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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점은 하나와 둘의 변증법"
"출발점은 하나와 둘의 변증법"
  • 박영균 건국대 대학원 통일인문학과 HK교수·철학
  • 승인 2016.10.1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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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2.통일인문학의 통일철학
▲ 1991년 12월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의 대표자들이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고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

일인문학은 사람다움의 가치에 기초하고 있는 통일 또는 남과 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통일을 만들어가는 ‘통일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국 학계에서 분단-통일 그 자체를 철학적인 사유 대상으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다. 이것은 분단-통일 문제를 남북의 두 국가 체제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라고 믿는 통념이 학계를 지배해왔으며 텍스트 그 자체를 추상화하고 이를 하나의 정전(canon)으로 만드는 인문학의 정전화가 만연돼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은 ‘사유(Denken)의 學’이다. 철학의 알곡은 ‘사유함’이다. 하지만 ‘사유’는 어떤 문제를 의식적으로 초점화하지 않으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특정 문제를 주제화하는 것이 바로 ‘물음’이다. 하지만 그 ‘물음’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화와 분열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내게 주는 ‘긴장’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가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는 철학이 과연 이와 같은 철학인가?’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매우 다기한 사람들의 사유를 담고 있는 텍스트를 읽고 토론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던져져 있는 ‘물음들’로부터 출발해 읽고 토론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통일인문학의 통일철학은 철학의 세속성(worldiness), 비판적 정신, 그리고 실천적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나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화와 분열, 그리고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대표적인 문제 중 하나가 바로 한반도의 ‘분단-통일’에 관한 물음이다. 한반도의 분단 문제는 두 국가 간의 체제경쟁이라는 정치적 문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분단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생활 속에 존재한다. 남과 북의 대립이 상호 국가주의적 일체화를 만들어내고 남북 내적으로는 인권에 대한 포기와 남남갈등과 같은 사회적 갈등을 부추긴다.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일본 대 중국-러시아라는 4대 열강의 맞붙은 대립의 축이자 동북아시아의 냉전적 질서를 재생산하는 핵심 고리였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탈냉전’을 말하고 민족주의적 편협성을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서냉전체제의 와해된 오늘날 동북아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미/중간의 ‘신냉전’은 한반도의 분단을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분단 극복의 문제는 단지 민족사적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의 냉전을 해체하고 세계 평화를 만들어가는 보편적 문제로,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분단-통일이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면 ‘분단-통일’이라는 개념은 과거와 같은 ‘통일’의 의미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철학에서 일상 언어는 비판적 사유의 대상이 된다. 왜냐 하면 일상 언어가 가진 의미가 그것을 사유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선입견과 편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통일 또한 그러하다. 일상 언어에서 통일은 ‘하나로 만듦’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통일의 영문표기 ‘unification’은 ‘uni(하나)+fic(만들다)’+‘ation(명사형 접미사)’으로, 말 그대로 ‘하나로 만듦’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한자어 표기 ‘統一’, 또한 ‘하나 또는 ‘한 줄기로 합쳐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상 언어가 생산하는 통일의 의미는 언제나 ‘하나’로 향하는 동일성의 패러다임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identity’는 동일성이면서도 정체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일성의 패러다임에서 민족정체성은 곧 민족동일성이다. 1972년 남과 북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7·4남북공동성명’에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전제 하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후 남북은 서로 간의 체제경쟁을 강화하면서 남은 유신체제로, 북은 유일체제로, 상호 국가주의적 일체화를 추구했다. 그것은 통일을 말하면서 오히려 상호 대결을 부추겨 분단을 강화하는 분단국가주의를 생산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민족’, ‘하나됨’이라는 동일성의 패러다임은 통일철학의 존재론적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부터 남북이 서로 체제경쟁을 벌리면서 대화를 단절한 지 19년이 흐른 1991년 9월 남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며 그해 12월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기본적으로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원칙 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7·4남북공동성명’처럼 통일을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민족’이라는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과정’은 그것을 만드는 ‘둘’을 전제한다. 즉, ‘7·4남북공동성명’은 ‘하나의 철학’이라면 <남북기본합의서>는 ‘둘의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의 철학’은 이미 전제가 되는 ‘하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단일민족의 신화’와 ‘순수한 민족문화’를 전제하면서 상대가 가지고 있는 ‘차이’를 ‘이질성(heterogeneity)’으로, ‘변질(deterioration)’로 단죄하면서 배제와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다. 반면 ‘둘의 철학’은 ‘하나’가 아니라 ‘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상대가 가지고 있는 차이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차이’를 서로 나눔으로써 ‘하나’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와 둘의 변증법’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인문학의 통일철학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의 둘의 변증법’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나와 둘의 변증법은 양쪽의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 남북을 하나로 만들려는 ‘민족적 동일화의 욕망’은 통일을 만들어가는 생성의 힘이지만 역으로 타자를 배제하는 폭력을 생산하는 힘이기도 하다. 반면 하나가 되려는 민족적 동일화의 욕망을 부정하는 ‘탈민족’ 또는 통일 지향 없는 ‘탈분단’은 남북의 차이를 승인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갈 수는 있지만 남북관계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 즉 둘이면서 하나가 되려는 관계라는 점을 부정함으로써 양자의 관계를 해칠 수도 있다.

남남의 관계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다. 여기서의 ‘둘’의 차이에는 오늘날 서구철학에서 유행하고 있는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관용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태도가 관철되며 이 경우, ‘둘’은 ‘둘’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둘은 ‘하나’가 되고자 하기 때문에 ‘둘’은 ‘둘’로 남아 있을 수 없고 서로에 대한 무관심을 남남의 관계처럼 ‘쿨’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남북은 서로에게 작동하는 ‘초과하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타자’가 가지고 있는 ‘타자성(otherness)’을 생성의 힘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하나’가 아니라 ‘하나됨’을 만들어내는 통일은 ‘둘’이라는 현실에서 출발하며 그렇게 됐을 때, ‘타자의 타자성’은 억압되지 않으며 ‘둘’은 통일 지향의 소통적 관계로 전화될 수 있다. 소통은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양자 사이에서는 그 전에 없었던, 두 국가의 체제경쟁을 넘어선, 새로운 것이 생성될 수 있다. ‘6·15공동선언’은 남북 소통 속에서 연합제와 연방제 사이에서 ‘공통성’을 만들어낸 사례라고 한다면 ‘10·4선언’은 남북 ‘둘’의 평화적 ‘공존(co-existence)’을 기반으로 ‘상생(win-win)’의 길을 모색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나와 둘의 변증법’은 남북이 ‘둘’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소통을 통해서 ‘하나’를 만들어가는 ‘통일-되기(unification-becoming)’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통일’은 ‘동질성 회복’과 같이 전통이나 원형과 같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재 남과 북이 가지고 있는 차이를 나눔으로써 ‘생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생성되는 것은 ‘민족적 공통성’이다. ‘공통성(commonality)’은 common, 즉 ‘두 개의 몸(body)’이 부딪혀 그 사이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미래를 생성시키는 남과 북이라는 ‘두 주체의 소통과 협력’이며 ‘둘의 차이와 다름’을 ‘공통성’의 생산적 힘으로 바꿔 가는 것이다.

 

박영균 건국대 대학원 통일인문학과 HK교수·철학

건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에는『통일인문학: 인문학으로 분단의 장벽을 넘다』(공저),『 분단극복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공저) 등이 있으며, 논문은「‘포스트 통일’과 민족적 연대의 원칙」,「 분단의 아비투스에 관한 철학적 성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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