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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이 정의한 ‘심미적 승화’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
철학자들이 정의한 ‘심미적 승화’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
  • 교수신문
  • 승인 2016.10.2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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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_ 32강. 김상환 서울대 교수의 ‘향유, 쾌락, 심미적 형식’

 지난 15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 W스테이지에서 열린 ‘문화의 안과 밖’ 32강 ‘향유, 쾌락, 심미적 형식: 향유의 역사를 위하여’란 주제의 강연에서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는 예술적 상상력에 수반되는 심미적 쾌락의 고유한 특성을 설명하며, “심미적 쾌락은 다른 종류의 쾌락과 외면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적인 활동을 제약하는 주관적 조건으로서 문화적 삶 일반에 편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날 강연에서 김 교수는 쾌락의 역사 혹은 향유의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중심으로 고대적 유형의 향유를, 데카르트와 칸트의 미학을 중심으로 근대적 유형의 향유를, 그리고 프로이트와 라캉의 예술론을 중심으로 현대적 유형의 향유”를 차례로 정리했다.
그에 의하면 “플라톤은 인간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은 앎에 대한 허기를 채워가는 이성적인 삶에서 오고 앎에 대한 열정과 배움이 가장 선한 쾌락의 원천”이다. 또 “이런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그대로 계승된다.”
김 교수는 “심미적 승화는 도덕법칙이 만들어놓은 질서 자체 안에서 타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창조적 위반의 공간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미래의 질서와 법칙을 요구하는 새로운 관심과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욕망의 주체와 사회를 연결해주는 가장 이상적인 통로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심미적 쾌락은 예술의 선물이되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자마자 잊어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창조적인 활동을 제약하는 주관적 조건으로서 문화적 삶 일반에 편재하는 어떤 것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특정한 대상과 관계하고, 그런 한에서 그 대상이 요구하는 어떤 객관적 조건에 구속되기 마련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특정한 객관적 조건에 의해 구속되는 것처럼 쾌락 분만적 자기향유라는 주관적 조건에 의해 제약된다. 이런 쾌락 분만적 자기향유는 심미적 차원에서 완성되거나 활력을 얻는다. 이는 심미적 쾌락이 다른 종류의 쾌락과 외면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점을 발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데카르트와 칸트: 심미적 쾌락의 발견과 근대 미학의 탄생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비극에 고유한 쾌감’에 주목하되 그 쾌감을 작품의 형식적 구조(플롯)의 효과로 간주하는 것으로 그친다. 이것은 감상자의 주관적 감정을 작품이라는 객관적 근거에 기초해 설명하는 셈이다. 반면 근대 미학에서는 모든 것이 전도된다. 예술작품의 객관적 가치(아름다움)는 예술에 고유한 쾌락에 의해 정초된다. 그리고 예술에 고유한 심미적 쾌락은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설명된다.
데카르트의 양식에서 칸트의 판단력으로 그러나 근대 미학의 길이 열리기 위해서는 정교한 인식능력이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인식의 객관적 조건과 구별되는 인식의 주관적 조건에 대한 관심이다. 데카르트는 언제나 현학이나 박학에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정신에 내재한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발견의 능력을 가로막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론적 형식이나 박학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갈수록 우리의 정신이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념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양식(bon sens)이란 용어로 압축된다. “제대로 판단하는 능력이자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AT전집 VI권 2)으로 정의되는 데카르트적인 의미의 양식은 배워서 얻는 능력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가지는 자연스런 능력이다. 양식이란 결국 정신에 내재하는 창조적인 판단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창조적인 판단력은 판단의 형식적 규칙으로 객관화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판단의 주관적 원리라 할 수 있다. 후일 칸트의 비판철학을 완성하는 『판단력 비판』(1790)은 심미적 판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심미적 판단의 분석은 천재의 분석에서 정점을 이룬다. 칸트는 이런 천재를 예술적 재능으로 국한해 학문적 재능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했다. 배우거나 가르칠 수 없고 방법적 절차로 객관화할 수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판단력은 규정적 판단과 결부된 상상력이었다. 반면 『판단력비판』에서 판단력은 반성적 판단과 결부된 상상력이다. 이 책의 분석론은 심미적 판단의 특징을 질, 양, 관계, 양상이라는 네 가지 계기로 나눠 설명한다. 이것을 한 줄로 요약하면 심미적 판단은 ‘무관심한 만족’을 주고(질의 계기), 개념에 도달함 없이도 보편적으로 합의될 수 있으며(양의 계기), 외재적 목적에서 자유로운 어떤 형식적 조화를 경험하고(관계의 계기), 개념적 필연성과 다른 그 나름의 필연성을 지닌다(양상의 계기).

