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6:25 (금)
글로벌 탈냉전 시대, 재일동포들의 수구초심을 가로막는 장벽은?
글로벌 탈냉전 시대, 재일동포들의 수구초심을 가로막는 장벽은?
  • 김귀옥 한성대·사회학
  • 승인 2016.11.03 21: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 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5.냉전적 이산, 탈냉전적 공존
▲ 교토 할아버지의 부모님 제사 모습. 출처: 김귀옥(2011년 1월 27일)

해외동포 720여만의 시대다. 남북 인구의 10%에 가까운 사람들이 해외동포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해외동포라 하면 다시는 고향산천을 밟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 백 만 명의 이산 동포들은 일제 강점기 고향을 떠난 후, 해방이 되고 나라가 광복을 맞아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산 동포의 귀환과 상봉을 가로 막은 일제보다 더 높은 장애물은 분단과 냉전이었다. 한반도 분단과 동서 냉전은 일제 강제 이산 당했던 수백 만 명의 동포들이 귀환하기는커녕 친, 인척과의 상봉 자체를 상상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어려서 간혹 라디오 주파수를 잘못 돌리다 보면 서울에 사는 OOO씨가 일제강점기에 헤어진 후, 중국 길림성에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촌 형 OOO씨를 그리워하며 보내는 편지를 여성 아나운서가 애잔한 목소리로 읽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을 접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릴 때는 이 방송의 성격을 잘 몰라서 혹시 대남방송이 아닌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조금 자란 후 이 방송이 KBS의 ‘사회교육방송’(2007년 이래로 한민족방송)임을 알게 됐다. 간혹 그 방송을 들으면 구 소련지역이나 사할린 등에 수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고, 편지에 실린 사연들은 하나 같이 눈물겹지 않은 내용이 없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후로 서울 곳곳에 낯설지만 똑똑하게 우리말을 쓰는 村老같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중국의 약재를 들고 우리에게 나타났다. 얼마 후에 식당이나 건설 현장에서 수많은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게 됐다. 또 얼마 후에는 사할린에 강제징용 당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4천346명이 영구 귀환했다. 그분들 중에는 사할린에 두고 온 가족을 못 잊어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대부분 안산이나 사할린 동포 공동체에서 살고 있거나 별세했다. 탈냉전은 오랫동안 꿈꿨던 이산 동포의 귀향과 상봉을 현실화시켰다.

이제 탈냉전은 해외동포와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있다. 같은 민족 동포라 해도 다양한 언어와 문화, 경험을 갖고 있다. 해외 현지의 가족, 친척들과의 다양한 문화적·경제적 교류를 통해서 다양한 새로운 관계나 문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중국의 양고기 식용 문화가 최근 한국에서 새로운 식문화로 탄생하고 있는 예도 그 하나다. 또한 한국의 K-POP이나 한류문화가 확산되는 계기 역시 해외동포들에 의해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냉전 이후 다문화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21세기 급변하는 해외동포들과의 새로운 사회문화적·경제적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냉전의 시간에 살아야하는 해외동포들이 있다. 이른 바 ‘朝鮮籍’ 재일동포다. 해방 후 일본 정부가 재일동포들에게 던져준 ‘조선적’을 갖고 태어난 재일동포 2, 3세의 대다수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재일동포 후세대의 대다수는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또한 2002년 北·日관계가 악화된 이래로 일본의 민족학교 출신들 중에도 북한을 방문한 적도 없는 학생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그들은 한국을 선망하고, 한국(남한)의 K-POP, 드라마, 한국적인 것을 좋아하고 있다.

재일동포가 겪어왔을 냉전적 상황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2011년 교토에서 만났던 한 할머니의 생애담은 재일동포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그녀는 1935년 효고현에서 가난한 조선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많아서 그는 10대 고사리손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부자 일본인 집에 식모로 팔려갔다. 일본이 패망하고 가족이 자리를 잡은 후 그는 조선인 2세 남성과 결혼했다. 남편은 뼈 빠지도록 일을 하여 제법 규모가 큰 파칭코 사업을 시작하면서 돈이 붙기 시작했다. 남편은 돈을 벌면서 일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조선의 유물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문화재 사업과 파칭코 사업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남편은 ‘조선적’을 가진 채 별세하고 말았다.
할머니는 남편의 유지인 문화재 보존사업으로 남한과 사업이 긴밀해짐에 따라 한국 국적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커갔다. 그러나 북한으로 귀환한 자신들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국적 변경의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한국적으로의 변경을 하더라도 북한의 가족들을 방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면서 한국적으로 바꾸게 됐다.

