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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망각의 터
박물관, 망각의 터
  •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 승인 2016.10.2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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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독일 남서부의 고요한 소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는 최근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2012년부터 지역사회에서 추진해온 거리명칭 변경 사업이 올해 10월초에 일단락된 것이다. 해당 위원회는 총 1천300개의 거리명칭을 조사한 결과 12개의 명칭을 변경하고 15개는 존속시키되 경고적 의미의 안내판을 부착할 것을 요구하는 최종보고서를 제출했다. 과거의 사악한 지배체제, 즉 나치에 가담해 불의를 행한 인물들을 사회의 공공영역에서 배제시키고자한 것이다. 여기에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나 병리학자 칼 루트비히 아쇼프 같은 저명한 지식인의 이름이 포함돼있어 눈길을 끈다. 하이데거는 말할 나위도 없이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지만 나치에 부역한 전력으로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된 인물이며 아쇼프는 심근질환과 동맥경화증, 결핵 등의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긴 병리학자이지만 노년기에 들어 나치의 우생학 정책에 기여한 오점을 남겼다.

프라이부르크의 사례는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미 1990년대에 통일독일의 수도가 된 베를린에서 옛 동베를린 거리에 흔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예컨대 로자 룩셈부르크街―을 말끔히 지워버린바 있다. 과거를 진지하게 반성하려는 독일인들의 태도는 물론 높이 평가할만하지만 과거를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 과연 올바른 방식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공공영역에서 사라진 과거는 자칫 박물관의 유물로 박제돼 우리와는 무관한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그 위험성이 마치 불발탄처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거를 망각하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이 바로 이곳 대한민국이다. 수도의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과거를 박제화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문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012년 말에 개관한 이 논란 많은 박물관은, 부실하기 그지없는 졸속의 건립과정은 차치하더라도, 기본 발상 자체가 극히 의심스럽다. 독일인들처럼 과거를 반성하려는 자세는 전혀 엿볼 수 없으며 자기도취적인 기적과 성공의 신화만을 연출하고 있다. 대체 군사독재의 폐해와 그 피해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그 ‘성공’의 대열에서 도태된 이들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민주화란 그저 정치지도자들의 업적에 불과한가. 민주주의는 선진국에 도입하기 위한 실적의 하나인가. 성취되지 못한 대안적 가치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과거를 생생한 현실의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전시장의 유리관 속에 봉인하고 박제화한다는 점에서 기억의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망각의 터라고 해야 옳다.

중국사 연구자 하세봉의 최근 저서 『역사지식의 시각적 조형: 동아시아 박물관의 역사적 전시』(민속원, 2016)는 구미의 박물관 체제를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받아들인 동아시아의 국립박물관들이 기본적으로 과거에 대한 체계적 망각을 꾀해왔음을 알려준다. 이 책이 다루는 동아시아 각국 주요도시의 14개 박물관들은 국가성, 지방성, 근대성, 식민성, 예술성이라는 5가지 요소를 각각 다른 비중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색다른 역사지식들이 제공된다.

1872년 동아시아 최초의 박물관으로 탄생해 오늘날까지 존립하는 도쿄국립박물관(옛 도쿄제실박물관)이 식민지를 포괄하는 제국사의 구축을 시도했고, 이에 대응되는 중국 베이징의 국립역사박물관이 봉건왕조 시대의 화려한 문화를 선보이는 데 오래도록 주안점을 두었던 것에 반해, 일제 치하의 타이완총독부 박물관은 현지의 역사를 도외시한 채 진기한 자연자원과 이국정취, 그리고 총독부의 통치실적과 식산흥업을 선전하는 데 주력했으며, 식민지 조선의 이왕가박물관은 조선의 역사를 예술의 이름으로 봉인해 현재와 단절시키고자했다. 확실히 제국과 식민지의 박물관은 주안점이 달랐다. 그렇지만 초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의도적인 선택과 배제라는 기본원리에서는 다름이 없다.

1945년 이후에 타이완의 주요 국립박물관들이 반공의 기치를 내세운 국민당 정부를 찬란한 중화문명의 대표자로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던 것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자기도취적이고 체제수호적인 전시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박물관이 결코 역사에 대한 중립적인 판단과 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은 중국 단동 소재의 항미원조기념관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종전 40주년을 맞아 1993년 7월에 개관한 이 기념관은 우리가 기억하는 6·25 전쟁과는 전혀 다른 전쟁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적대국가는 오로지 미국일 뿐, 유엔과 한국은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타오위안산의 정상에 위치한 이 기념관이 부산 남구의 평지에 자리 잡은 유엔기념공원과 의외로 동형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자유와 평화를 말하면서도 적국의 시신을 위한 자리는 허용치 않는 유엔기념공원은 항미원조기념관과 하등 다를 바 없이 망각을 제도화하고 있다. 역사적 과거에 대한 성찰의 여지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곳들인 것이다. 물론 중립적인 진실이란 없다. 노스탤지어나 센티멘털리즘만 자극하며 불편한 과거를 잠재우기보다 오히려 전시의 기본의도를 공개하고 공론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박물관을, 그러한 역사문화의 도래를 꿈꾸어본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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