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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便安·왕조의 安寧 담은 염원의 미학, 그 오랜 울림
백성의 便安·왕조의 安寧 담은 염원의 미학, 그 오랜 울림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6.10.12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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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40.목조아미타판불감 (木彫阿彌陀版佛龕)

佛龕은 집이나 사찰의 건축물보다 작은 공간에 부처님을 봉안하기 위해 모셔놓은 별도의 자리를 의미한다. 불감의 종류는 자연 암반을 파내어 만든 벽 불감을 비롯해 목재나 도자기, 금속 등 다양한 재료로 사용 목적의 크기와 용도에 맞게 여러 가지 형태로 제작했다.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커다란 불감부터 목걸이나 허리띠의 작은 공예품 형태까지 매우 다양하게 고안돼 사용했으며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에 맞는 불감이 유행했다. 특히 고려시대는 개인용 護身佛龕이 성행해 장신구 등의 작은 기물을 응용한 금속제 불감이 많이 제작됐다(장신구용 목제불감도 많이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쉽게 부식되는 재질의 특성상 현존하는 유물은 거의 없다).

▲ 사진⑨ 판불감을 접은상태

(사진①)은 銀으로 제작된 매우 희귀한 고려시대의 불감으로 높이 4.3cm의 작은 불감이다. 殿閣모양으로 만들어져서 문을 열면 아미타좌불이 봉안돼 있다. 전각의 기왓골과 창살, 문고리까지 수준 높은 고려시대의 금속공예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②)는 금동제품으로 남자의 허리띠 마디장식 속에 여러 菩薩像과 奏樂像을 봉안했던 특이한 불감이다. 
고려시대의 불감은 금속제로 만들어진 유물은 남아있으나 木製로 만든 불감은 확인하기 어렵다(고려시대에 木彫佛龕도 많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나 쉽게 부식되는 재질의 특성으로 현존하는 유물이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金銅佛龕은 송광사에 소장된 고봉국사불감(사진③)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금동불감은 순천 매곡동석탑에서 출토된 성화4년(1468년)불감을 예로 들 수 있다(사진④).

우리나라 木彫佛龕의 경우는 (사진⑤)의 新羅木彫三尊佛龕(교수신문, 김대환의 문향 제11회, 2015년 7월 20일자)으로, 필자는 이를 最古의 목조불감으로 발표했다. 고려시대의 목조불감은 아직 확인된 유물이 없다. 普照國師 知訥(1158년~1210년)의 願佛로 구전돼 오는 송광사 普照國師 木彫三尊佛龕(국보 제42호)은 輸入品이다(사진⑥). 나머지 현존하는 대부분의 목조불감은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목조불감으로는 평창 월정사 남대 지장암의 목조지장삼존불감(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英賢, 賢元이 제작한 광양 상백운암의 아미타삼존불감, 올해 처음 공개된 목조수월관음보살불감 등이 있다.
(사진⑧)의 木彫阿彌陀版佛龕은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전통적인 삼존불감의 양식을 벗어나 서 예전보다 더 실용적인 형태의 불감으로 진화한 특이한 사례다. 목재 중에서 단단하고 무거운 느티나무 판재를 활용해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청동으로 만든 경첩의 못도 6개씩 박아서 매우 견고하다. 가로16cm 세로22cm 두께3.2cm로 조선시대 書冊의 크기다(사진⑨).

불감을 열면 양면에 아미타삼존불과 나한상을 협실로 배치한 아미타좌불상이 조성돼 있는데 陽刻으로 조각한 다음 石彩顔料를 사용해 화려한 채색을 했다. 오른쪽 아미타삼존불의 圖上은 1853년에 영의정 김좌근이 大施主로 제작한 『불설아미타경』(사진⑩)의 변상도와 거의 일치해 이 목판불감의 제작년도도 19세기 중반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미타경은 조선후기부터 말기까지 전국에 널리 퍼진 정토사상에 기반을 둔 불교경전으로 혼란한 사회에 양반과 백성들의 信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미타불은 無量壽佛 혹은 無量光佛이라고도 하며 과거에는 法藏이라는 보살이었는데 衆生을 구도하기 위한 願을 세우고 오랜 기간 수행해 뜻을 이뤄 10겁 전에 부처가 돼 극락세계에 존재하게 됐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부처로 중생들에게 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오른쪽 불감은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로 된 삼존불이다. 파란바탕의 하늘에 꿈틀대는 구름을 위아래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연꽃을 밟고 선 아미타삼존불을 陽刻했다. 삼존불을 중심으로 하나의 身光과 3개의 頭光이 불감의 중앙을 차지하고 빛을 발하고 있으며 法衣는 通絹으로 유려하게 흘러내린다. 가운데 아미타불의 머리에는 정상계주와 중앙계주가 함께 있으며 나발이다. 왼손은 반쯤 들어 올려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아래로 내린 阿彌陀九品印이다. 협시불인 觀音菩薩과 大勢至菩薩은 화려한 化佛과 寶甁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관음보살은 양손으로 연꽃줄기를 쥐고 있으며 대세지보살은 연꽃을 왼손 위에 올려놓고 있다. 삼존불의 圖上은 전체적으로 둔중하면서도 늘씬하게 뻗어 균형감이 있다. 목에는 三道가 있으며 갸름하고 볼이 통통한 얼굴과 약간 올라간 눈고리가 근엄함을 잃지 않고 있다(사진⑪).

왼쪽불감은 높고 화려한 팔각의 대좌위에 앉아있는 아미타좌불을 중심으로 온화한 모습으로 합장하고 있는 阿難과 迦葉이 양옆으로 배치돼 있다. 불상의 頭光과 身光은 불꽃장식과 연주문, 당초문이 화려하며 빛을 발하고 있다. 불상의 머리에는 중앙계주만 있으며 나발이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阿彌陀手印으로 오른손은 가슴부위에 세우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가부좌위에 올려놓았다. 가슴부위에는 卍 자를 새겼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법의는 佛身의 균형을 조화롭게 표현하고 있다(사진⑫).
이 목조아미타판불감은 편리성이 강조되고 圖上이 양식화된 조선말기의 작품이지만 9가지색의 石彩와 金彩까지 겸비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극도의 혼란기였던 조선 말기에 오로지 나라의 뿌리인 백성의 평안과 왕조의 안녕을 바라는 念과 함께 사라져가는 예술혼이 담겨지고 안타까움 마저 깃들은 마지막 유물이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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