노년이 돼 처음 밟아본 한국은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지면서 혼자서도 한국 거리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방북할 기회가 생기면 방북하여 가족을 만났다. 사실 이러한 조건을 가진 사람은 일본 내 재일동포 사이에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나이도 나이지만 재력을 갖추고 있고, 남한과 북한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그를 비롯해 대부분의 재일동포에게 한국은 고향으로 그립지만 두려운 곳이다. 반대로 북한도 조국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난한 그들의 친인척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곳이다.

또 다른 할아버지는 술 한 잔에 흥취가 나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제창하자고 했다. 교토의 민족학교 교장으로 퇴직한 후에는 그는 교토 내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참여하는 통일한마당 행사를 주도해왔다. 통일은 그에게 종교이자 신념이었다. 또한 통일은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그에게 또 하나의 힘은 어머니였다. 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이주해 천민부락에서 막노동으로 대식구를 먹여 살리며 고생했다. 해방 직후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린 자녀들을 어머니 혼자서 막노동에 함바 식당을 운영해 키웠고, 아들들을 대학 교육까지 시켰다. 훗날 착실히 모은 돈으로 교토 내에서 제법 큰 재일코리안 식당을 차렸다. 그에게 어머니는 일본에서 민족운동, 민족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됐다.

오랫동안 그는 통일되기 전에는 부모의 고향인 경상북도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했다. 열정과 헌신으로 일본에서 민족통일운동을 주도해왔으나, 그의 몸에 번진 암세포 때문에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2010년경부터는 주일 한국영사관을 찾아가 한국 방문을 신청했고, 심지어 국적 변경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조선적 동포에 대한 문걸기정책으로 인해 국적 변경이건 한국 방문이건 다 불허됐다. 2015년엔 죽음을 앞두고 영사관에 가서 읍소했다. 한국을 방문하면 오로지 고향만 방문하는 조건으로 마침내 부모님의 고향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돌아간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재일동포 2세들 중에는 부모님의 백골을 고향에 묻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죽어서나마 묻히고 싶어 했던 1세대들의 유언을 생각하며 분단을 한스러워했다. 어떤 동포는 한국영사관 앞에서 부모님의 유골을 고향에 가게 해달라고 시위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의식 저변에는 일본에서의 뼛속 깊은 차별의 경험과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름과 역사, 민족정체성 마저 부정당해온 차별의 시간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재일동포들의 수는 일본 패망 당시 60만명 정도였는데, 오늘날에도 60만명이라고 말한다. 2015년 12월 통계 자료로는 한국적 동포는 45만7천772명, 조선적 동포는 3만3천939명이다. 1980년대 초까지 일본에서 등록 외국인은 곧 재일동포(84.9%)이었다. 최근에는 중국인 이주자들이 급증하면서 재일한국·조선인의 비중이 32.9%로 떨어지고, 숫자 자체가 1981년 66여만명에서 최근에는 49만 여명으로 줄었다. 왜 그런가?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들은 재일한국·조선인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본에는 한국계 일본인(Korean Japanese)이라는 범주가 없기 때문이다. 즉 일본인 아니면, 한국적 또는 조선적 외국인이다.

일본의 국적제도나 외국인 차별은 대부분의 재일동포들에게 크나큰 상처이자 트라우마다. 그러나 재일동포에게 더 큰 상처는 한반도의 분단이다. 재일동포의 대부분은 남과 북에 모두 친·인척을 두고 있지만, 한반도의 분단은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을 상봉하고자 하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적인 일조차도 통제하고 억압하고 있다. 한국 국적으로 바꾸면 북한의 친척을 만나기 어렵고, 조선적을 유지하면 남한 방문이 어려워지니 그들에게는 냉전과 분단은 반인권적 상황을 고착시키는 원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나 그리움 속에는 냉전이 없다. 많은 재일동포의 2, 3세들 중에는 통일이나 민족, 한반도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한 무관심의 저변에는 아픔과 좌절,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깔려 있음은 조금만 얘기하면 쉽게 알 수 있다. 통일이나 한반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국적과 상관없이 조국은 통일돼 있다고 말한다. 남한과 북한을 이념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 없는 한반도를 고국으로 그리워하고 조부모의 고향이자 자신들의 친척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글로벌시대 해외동포는 통일과 평화의 과제를 함께 풀어나갈 한 민족이자, 보편적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누려야할 기본 인권을 그들이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귀향권이나 가족 상봉권,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누가 막겠는가. 국가가 국가답지 못해 국적을 잃어버렸던 재일동포. 그들의 수구초심의 마음마저 냉전의 장벽으로 가로막을 수는 없다.

 

 

김귀옥 한성대·사회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 분야는 ‘분단과 전쟁’, ‘통일과 평화’, ‘이산가족과 여성’, ‘분단을 넘는 사람들’, ‘디아스포라 공동체’ 등이다. 최근에 펴낸 책으로 『구술사연구』, 『동아시아의 전쟁과 사회』, 『전쟁의 기억 냉전의 구술』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