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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실체에 대한 진부하지만 낯선 여정
그리스의 실체에 대한 진부하지만 낯선 여정
  • 교수신문
  • 승인 2016.10.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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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헬라스와 그리스: 그리스성에 대한 문화사적 고찰』 조은정 지음|사회평론|419쪽|30,000원

 

▲ '벨베데레 아폴론', 바티칸 박물관. 기원전 4세기 작품에 대한 로마시대 복제본(16세기의 보수 후 모습).

인문학의 세계에서 그리스는 가장 진부한 탐구 대상 가운데 하나다. 서양 문명의 기원이자 토대로서 고전 고대 세계가 종말을 고한 시점부터 이미 그리스 문화유산에 대한 탐구와 계승 작업이 중세 비잔티움 세계와 서유럽 사회 양쪽에서 경쟁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 근세 서구 문화의 패러다임으로 작용해 온 이 문화권역에 대해서는 현재에도 수많은 논의와 분석이 진행 중이다. 근세 서양미술사학에서 그리스 미술, 그 가운데서도 조각과 건축은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렸으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이른바 고전주의라는 애매모호한 용어로 통용되는 고대 그리스 미술의 후광에 대해서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의 전위적인 사조들과 비평 이론들이 집중적인 공격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 대부분은 르네상스 이후 근세 서구의 고전주의 예술가들과 인문학자들에 의해서 조성된 ‘가상의 그리스’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이 책은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 미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 질문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근세 고전미술사학과 현대 고전고고학의 출발점이자 두 학문 분야가 격돌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질문이기 때문이다. 여러 고대문명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만큼 후대 연구자들의 기대와 해석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현현된 문화의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폴리테이아(πολιτεία)나 시메트리아(συμμετρία), 이데아(ἰδέα) 등 고대 그리스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용어의 개념들에 대해서 후대 고전주의자들이 수세기에 걸쳐서 심오한 철학적 명제와 해석을 덧붙였던 것처럼, 그리스인들의 미적 취향과 조형 작업에 대해서도 일찍이 헬레니즘과 로마인들부터 열광적인 평가와 해석 작업을 진행했다. 이들이 남긴 문헌들은 근세 인문주의자들이 고전 미술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길잡이가 됐으며, 그 덕분에 서양 고전미술사학은 미학적 전제에 근거해서 유물 자료를 편집하는 연역적 방식으로 수세기 동안 고대 그리스 미술의 실체를 탐구해나갔다. 여타 어느 고대 문명보다도 많은 연구가 지속되고 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실체를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문화다. ‘그리스성’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기도 하다.

탐색의 범위와 분석 사례들
 그리스 고전주의의 패러다임이 지닌 영향력은 학문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기원 전 4세기 마케도니아 왕국이 아테네의 뒤를 이어서 그리스 세계의 맹주로 부상하게 됐을 때나 로마 제국 말기,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함락과 같이 지중해 세계의 정치적 판도가 재편될 때마다 ‘그리스성’은 헤게모니 투쟁에서 긴요한 선전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 그리스 국가 독립 과정 역시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처럼 고전 고대부터 비잔티움과 포스트비잔티움 시대를 관통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문명의 역사에서 ‘그리스성’에 대한 기존의 기대감과 고정관념이 동시대의 현실과 상호작용하면서 역으로 그리스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들이다. 이 책에서 그리스성에 대한 탐색을 역시대순으로 진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중세를 거쳐서 근세와 현대에 이르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살펴보기에는 원형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관점이 너무나도 제한돼 있다(적어도 미술사학 분야에 있어서는 현 상황이 이러하다). 필자는 현재 우리에게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는 그리스 미술의 양식적 틀과 가치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봤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들에게까지 전설적인 존재들로 전해지는 폴리클레이토스나 프락시텔레스, 리스포스 등 기원 전 5세기와 4세기의 그리스 조각 작품들이 아니라, 이들에게 미술사적 위치를 부여한 빈켈만과 푸르트뱅글러 등 후대 미술사학자들의 ‘저술 행위’와 판단 근거에 초점을 맞췄다.

필자가 무모했던 부분은 논의의 범주를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근세와 현대로 확장한 것이다. 어차피 그리스라는 대상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으로 국한될 수 없으며, 이 집단의 문화적 정체성은 외부 집단과의 관계와 상호 작용에 의해서 규정되는 개념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가상의 이미지와 기대치가 후대의 그리스인들과 주변인들(서유럽 인들)에게 작용한 사례로서 포스트비잔티움 시대 동안 서유럽 문화와 교류했던 크레타 畵派 및 이오니아 畵派, 그리고 현대 그리스 국가 독립 전후의 그리스 계몽주의 운동과 이들이 극복 대상으로 삼았던 비잔티움적 전통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는 주제가 너무나 방대해져서 각 사례에 대해 심도 깊게 분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연마된 ‘그리스性’
나는 고대와 근세, 안과 밖의 시각에 따라서 형성된 그리스 문화의 이원적 이미지의 상충 작용을 고찰하기 위해서 먼저 제1장에서는 그리스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연구에서 고전고대로부터 20세기까지 문화사와 미술사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돼 온 관점과 개념, 그리고 연구 방법에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점들에 대해서 살펴봤다. 제2장에서는 근세 서양미술사학 분야에서 고대 그리스미술에 대한 패러다임이 어떻게 구축돼 왔는지, 그리고 20세기 이후 고전 고고학의 초기 성장과정에서 이러한 기존의 역사 인식 틀이 어떻게 도전받았는지 개략적으로 서술했다. 제3장과 4장에서는 고전기 말기로부터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아테네 중심의 고전 그리스 문화가 마케도니아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서 수용되는 과정을 고찰하고, 제5장과 6장에서는 근세와 현대 그리스인들이 고전주의와 비잔티움적 전통 사이에서 어떠한 갈등을 겪었는지 회화와 건축의 사례들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그리스성에 대한 탐구는 그리스의 문화적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이 문화에 대한 가치화가 집단 내부 구성원들과 외부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어떻게 변화돼 왔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다. 그리스라는 존재가 인문학의 역사에서 보석과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전 고대와 중세 비잔티움이라는 두 시대적 층위, 그리고 가상적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간극에 의해서 연마·재생산된 것이 그리스성이다. 비록 이 책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그리스의 총체적 실체를 규명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인식하는 그리스성의 개념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그 흔적을 따라가면서 서양 문명의 역사에서 그리스에 대한 기대감과 가치화가 지녔던 실체적 힘을 독자들이 함께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은정 목포대·미술학과
필자는 그리스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대 역사와 고고학부에서 선 원근법의 기원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스 미술』, 『로마 미술』 등의 역서와 『Korean Painting: From Modern to Contemporary, 1945-1980s』(Hollym)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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