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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자료 확보, 독창적 연구로 축적된 역사가 세계적 연구소 만든다
원천자료 확보, 독창적 연구로 축적된 역사가 세계적 연구소 만든다
  • 윤상민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6.09.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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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그레이드 코리아, 인문학에서 희망을_ ② 더 큰 인문학의 무대, 세계적 연구소의 꿈

 

연구자의 치열한 내적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발신되는 담론과 지속가능한 시스템의 지원이 담보될 때, 우리는 세계적인 인문학연구소의 탄생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인문학자들이 반신반의하는, 그러나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는 ‘인문학진흥법’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교수신문>은 앞서‘인문학진흥법’ 8월 공표를 앞두고 기획시리즈 ‘인문진흥법에 바란다’를 마련, 문사철 분야 교수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 기획에 이어 새롭게, ‘인문학진흥법’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 짚어야 할 현안들, 그리고 이 법안의 궁극적 지향점 등을 진단하는 ‘업그레이드 코리아, 인문학에서 희망을’ 시리즈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차례
1.무너지는 인문학 기반, 그리고 박사들의 운명

2.더 큰 인문학의 무대: 세계적 연구소의 꿈
3.인문학이 만드는 업그레이드 코리아
4.좌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 일러스트 돈기성

세계적 연구소를 육성해야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나 정부에서도 이미 오래된 논의다.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의 주도로 시작된 인문한국(HK)사업으로 세계적 연구소 육성 계획이 가시화됐다. 대학 연구소의 연구기반 구축 및 연구역량 강화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인문학 연구소를 육성한다는 취지였다. 65개 과제가 선정됐고, 과제와 단계평가에서 탈락한 지원 중단 과제를 포함하면 현재 40여 개의 연구소가 활동하고 있다. 올해로 10년. 4천억 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된 인문한국사업을 통해 지원받은 중대형 인문학연구소들은 과연 세계적 연구소로 발돋움하고 있는가? 대답하기가 여전히 어렵다. 국내 대학들이 앞 다퉈 정부의 재정지원사업에 목을 매고 있는 실정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인문한국사업 역시 그 중의 하나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들려온다. 국내 대학의 세계적 연구소는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까.

연구소가 국가로부터 혹은 대학으로부터 연구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국가나 조직이 요구하는 필요성을 충족시킬 두 가지 의무가 있다. 하나는 국가와 사회의 업그레이드에 도움이 되는 의제와 담론을 생산하는 베이스캠프가 돼야하고, 다른 하나는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혹은 감당이 안 되는 기초 작업을 수행하는 토대 기관이 돼야 하는 것이다. 마치 조선시대의 집현전이나 규장각이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조선시대 저술 가운데 의미 있는 책들 대부분이 세종과 정조 시기에 이 두 곳에서 출판됐다는 사실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인문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연구소의 생명은 연구의 독창성과 고유성에 달려 있다. 그곳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세계가 그곳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연구의 고유성과 원천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원천 자료의 확보가 1차적이고, 연구 어젠다의 적정성과 연구 결과의 설득력이 다음이며, 연구 수행 능력이 그 뒤를 따르게 된다. 자료의 특수성에 확보되는 세계적인 연구가 가능한데, 라틴어와 한문의 자료들이 서로 직접 비교 가능한 혹은 대조해야 하는 동서 교류 및 비교 연구는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구 가운데 하나다. 전 세계가 연구의 고유함과 원천성을 찾아서 노력하기에 세계적인 연구소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결국은 틈새를 노려야 한다. 양궁처럼 말이다.

연구소의 특징은 자료의 발굴과 소통과 확산을 얼마나 잘 하는가로도 평가할 수 있다. 한국인문학의 경우 이를 위한 핵심적인 요건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현대화와 보편화와 표준화를 주도하고 수행하는 연구소가 필수적이다. 세계화로 가는 첫 관문은 바로 표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보편의 해석틀을 갖춰야 하고, 결국은 당대의 현장에 그 연구 결과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물 안 ‘황소’개구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한 연구자의 지적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지점이다.
세계적 연구소의 또 다른 기본적 특징은 그 연구소가 가진 연구물의 축적 역사와 전통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역사는 연구의 축적을 통해서 기록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국내 기존 연구는 축적의 전통이 약한 편이다. 연구들이 대개는 실적용으로 쓰이다보니 지원이 있을 때만 잠시 논의되다가 지원이 끝나면 산발적으로 흩어진다. 후속연구를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런 면에서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Le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이하 CNRS)는 연구 축적에 있어 참고할만한 사례다. 한국연구재단을 설립할 때 CNRS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정부의 예산지원 대행기관 수준으로 전락한 한국연구재단과 CNRS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파리의 세느강을 사이에 두고 루브르 박물관과 마주하고 있는 황금빛 돔을 가진 건물이 CNRS다. 2015년 기준 3만1천944명의 연구자, 엔지니어, 학자들이 소속돼 있고, 매년 600명 정도의 신규 연구자를 채용하고 있는 CNRS는 정부지원금 25억 유로를 포함해 한 해 33억 유로를 예산으로 집행하고 있다. ‘지식을 생산해 사회에 환원한다’는 모토를 갖고 있는 CNRS에는 20명의 노벨상 수상자, 12명의 필즈상 수상자 등 쟁쟁한 연구자들이 포진해 있고, 오랜 역사로 축적된 지식들은 1천100개에 달하는 프랑스 내 연구단체와 교류하며 지금도 새로운 연구 성과의 역사를 쓰고 있다. 축적된 연구로 인해 1999년 이후 1천26개의 혁신 기업이 탄생했고, 브뤼셀, 뉴델리, 리오데자네이루 등 세계 각지에서 4천600명의 외국인 연구자가 CNRS를 매년 방문해 연구를 진행한다.

