른 고구려만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고구려인의 天下觀이 무덤의 벽화뿐만 아니라 같이 부장된 도용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텅 빈 고구려 벽화무덤 속에는 많은 부장품과 함께 벽화에 그려진 현실세계와 천상세계의 인물과 仙人들이 도용으로 제작돼 매장됐던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드문 수량이 확인된 고구려 도용의 실체이지만 고구려인의 부장문화를 예측할 수 있고, 당시 중국과의 빈번한 교류를 생각하면 고구려인 역시 피장자와 관련된 여러 도용을 제작해 함께 묻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동안 천년 넘게 계속돼온 고구려고분의 盜掘로 인해 그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이렇게 살아남은 유물들은 우리 조상의 찬란한 문화를 또다시 일깨워준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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