심미적 쾌감의 특징 이 네 가지 계기 중에서 질적 계기(무관심한 만족감)와 관계의 계기(목적 없는 합목적성)는 심미적 판단의 내용적 특징에 해당한다. 반면 양적 계기(개념 없는 보편성)와 양상의 계기(개념 없는 필연성)는 심미적 판단의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권리를 정당화하는 부분이다. 향유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이 네 가지 계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의 질적 계기다. 칸트는 심미적 판단의 질적 특징을 ‘무관심한 만족감’으로 규정하면서 심미적 체험에 고유한 쾌락을 처음으로 개념화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효과로 언급했던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생리적 쾌감과 도덕적 순화의 쾌감 중의 하나로만 해석돼왔다. 그러나 칸트가 언급하는 무관심한 만족감은 신체상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쾌감도, 순수 이성에 의해 경험되는 도덕적 쾌감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과 신체를 동시에 가진 인간으로서 지니는 쾌감이다.

프로이트와 라캉: 쾌락, 향락(주이상스), 심미적 승화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한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는 문제,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 大義는 병적일 정도로 자신의 내면으로 한없이 침잠한 개인들 사이에서, 그들 사이의 기만적이고 오해로 가득한 대화 속에서 비로소 실체를 얻을 수 있다. 왜 그런가. 사회적 질서가 탄생하는 零點에 개인들을 하나로 묶는 어떤 이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이념은 어떠한 개별적인 작품이나 작업으로도 현시하기 어려운 문제다. 니체나 프로이트가 말하는 아이-되기는 이런 인문적 주체의 역설적 구조에서부터 이해해야 한다. 칸트의 용어로 하면 이것은 천재와 취미의 긴장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양자의 대립적 구도에서 정의할 때 천재는 예술적 대상을 생산하는 능력이다. 반면 취미는 예술적 대상을 예술적인 것으로 판정하는 능력, 다시 말해서 예술적 완전성을 평가하는 판단력이다. 칸트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천재이되 이 천재는 취미에 의해 길들여진 천재여야 한다.
다시 쾌락이란? 우리는 이것을 정신분석의 쾌락 이론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쾌락의 문제와 심각하게 씨름하게 된 것은 쾌락원칙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과 부딪혔을 때다. 무의식의 세계가 오로지 쾌락원칙의 지배 아래에만 있다면 무의식적 주체는 언제나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만을 추구할 것이다.

쾌락원칙 너머의 쾌락 향락(주이상스) 쾌락원칙과 도덕법칙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두 줄기다.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쾌락원칙 너머에서 설정한 죽음충동이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무기체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려는 생명체의 노력으로 간주했다.
죽음충동이란 결국 주체가 두 법칙에 의해 설정된 거리를 무한히 좁혀 들어가려는 충동이다. 향락은 그런 죽음충동에 이끌려 무의식적 주체가 물과 하나로 수렴해갈 때 일어나는 자극량이다. 향락은 도덕법칙이 금지하는 것이므로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다. 그것은 로고스의 질서를 깨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무의식적 충동에 내재하는 본질적 속성이라는 점에서 근본악이라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점과 관련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1) 먼저 쾌락원칙 너머의 향락은 절대로 실재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2) 향락은 환상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에 의존해서 성립한다.

심미적 승화와 창조적 주체의 탄생 그렇다면 왜 이런 향락을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존중해야 하는가. 향락은 무의식적 욕망의 궁극적 진상이라는 점에서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향락의 주체는 쾌락원칙과 도덕법칙 너머로 나아가되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나아가야 한다. 어쩌면 향락의 주체만이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의 창조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는지 모른다. 그러나 변태로 낙인찍히거나 범죄자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 향락의 주체다. 이 점에서 향락의 주체는 칸트의 천재나 헤겔의 정직한 의식 나아가 니체의 노는 아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향락과 승화는 쾌락원칙과 도덕법칙의 저편으로, 저편의 ‘물’로 표시되는 빈자리와 관계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주체가 물의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고자 할 때 향락이 일어난다. 그리고 향락을 현실 속에서 추구할 때 주체는 범죄적 도착에 빠진다. 반면 승화의 주체는 스스로 상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쾌락원칙과 도덕법칙이 그려놓은 금지의 선을 넘지 않는다. 향락의 주체는 궁정식 사랑의 주인공처럼 자신을 대신하는 대상(연인)을 통해서 물과 간접적으로 관계할 때 사회적 규범을 일탈하되 사회로부터 용인되는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좀 더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는 창조적 주체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처럼 문화 현상 대부분이 승화의 업적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가령 종교, 예술, 과학이 모두 승화의 방식이자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예술을 통한 심미적 승화를 가장 중시했다. 그것은 물과의 거리를 가장 적절하게(‘건강하게’) 유지시켜줄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 욕망의 구조를 의식적 차원에서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 때문이다. 심미적 승화는 도덕법칙이 만들어놓은 폐쇄적 질서 자체 안에서 타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창조적 위반의 공간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미래의 질서와 법칙을 요구하는 새로운 관심과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욕망의 주체와 사회를 연결해주는 가장 이상적인 통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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