세계적 연구소의 특징 중 하나는 네트워킹이 연구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대만의 sinica academia는 국제적인 관계망이 아주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네트워킹이 된 연구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를 매개하는 것이 학회지인데 그런 학회지가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출판되는 단행본 시리즈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과학문명학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신동원 전북대 교수(과학학과)는 네트워킹이 잘 된 해외 연구소로 캠브리지대의 니덤연구소를 꼽는다. 동아시아 과학사, 중국과학사 연구자들에게는 꼭 방문해야할 허브연구소인 니덤연구소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컬렉션으로도 유명하다. 중국학, 일본학, 한국학 장서로 먼저 알려진 니덤연구소가 세계적 연구소로 발돋움하게 된 데에는 연구자들의 네트워킹이 큰 역할을 했다. 짧게는 2~3주, 길게는 1년 이상 방문하는 연구자들을 위해 매주 열리는 세미나에는 앤드류 로이드 같은 그리스 사상가, 중국사상사를 연구하는 마이클 로이 같은 대가들이 참석해 관련 주제에 대해 격의 없는 토론을 나눈다. 90년대 중반에 시작한 이 세미나는 방학 기간을 제외하고 25년 간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신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세미나에 1년간 참여하면서 융합적인 사고를 배웠다. 주제가 넓고 다양해도 공통점은 자료읽기에서 시작된다. 사료에 근거해 토론을 하니 주제가 넓어도 집중이 된다. 내가 동의보감의 한 구절을 발표하면 일본 연구자와 중국 연구자들이 한자 읽기 방식의 다름부터 시작해 그들의 나라에서 관련된 의학 고서적의 자료로 토론한다. 바로바로 확인이 되는 거다. 미국의 연구소들이 코스웍을 통해서 가르쳐준다면 니덤 연구소의 세미나는 단편적인 지식 같지만 그걸 모아 토론하며 지평을 넓히게 한다.” 상임연구원들이 별도로 기획하는 세미나도 많다. 주제에 따라 각국의 신진·중견학자들이 모인다. 하지만 각국의 방문연구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 니덤 연구소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다면 세계적 연구소가 뿌리내리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 단연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이 선결돼야 할 것이다. 연구자들이 다른 곳으로 다른 이유로 떠나지 않도록 연구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결정적이란 이야기다. 연구의 기본 인프라가 제공될 때 세계적 연구소가 가능하다. ‘개념사’ 총서를 만들고 있는 한림대 한림과학원(원장 김용구)의 이경구 부원장은 “학제간 연구로 시작해 개념사 총서를 만들며 연구를 10년 쯤 해보니 이제 뭔가 길이 보이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인문한국사업의 성과와 더불어 아쉬움을 이렇게 토로한다. “중국의 연구소와 연계해 새로운 총서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고, 지금까지 생산해낸 총서들을 해외 유명 출판사와 공동출간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개념사 연구를 진행하는 신진학자들도 생겨났다. 그런데 포스트 인문한국사업의 논의가 지지부진하고 방향성 재설정 요구도 있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면서는 사회확산 항목에 예산을 쓰라는 압박도 많다. 물론 시민강좌는 해야 하는 일이지만 세계적 연구소로 가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시점에 연구자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속적 지원을 해야하지 않을까? 세계적 연구소는 10년 만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적 연구소를 위한 제언에는 한글의 세계화가 필수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학)는 “한글은 아직 거의 처녀언어다. 한글의 학술어·문화어 만들기가 선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좋은 고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주해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반대로 한글 자료를 국제화하는 일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국학 자료도 지금의 한글로 다음어지고 옮겨질 때 이해 가능하고 문화의 자산으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틴어로부터 독립할 때 불어와 독일어가 그랬다. 우리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에서 말의 독립이 간절한 나라다”라고 지적한다.

국내 연구자들이 CNRS 혹은 막스프랑크 혹은 하버드의 옌칭을 방문하는 이유들은 이들이 앞서 언급한 인문학의 특성에 집중한 연구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대학이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기관이라면, 교육의 부담 때문에 혹은 개인적으로 차원에서 접근하기 어렵거나 부담하기 어려운 기초 연구는 연구소가 도맡아야 한다. 그게 효율적이며 시대적으로도 요청되는 분업일 것이다.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 인문학 연구소가 세계적인 연구소로 나갈 때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다. 이점에서 세계적 수준의 인문학 연구소는 엄밀하게 말하면 기업, 정당, 국가의 씽크탱크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당장의 필요에 답하지 않고 백년 혹은 천년의 자산을 만들고 찾아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 사례는 역사 속의 집현전이다. 지금도 『악학궤범』은 중요한 지침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식민지, 분단, 전쟁,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모두 경험했고, 문화유산의 DNA도 보존한 사회인데 왜 우리는 세계적 담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앞서 지적한 시스템의 불안정성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학자들이 자기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의식의 이중성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미 우리의 몸과 의식은 가장 첨예한 세계사의 최전선에 서 있는데, 보편담론 창출로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연구자들. 자신의 연구 뿐 아니라 다른 연구자에게도 자극을 주거나, 그걸 넘어서서 문제의식의 공감대를 확대할 수는 없을까? 연구자의 치열한 내적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발신되는 담론과 지속가능한 시스템의 지원이 담보될 때, 우리는 세계적 인문학 연구소의 탄생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윤상민 학술객원기자 cinemonde@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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