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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사회, 사색적 삶
가벼운 사회, 사색적 삶
  • 교수신문
  • 승인 2016.10.3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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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설한 편집기획위원/경남대·정치철학
▲ 설한 편집기획위원

그야말로 어수선한 요즘이다. 북핵과 사드배치 문제로 한동안 갈등을 겪더니, 이어진 지진과 태풍은 국민의 불안과 걱정을 키웠다. 전 외교수장의 회고록으로 정쟁은 가열되고 국정감사는 구태를 반복한 가운데 청와대와 관련한 각종 정치성 의혹과 비리까지 더해져 우리 사회의 미성숙한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일상에서 밝고 즐거운 소식보다 우울한 뉴스가 더 많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과 비리가 꼬리를 물지만 이전의 분노는 쉬이 잊혀지고, 새로운 사건은 또 다른 분노를 낳는다. 반복되는 사회적 치매 현상 속에 공분은 쉽게 파묻히고, 해결과 대안 없이 그냥 지나치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조와 푸념은 잦아지고, 그냥 분노만 하다 잊기를 되풀이할 뿐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와 그 속의 인생은 늘 흔들림의 연속이다.

배운 자, 가진 자들의 횡포와 경박한 언행은 이 사회를 멍들게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통과 슬픔을 준다. 사회 또한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계에 내팽개쳐진 이들에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은 ‘무조건 최고’를 善으로 삼아 돈과 권력, 지위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자의적 선호가 정치·도덕적 판단의 일상적 잣대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 사회는 가벼움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고, 정서적 방황 속에 우리도 경박한 시민이 되어간다.

검증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찌라시와 괴담, 유언비어에 사회는 흔들리고 시민들은 쉽게 선동된다. 멍청한 교육제도는 수능 몇 점 더 받으면 인생이 바뀌는 것으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不義에 대한 분노보다 특정인이나 특정사안에 대한 도덕적 혐오가 집단적 여론몰이로 표출돼 개인의 자율성을 위협한다. 이 시대 우리 사회의 고민거리와 묵직한 기사는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무의미한 가십성 기사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연예계 신변잡기가 포털 사이트를 점령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사회의 가벼움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진영논리와 극단의 대립구도 속에 끊임없이 분열하며 각자의 정의만을 외치다 두 눈은 멀고 문제의 본질은 가려진다. 그런 사이 아무런 공직도 없고 전문가도 아닌 일개 민간인이 비밀리에 국정을 주무른 엽기적인 사건은 우리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公私를 구분 못하고 人治에 매달려온 국정 최고책임자의 신뢰와 원칙을 허문 가벼운 행위는 어이없을 따름이다.

언제부턴가 진지함은 진부함으로 치부돼 버리고 사회적 근본 이슈에 대한 신중한 탐구와 거대 담론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경박한 말과 행동이 넘쳐나고, 말장난과 희화화가 만연하며 재미있고, 보기 좋고, 듣기 좋으면 그저 좋을 뿐이다. 마치 차창밖 풍경을 무심코 보듯 사람들은 인간관계는 물론 현실과도 진중하게 마주하지 않고 가볍게 스치면서 살아간다. 진솔하고 경건한 삶의 정신은 사라지고 가벼움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정신이 되고 있다. 허세와 무책임으로 들뜬 한없이 가벼운 사회에서 최선을 선택하지는 못할망정 최악을 피해야 하는 상황은 자괴감을 더한다.

인스턴트 문화와 감성 위주의 사회현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깊이 사색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감각적 자극을 선호하며, 사물을 판단할 때도 이성적 논리보다는 감성적 이미지에 더 영향을 받는다. 가볍고 표피적이며 순간적이고 사소한 것들이 이제는 그 정도를 넘어 진지하며 무겁고 깊이 있는 것들을 밀쳐내고 있다. 아무리 스웨그(swag) 시대라지만 참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이 가벼움을 어찌하랴.

인간사회의 훌륭한 문화적 업적은 대체로 어렵고, 느리고, 복잡한 것들이며 깊은 사색적 삶에 힘입은 것이다. 사색적 요소가 제거된 활동적 삶은 가벼운 즉흥적 행동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그 속에서 우리는 생각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아렌트가 말하듯 사색적 삶, 성찰적 삶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진중한 사회, 사색적 삶을 되살려 존재의 가벼움을 진지함과 풍요로움으로 전환시켜 줄 수 있는 실천적 지혜의 체득이 요구된다.
 

설한 편집기획위원/경남대·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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