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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어지간히, 완벽하지 않게 좀 남기자!”
“적당히, 어지간히, 완벽하지 않게 좀 남기자!”
  • 교수신문
  • 승인 2016.10.0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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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남김의 미학: 한국적 지혜와 미학의 탐구』 이남호 지음|현대문학|392쪽|16,800원

적당히 하고, 어지간히 하고, 완벽에 매달리지 않고, 다하지 않고, 남기는 것은, 지금까지 잘 주목받지 못했지만, 한국문화의 주요한 특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언제부터 우리가 ‘끝장’과 ‘막장’에 이렇게 익숙해지고 ‘완전’의 신화에 갇히게 됐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전통적인 삶과 문화는 결코 ‘끝장’과 ‘막장’과 ‘완전’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끝장내는 것보다 적당히 하는 것에 익숙했으며, 다하는 것보다 남기는 것에 익숙했으며, 완전한 것보다 모자라는 것에 익숙했던 것 같다. 적당히 하고, 어지간히 하고, 완벽에 매달리지 않고, 다하지 않고, 남기는 것은, 지금까지 잘 주목받지 못했지만, 한국 문화의 주요한 특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오래 문화와 역사에는 다양한 가치와 미학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특히 주목하고 溫故而知新해야 할 것은 ‘남김의 미학’이 아닐까 한다. ‘남김의 미학’이 물론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미덕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서 매우 흥미롭게 실천되고 적극적으로 탐구된 미학이요 따라서 우리 전통문화의 대표적 미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가령 우리의 이야기 전통 속에는 철저한 복수극이 거의 없다. 복수를 하더라도 원수를 철저히 갚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잘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에 초점이 있다. 우리 옛이야기 가운데 철저한 악인도 찾기 힘들다. 비교적 잘 알려진 나쁜 사람은 『춘향전』에 나오는 변학도나 『흥보전』에 나오는 놀보 같은 인물이다. 이들은 나쁜 짓을 하기는 하나 ‘끝장’에 이르지 않는다. 『춘향전』의 결말은 이몽룡과 춘향이가 결혼해서 잘 사는 것일 뿐 변학도가 어떻게 됐는가에는 관심이 없다. 아마도 변학도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갔을 것이다. 『흥보전』의 결말은 흥보가 잘살게 되고 놀보가 벌을 받고 거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흥보전』의 판본에서 놀보는 흥보의 도움으로 다시 잘살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러한 한국의 옛이야기들의 결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원수를 죽이고 자기의 삶도 끝장이 나는 일본 소설들의 결말과는 사뭇 다르다.

적당히 하고 남기려는 태도는 이러한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에서 발견된다. 아랫사람들을 위해서 음식을 남기며, 날짐승들을 위해 까치밥을 남기고, 잔치를 하고 나면 들짐승이나 길짐승을 위해서 음식을 밖에다 내놓기도 한다. 그림을 그릴 때도 꼼꼼하게 모든 것을 다 그리기보다는 그리다 만 것처럼 대충 그린 부분들이 많다. 집을 지을 때도 나무나 돌을 철저하고 반듯하게 다듬어서 사용하기보다는 자연적인 모습을 그대로 남겨둔 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정원이라는 것도 삶의 공간 한쪽 곁에 자연을 남겨두는 것이지 인공적인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한옥에서 삐뚤삐뚤한 기둥이나 들보는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춧돌도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그대로 남겨 쓸 때가 많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자기에도 어느 구석에서는 무심과 장난기를 남겨두는 여유가 있다.
 

남기는 것은 여유 있고, 아름답다. 우리는 그동안 다하는 것만 존중했지 남기는 것은 존중하지 않았다. ‘남김’은 ‘끝장과 막장과 완전’에 의해 무시당하고 업신여겨졌다. 이제 많이, 자주 남기자. 자식 사랑도 모든 것을 다 바치지 말고 좀 나미고, 할 말도 다 하지 말고 좀 남기고, 미움도 남기고, 욕심도 다 추구하지 말고 남기자. 그린벨트도 남기고, 빈 땅도 다 개발하지 말고 좀 남기고, 1등만 다 갖지 말고 2등뿐만 아니라 꼴찌를 위해서도 좀 남기자. 편리함만 추구하지 말고 불편함도 조금 남겨두고, 오래된 것들은 누추해도 남겨두자. 화도 다 내지 말고 남기고, 욕도 다 하지 말고 남기고, 몸에 아픈 곳도 조금은 남겨두자. 늘 모든 일을 다 잘하지 말고 조금 못하는 일도 남기고, 맛있는 음식도 다 먹지 말고 좀 남기고, 술도 취하도록 먹지 말고 좀 남기자.

■ 저자 이남호 고려대 교수(국어교육과)는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돼 문학평론가로 오래 활동해왔다. 『한심한 영혼아』, 『문학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등의 평론집을 비롯 많은 책을 썼다. <현대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남김의 미학』은 한 문학평론가가 한국전통문화의 깊은 곳을 응시하고, 새롭게 읽어낸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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