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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재출현한 장소, 개념의 자율성을 획득하다
20세기에 재출현한 장소, 개념의 자율성을 획득하다
  • 장세용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서양사
  • 승인 2016.11.03 2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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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장소의 운명: 철학의 역사』 에드워드 S. 케이시 지음| 박성관 옮김| 에코리브르| 927쪽| 50,000원

『장소의 운명』은 이미 『장소로의 귀환』(1993)에서 고대 바빌론의 우주론, 건축학, 정신분석학, 인류학, 어원학을 동원해 ‘공간’ 인식의 부활을 강조했던, 스토니브룩대 철학과 특훈교수인 에드워드 케이시(1939~)의 저술이다. 여기서 저자는 ‘공간을 장소로 재사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모든 ‘세계 안의 존재’는 현상학적으로 ‘장소 안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장소인식의 부활을 오직 철학적 성찰로만 논증한다. 이를 위해 고대인의 사유에 출현했던 ‘장소’ 관념이 중세와 근대를 거쳐 격세 유전해 20세기에 재출현하며 개념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여정을 심지어 저술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30여 쪽의 각주와 긴 설명을 덧붙여 가며 통찰력 있는 ‘지식의 고고학’으로 거침없는 논지를 전개하면서 설명한다.

통찰력있는  ‘지식의 고고학’
이 저술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 고대의 신화적 및 종교적 이야기: 유대-기독교 서사의 중심인 ‘창세기’의 창조신화에서 세계의 창조행위를 통한 장소의 창조와 그에 따른 공허자체도 장소로 이해한다. 그리고 희랍철학에서 플라톤의 『티마이우스』에서 코라(chora) 개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장소의 힘(power)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물이 어디에나 한번 거기에 있게 되면 권력을 장악하고 지키도록’하는 힘을 통찰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장소가 상실되면 사물은 존재론적 상실에 직면할 것으로 평가한다.
(2) 헬레니즘 시대에서 르네상스까지: 헬레니즘 시대에는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 프로클루스, 필로폰누스 등이 ‘창세기’에 주목했지만 장소를 추상화시키며 공간화의 길을 열었다. 거기에 에피큐러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루크레티우스, 크리시푸스의 물질적 공간 이해에 장소가 동화돼 갔다. 중세에는 신의 무한성을 사유하며 공간의 절대적 본성과 상대적 본성에 관한 치열한 논의의 계기를 제공했다. 신의 존재 변증의 시대(아베로에즈, 토마스 아퀴나스 등)를 거쳐 르네상스(브루노, 쿠사의 니콜라스, 파트리치 등)까지 기독교의 무한 보편자 개념이 자극한 보편적 공간 개념이 상승세를 유지하며 사물의 예견 및 통제가능하고 측정가능성에 관한 이해를 자극했다.

(3) 계몽주의 철학: 근대철학자 데카르트, 존 로크, 피에르 가상디, 라이프니츠 등에서 장소를 공간의 보조적이며 단순한 위치로까지 축소시킨 사고의 추상화가 초래한 공간 개념이 세계이해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됐다. 데카르트의 공간은 기독교, 정신주의 및 이원론에서 영혼을 물질적 방역(regions)과는 분리시켰다. 근대철학의 정점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공간을 순수직관의 영역에서 찾았다. 그러나 공간에서 방역의 차이를 신체와 연관시킨 것은 장소 개념이 새로 출현할 계기를 제공했다. 저자가 이러한 변화의 임페투스를 설명하면서 칸트를 유독 강조하는 것은, 헤겔이 『정신현상학』 등의 저술에서 지리학 지식과 공간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음에도 그의 사유를 거의 거론하지 않는 것과는 크게 비교된다.

(4) 20세기 철학: 화이트헤드, 마르틴 하이데거, 에드먼드 후설, 메를로퐁티는 칸트를 창조적으로 계승해 신체와 장소를 연관시켰다.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서 장소에 관심이 새로 증대한 것은 신체에 관심과 직결됐다. 거기에 가스통 바슐라르는 데카르트가 중립적이고 동종의 공간으로 이해한 공간에 상상적인 변수를 작용시키는 현상학적 성찰을 거쳐 공간은 장소와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의미가 없다는 직관적 통찰로 이끈다. 그리고 사물의 본성과 장소가 모든 다른 사물들과의 상호작용에서 결정된다는 관점을 끌어낸 철학자로 긍정된다.

