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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회고록의 무게 … 한국 교육사의 한 증거가 되다
팔순 회고록의 무게 … 한국 교육사의 한 증거가 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10.19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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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회고록의 풍경, 『부러지지 않는 집념: 천포 이상주 박사 회고록』(학지사, 272쪽, 비매품)

가족들이 조촐하게 ‘팔순 회고록’으로 준비했다. 무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8월에 책이 나왔지만, 단연코 이 회고록은 성격상 조용하게 지나갈 책이 아니다.

 

회고록이란 어떤 것인가. 형식 자체가 독특하다. 자서전과 평전이 그 옆에 자주 놓이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회고록을 두고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적은 기록’이라고 밝혔다. 여기 조용하게 출간된 회고록 한 권이 있다.
교육학자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 대통령 비서실장,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고, 강원대 총장, 한림대 총장, 울산대 총장을 지낸 천포 이상주 박사가 이 회고록의 주인공이다. 1936년생인 그의 팔순을 기려 가족들이 조촐하게 ‘팔순 회고록’으로 준비했다. 무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8월에 책이 나왔지만, 단연코 이 회고록은 성격상 조용하게 지나갈 책이 아니다.

‘단연코’라고 썼다. 어째서 ‘확실히 단정할 만하게’ 그렇다는 건가. 먼저, 회고록 정리자가 밝힌 것대로, 이 회고록은 그를 둘러싸고 재생산됐던 오랜 소문을 一掃하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국립대학인 강원대 총장에 임명됐을 때, 그를 집요하게 괴롭힌 것은 통치권자의 인척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 회고록의 핵심에 이 내용을 담지 않은 건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던 선택으로 보인다. ‘마무리’ 부분에서 거론한 것은, 아마도 천포 자신에게는 이게 그리 문제되지 않는, 사실이 아닌 세간의 헛소문이었기에 담담하게 응대한 것으로 읽힌다. 정리자가 인용한 내용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재직 중에 통치권자의 인척이라는 헛소문이 이상주 총장을 괴롭혔지만 나중에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오히려 영부인은 새세대육영회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직언을 했다가 교육·문화수석 자리에서 지방대학 총장으로 좌천됐다(이애희 강원대 교수 회고담).

다음은 교육학자로서 교육수장이 돼 어떤 행적을 남겼는가와 관련된다. 2002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취임사를 보자. 천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복되는 말보다 일관성 있는 행동입니다. 또 다른 교육개혁 방안을 새롭게 제시해 국민에게 불안감과 부담을 주기보다는 현재 진행 중인 정책을 일관성 있게, 알차게 추진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교육수장 자리에 올랐을 때, 아마도 이들을 사로잡는 유혹은 자신의 교육철학을 정책에 반영하는 일이 제일 먼저일 것이다. 그러나 천포는 그 유혹 대신 기존의 교육개혁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 부분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으로서 ‘이상주’를 재평가할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비서의 노크를 따라 들어선 정주영 명예회장실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영재교육은 특정 분야의 소수 정예를 양성하는 데 관여하기 때문에 정부의 관련 부처(문화예술부, 과학기술부, 정보통신부, 국방부, 교육부 등등)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제도가 수립돼야 한다.”는 문장으로 회고록은 마무리된다. 프롤로그와 마무리가 있지만, 이건 정리자의 목소리일 뿐이다.
특히 회고록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인연이 돼 ‘울산대 총장’을 맡아 구성원과 함께 대학 발전을 이룩한 부분을 맨 앞에 비중 있게 내세웠다. 이는 아마도 그의 교육철학이 좀 더 성숙한 시기의 행적에 의미를 매기려는 배치로 보인다. 다음 대목에서 그런 행간의 의미를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나의 재임 기간 동안 울산대에 건물이 많이 신축된 것은 교육받는 학생들을 위한 기초 요소였지 그것이 발전 목표는 아니었다. 오히려 먼 훗날 울산대 역사를 돌이켜보며, ①울산대를 졸업한 학생들의 개인적 성취가 얼마나 크게 향상됐는가, ②울산대 교육체제가 국가발전과 학문적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살피기를 요청했다.” 학생들의 개인적 성취, 국가와 학문에 대한 대학의 기여를 그가 일찍이 눈여겨봤다는 것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회고록은 누구나 인생의 완성을 경과한 시점에 작성하기 때문에 ‘사실의 變奏’가 끼어들 여지가 많다. 흥미롭게도 그의 회고록은 그런 사실 변주와 과장이 없다. 그는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주어진 일이 공적으로 옳은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반면, 그 일에 외부에서 사적으로 이해관계가 개입되는 일이 발생하면 참지 못하고 그 일에 반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라고 천포는 자신의 천성을 지적했다. 그런 그였기에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5공 초대 교육·문화수석에 이르게 됐을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교육위원회(위원장 오자복 장군)가 주최하는 ‘한국 교육문제에 대한 토론회’의 발표자로 내정된 게 발단이었다.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원장 이홍구 교수)가 수행하는 연구 프로젝트의 교육 관련 자료 수집차 경남 하동 지역에 내려가 있던 천포는 급한 연락을 받고 바로 다음날 토론회에 참석했다. “어제까지 교육문제의 현장, 그것도 대도시가 아니라 경남 하동에 있었기 때문…… 청중의 관심과 반응은 예상 밖으로 껐고, 그날 저녁 KBS TV의 방송과 다음 날부터 여러 일간지 등에서 나의 발표 내용을 기사로 실었다. 속된 말로 이 토론회의 스타가 됐고, ‘떠 버렸다.’” 그리고 두 달 뒤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천포의 관운은 이렇게 이어졌지만, 그 속에는 ‘公私 구분’의 엄격함과 교육현장에 대한 이해가 깊게 자리한다. 학자가 나라 일에 나설 때, 그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선현은 말했다. 아마도 천포 이상주는 그런 원칙에 충실했던 교육학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회고록은 한국 교육의 또 다른 증거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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