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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예바른 사회’는 가능한가?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예바른 사회’는 가능한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10.05 1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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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_ 29강.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정직, 자존감, 명예의식’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9월의 마지막 강연은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정직, 자존감, 명예의식’이었다. 9월 24일(토)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유 교수는 문학작품을 내세워, 실현하기 어려운 ‘유토피아’가 아닌 실현 가능한 ‘무던한 사회’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사회에서의 시민적 덕목을 강조했다. 강연 제목에 드러나 있듯 그것은 ‘정직, 자존감, 명예의식’과 같은 덕목이다. 문화융성위원회 인문정신문화 특별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한 이 원로 문학평론가는 과연 어떤 행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을까?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정직에 대하여
우리 사회의 병리는 여러 층위에서 여러 형태로 발견된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가장 거부감을 주는 것은 거짓말의 난무와 정직성이나 염결성의 결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극히 한정된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가장 민망한 것은 전기나 회고록 같은 자전적인 책에서 발견되는 거의 명명백백한 허위진술이나 사실 왜곡이다. 특히 정치인이나 정치 지향의 인물들이 내는 책에서는 그런 성향이 심하다.


정치에 관여하는 인간 즉 수단으로서의 권력의 폭력성에 관계를 가진 자는 악마의 힘과 계약하는 것임을 간파하지 못하는 인간은 정치의 기본도 모르는 미숙아라는 막스 베버의 말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치인도 사람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악마의 도제와 괴물만이 정치에 관여해 정치행위가 괴물들의 사물놀이가 된다면 그것은 민주 사회의 악몽이요 그 희화일 것이다.
멀쩡한 사람이 정치에 투신한 뒤 괴물로 변신한다면 그런 정치는 제도적 전복과 정비가 필요하다. 아돌프 히틀러를 선택 배출한 것도 그 나라의 시민이요 바츨라프 하벨을 선택 배출한 것도 그 나라의 시민이었다. 만약 우리의 정치인 다대수가 괴물이라면 그것은 국민 다대수가 괴물을 사모하고 그 동호인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만의 잔치라고 비판하기 전에 시민으로서의 의무태만도 반성해 보는 것이 정직한 일이 된다. 괴물의 탄생을 국민이 방조했다는 사실이 왕왕 치지도외되는 것은 민주정치의 역설일 것이다.


훼손된 자존감과 명예    
그리스 비극은 대개의 경우 처참한 죽음을 수반한다. 소포클레스의 최초의 작품이라고 거의 공인돼 있는  『아이아스』에서는 자살이 다뤄진다. 아킬레스 갑옷의 귀속자로 오디세우스가 선정된 것에 아이아스가 격분하는 것은 모욕 받고 자존심과 명예가 손상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 사악하고 막힘없는 악당, 아/제우스여, 나의 아버지들의 아버지여,/나로 하여금 저 여우를 죽이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거만하게 구는 두 형제 왕들도/죽이고 스스로 목숨 끊게 하소서.”


아이아스에게 중요한 건 아킬레스의 갑옷과 무기가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사회적 인정과 경의, 명예 그리고 그리스 진영에서의 신분이다. 당연히 자기 것이어야 할 것이 다른 사람 아닌 평소 증오하는 모사꾼 악당에게 갔다는 것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예의 반대는 모욕이요 수모다. 수많은 무공과 전과가 모욕을 받게 된 것이다. 그가 아트레우스의 아들인 아가멤논과 메네라우스와 오디세우스에게 살의를 느끼는 것은 상처받은 자존감의 격렬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당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가축의 도륙으로 끝난 자기의 광란의 사태를 깨닫고 자살을 결의한다.


그리스 문학에서 귀족적 관점은 아킬레스적인 것으로서 전투적 관대함, 명예의 엄격한 기준, 시민적 명예의 고집, 세계에 대한 경의의 이상으로서 이 모든 것이 경기자의 금욕주의와 육체미 그리고 흔하디흔한 지적 한계와 결합된 것이었다. 민주적 관점은 오디세우스적인 것으로서 다방면의 재능, 적응능력, 외교적 역량, 지적 호기심, 영광에의 희생이 아니라 영광과 결합된 성공을 고집하는 것이 그 이상이었다고 부연하고 있다. 명예의 이상에 충실하려고 한 아이아스는 사실상 귀족적 관점에 시종했으며 결국은 민주적 관점의 오디세우스에게 패배하게 되는데 그것은 시대발전의 추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 후기에 아이아스가 시종 웃음꺼리가 되는 것은 그가 명예란 귀족적 이상에 과도하게 집착한 것과 관련될 것이다. 어쨌건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에서 우리는 명예가 소중한 인간가치이며 그 반대인 자존감의 손상 혹은 수모가 얼마나 큰 타격이 되는가의 고전적 사례를 본다.
                   