저자에 따르면 20세기는 장소를 재발견한 시기다. 저자가 가장 주목하는 철학자는 마르틴 하이데거이고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을 우위에 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저술에서 장소를 긍정한 암시와 참고의 지침을 끌어내어 공간 특히 장소를 긍정한 철학자로 부각시킨다. 하이데거가 장소를 때로는 구체적 관념으로 때로는 은유로서 사용했지만 저자는 이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 대신 존재의 장소학 개념을 하이데거가 장소에 관심을 가진 증거로 내놓는다. 거기에 덧붙인 것이 『존재와 시간』에서 ‘공간은 장소들로 쪼개어졌다’고 한, 나중에 하이데거가 논박한 구절에 집착한다. 하이데거가 표방한 가까움과 근린 관계를 구현하는 ‘거주하는 건조물’ 개념은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이 신체를 살아있는 몸(lieb)과 물리적 몸(k¨orper)으로 구분 한 것에서 가져왔다. 거기에 메를로퐁티의 ‘신체의 공감 각성’ 개념에서 장소의 위치는 더욱 명료해지고 20세기 실존주의와 사회이론에서 중심 주제로 등장한다.

저자는 후반부로 가면서 장소의 발견을 후기구조주의의 다양한 시도와 연관시킨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미셀 푸코, 뤼스 이리가레이,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그리고 데리다에 관한,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한 흥미로운 분석이 추가 된다. 특히 그는 푸코의 경우, 칸트가 신체를 장소와 연관시킨 것을 이어서 몸과 장소를 연관시키는 지적 계기로 삼았다고 본다. 저자가 여성주의자 뤼스 이리가레이에게 각별하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성적 차이의 윤리학에서 장소와 여성의 몸을 밀접하게 결합시켜 사유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매끈한 공간과 홈패인 공간 개념의 구분을 수용해 전자를 장소와 연관시키지만 사실 서로 연결된 것을 드러낸다.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 장소를 끌어내는 것은 책의 앞부분에서 유대-기독교와 고대철학에서 장소를 끌어내는 논리와 맞물려 저술의 순환논리 구조를 완성한다.

이 저술에서 저자가 장소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장소가 공간이라는 용어보다 더 원초적이고 현상학적이며 현실을 개념화해 심각하게 오독하는 경향을 훨씬 줄인다고 본다. 곧 장소에서 사물은 그들과 동종의 좌표에 위치부여하지 않고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자리 잡는다. 저자의 장소론에서 신체와 장소는 상호작용하며 상하 좌우가 ‘불명확한 한쌍(indefinite dyad)’으로서 자리 잡고 놓이는(implacement)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저자의 ‘장소분석적 연역’에서 장소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구체적으로 탈중심화 시키는 바, 이는 ‘배려를 국소화 하는’ 건조(building)장소와 자연장소의 관계가 ‘전적으로 상호 침투하는’ 양상에 주목하도록 이끈다. 그 결과 생태학, 환경윤리, 인간 거주에 새로운 시사점으로서 이동중심주의(loco-centrism)에 관심을 기울일 계기를 제공한다. 저자가 하이데거를 원용해 거주와 건축에 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할 것이다.

본래 모더니스트 담론에서 사물은 ‘공간에 지점(point)을 부여 한다’. 곧 다른 사물과의 관계가 아니라 다른 ‘공간의 지점들과의 관계’에서 놓여진다. 이 공간의 ‘지점들’은 적합한 공간들을 점유하지 않는다. 곧 어디에 있는가를 정의내리지 않고 다양한 사물들에 준거하지 않는 ‘지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저자는 어떤 사물의 장소는 모든 다른 사물의 관계에서 놓여지고 그것이 사물의 본성을 결정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原형이상학적’ 명제에 공감한다. 심지어 그는 장소에서 존재해온 원초적 사물처럼 행동하거나, 더 적합한 어떤 다른 장소를 발견하는 경향까지도 인정한다. 그 결과 장소는 우리가 위치한 관계들의 모태이며 그것들을 측정하는 방식 뿐 아니라 사물의 본성과 그들이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요소로까지 승격돼 버린다.

장소 절대화했다는 혐의 지울 수 없어
그러나 저자가 장소의 관계적 결정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장소에 놓인 사물의 본성을 절대적으로 결정하는 요소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저자는 공간의 절대화를 비판하면서 장소를 절대화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시간 중심에서 공간으로, 공간에서 더 우선적인 요소로서 장소를 발굴해 냈다면, 우리는 장소가 없으면 사유와 실천도 불가능한가. 그와 맞물려 우리는 장소를 벗어남(out-of-place) 역시 사유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저자는 장소의 안과 밖에 주목하고 여행과 횡보, 사물의 바깥이나 전이 부분에 관심을 가졌지만 아직 비장소(non-place) 개념을 사유하지는 않았다.

 

장세용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서양사
필자는 영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양근현대지성사를 전공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프랑스 계몽주의 지성사』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신문화사의 공간과 문화의 정치경제학」,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와 밀입국자: 생명정치 개념과 연관시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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