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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계주 … “1세대 계승한 철학 2세대의 대표적 업적”
세대 간 계주 … “1세대 계승한 철학 2세대의 대표적 업적”
  •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
  • 승인 2016.10.19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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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계의 성장, 소광희 교수 선집 발간에 부쳐

 선집이나 전집은 한 개인의 업적을 집대성해 놓는
작업이기에 개인의 업적이나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하거나
연구하기에 편리하다. 그가 일생동안 어떤 문제와 씨름했고,
그의 생각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이해하기도 쉽다.

요즘 출판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운정 소광희 교수님의 선집(문예출판사 刊)이 발간된 것은 저자 개인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철학계의 차원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일생 동안 탐구하고 모색한 업적들이 한 질의 선집이나 전집의 형태로 정리돼 발간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임에 틀림없다. 시간 속에 유실되거나 흩어져 버리기 십상인 개별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정돈됨으로써 긴 수명을 누리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학계 차원에서도 매우 바람직한 이유는 학문의 발전과 계승을 용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학문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학문 세대 간의 계승적 작업이 효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것은 흡사 여러 사람이 연속적으로 달리는 계주와 비슷하다. 앞선 세대의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다음 세대가 전진한다. 만약 모든 세대가 원점에서 출발하려고 한다면, 일정한 수준 이상은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고 경쟁력을 갖추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선집이나 전집은 한 개인의 업적을 집대성해 놓는 작업이기에 개인의 업적이나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하거나 연구하기에 편리하다. 그가 일생동안 어떤 문제와 씨름했고, 그의 생각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이해하기도 쉽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런 선집이나 전집들을 연결해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손쉽게 파악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선집이나 전집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한 사회나 학계의 학문적 역량을 어느 정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나의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뮌헨대 도서관에서 수 십 명이나 되는 독일 철학자들의 전집들이, 그것도 한 철학자 당 보통 두터운 책 30권, 40권 되는 분량으로 서가 가득히 진열돼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도쿄대 도서관에서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수 십 명의 일본 철학자들의 전집이, 이것도 한 철학자 당 보통 20권 넘게 서가 가득히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우리의 현실과 대비하면서 속으로 기가 꺾이고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쓰러질 것 같았던 사건이 잊히지 않는다.

전집이 별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별것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전집이야 말로 그 사회 학문의 깊이와 폭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교수들이 정년퇴직 때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괜찮은 책 한권 출간하면 대성공이라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내용의 질은 차치하고 우선 분량만으로도 전집를 출간할 수 있는 정도가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 철학계의 경우 철학 1 세대를 대표하는 열암 박종홍교수님의 전집 7권이 처음으로 발간되고 나서, 몇 년 뒤 서우 최재희 교수님의 전집 7권이 추가된 것이 몇 십 년 동안 철학계의 전 자산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 우송 김태길 교수님 전집 15권, 단계 이규호 교수님 전집 9권, 박이문 교수님의 선집 10권이 나와 가까스로 철학계의 체면은 살린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운정 소광희 교수님의 선집 발간은 1세대의 철학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철학 2세대의 대표적 업적을 정리함으로써 한국 철학계의 맥을 잇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한국 철학계의 성장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운정 소광희 교수의 선집 7권은 다음과 같이 구성돼 있다. 『시간의 철학적 성찰』(1권),  『자연 존재론』(2권),  『사회 존재론』(3권),  『자아 존재론』(4권),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5권),  『청송의 생애와 선 철학』(6권),  『무상이 흔적들』(7권).
 『시간의 철학적 성찰』은 동서고금의 시간론을 섭렵하면서 운정의 독창적인 시간론을 전개한 저서다.  여기서 운정은 반세기가 넘도록 집요하게 매달린 결실로서, 시간을 인식론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측면에서 구명함으로써 자신의 시간론을 제시한다. 『자연 존재론』, 『사회존재론』, 『자아 존재론』은 운정의 존재론 3부 작으로 일생 탐구한 존재론의 정수를 보여준다.

존재론은 가치가 부여되기 이전의 존재 자체를 대상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대상에 대한 일차적 탐구는 개별학문이 담당한다. 철학은 그 개별학문이 거둔 성과와 연구방법론에 대한 이차적 반성적 사유이다. 이런 논리에서 운정은 자연과학에 대응하는 자연존재론, 사회·역사과학에 대응하는 사회존재론, 인문학에 대응하는 자아존재론을 완성한다. 운정은 각 존재론이 추구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한다. “자연 존재론은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고, 사회·역사 존재론은 행위의 원리를 모색하며, 자아 존재론은 구원의 문제를 성찰한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는 국내 최초의 하이데거 강독 안내서이면서 동시에 하이데거에 대한 독창적 해석이다. 『청송의 생애와 철학』은 고형곤 교수님의 동양적 선의 연구를 논구한 것이다. 여기서 운정은 청송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존재 현전의 문제를 존재론의 입장에서 해명한다. 『무상의 흔적들』은 시간의 상 아래서 바라본 삶과 현실의 풍경을 다룬 것이다. 그 동안 여러 대중 매체에 쓴 철학 에세이나 논단들 중에서 선별한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운정 소광희 교수님은 30여 년간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하이데거 철학을 중심으로 시간론과 존재론을 천착해 왔다. 선집의 구성이 이런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 선집은 운정의 10여권이 넘는 저서 중에서 핵심적으로 심혈을 기울인 저서들만 뽑아 묶은 것이다.

이번 선집 발간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로는 인문학 출간으로 이름 있는 문예출판사의 주도아래 선집이 구상됐으며, 각 권 마다 뒷부분에 박찬국 교수를 비롯해 최화, 이한구, 김상현, 정은해, 김종욱, 강순전, 강학순 교수 등이 운정의 저술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논평이 함께 실려 있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선집 발간과 함께 강학순 교수가 운정 소광희 교수님의 철학적 사유의 길을 해명하는 『시간의 지평에서 존재를 논하다』는 책을 발간한 것도 금상첨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운정의 학문 세계가 열린 공간을 지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과의 인간적 유대도 그만큼 돈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남아 있는 저술들도 함께 묶는 전집 발간의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며 선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해 마지않는다.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
한국분석철학회와 철학연구회 및 한국철학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다. 사회철학, 역사철학, 과학철학 등의 분야에서 비판적 합리주의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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