명예와 존엄                  
현대인이 모욕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둔감해졌다는 사실은 가령 모욕에 대한 대응이었던 결투가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 불법화되고 결투중의 사망이 의도적 살인으로 취급돼 사실상 사라졌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결투재판이 프랑스에서 폐지된 것은 16세기 중반인데 결투는 부분적으로 이를 대체한 것이다. 결투의 목적은 반드시 상대방의 살해를 노린 것은 아니었고 규정된 수의 탄환을 발사한 후 혹은 피를 본 후엔 끝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투가 분별없고 불합리한 것임이 공인된 후에도 귀족과 장교들 사이에선 오랫동안 결투의 관습이 남아있었고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는 학생 결투가 부활되기도 했다. 러시아의 푸시킨이나 미국의 알렉산더 해밀턴처럼 결투로 사망한 역사적 사례가 있기는 하다. 문학작품에서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체호프의 『결투』에서처럼 결투는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마의 산』에서 논쟁 중의 사소한 문제로 세템브리니를 결투로 몰아놓은 나프타는 상대방이 허공에 권총을 발사하자 머리에 총을 쏘고 자살하고 만다.


명예관념이 쇠퇴한 것은 새로운 윤리관이 대두했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인용한 사회학자들을 따르면 현대인의 의식 속에서 명예관념을 대체한 것은 존엄성이다. 존엄이 명예를 대체했다는 것은 그 만큼 사회에서 신분적 차이를 넘어서 평등의식이 보편화돼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유념해야할 것은 그 자체로서 갖는 의미보다도 명예와 존엄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혹은 교환되고 혹은 훼손된다는 점이다. 명예와 존엄의 유지를 위해서는 자기완성이라는 자기 부과적 목표 말고도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권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예도 존엄도 그 위에서 잠을 자서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완성 또는 시민적 덕목에의 향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잊어서는 안 될 사안이라 생각된다.

예바른 사회와 문명화된 사회
이스라엘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이 제기하는 실제적 성찰은 우리에게 유효한 참조틀이 되어준다. 아비샤이 마갈릿이 『예바른 사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삶에서 명예와 모욕 또는 수모가 중심적 위치에 있고 따라서 정치적 사고에서도 명예와 모욕 개념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 이래로 정치철학은 공정한 사회의 문제를 다뤄왔지만 무던한 사회의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주로 모욕주기가 없다는 의미에서 예바름의 추구는 정의의 이상 추구에 우선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예바른 사회는 그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다. 그는 예바른 사회와 문명화된 사회를 구분한다. 문명화된 사회란 그 구성원이 서로를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다. 한편 예바른 사회는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다.


그의 책에서 핵심 개념인 모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의 자존감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를 구성하는 행동이나 조건을 말한다. 이것은 심리적인 모욕 혹은 수모가 아니라 규범적인 모욕이다. 규범적인 모욕은 모욕당했다고 느낄만한 정당한 이유를 제공받은 사람이 실제로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편 심리적인 모욕은 모욕감을 느끼는 사람이 그럴만한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타인의 행동의 결과로 모욕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들이다.


모욕 주기는 존엄에 대한 중대한 침범이요 침해다. 바꿔 말해서 그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의 결여요 배려의 결여다. 우리는 정치의 현장이나 소견 발표의 현장에서 공공연하고 의도적인 모욕 현상을 빈번히 목도한다. 또 길거리나 대중교통의 현장에서도 사소한 사안으로 교환되는 모욕 교환을 빈번히 목도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예바른 사회’가 아닌 것은 우리의 정치전통이나 고속근대화 과정을 생각할 때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실현은 장구한 변혁적 노력을 통해서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구성원 상호간의 모욕 행위가 일상화돼 있다는 점에서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구성원 상호간의 상호배려와 존중의 풍토를 성취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관계도 윤리도 분명히 진화한다는 함의의 역사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자존감과 명예를 지키는 일은 타인에 대한 존엄을 지켜주는 일과 별개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타자의 존엄을 지켜주고 자아의 명예를 지키는 ‘문명화된 사회’가 마갈릿이 토로하듯이 ‘공정한 사회’나 정의사회보다 한결 실현이 용이한 사회인가 하는 것은 계량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예바른 사회’는커녕 ‘문명화된 사회’도 우리에게는 아득하게 먼 사회라는 인식은 우리 모두의 것이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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