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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모던’에 기반 둔 조선 모던의 영향, 설명할 수 있을까?
‘소프트 모던’에 기반 둔 조선 모던의 영향, 설명할 수 있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9.28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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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아산서평모임이 주목한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개발 체제의 기원』 (한석정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6)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 2층, 오후 18시 30분부터 제10회 아산서평모임이 시작됐다. 아산서평모임이 9월에 주목한 책은 한석정 동아대 교수의 『만주 모던: 60년개 한국개발 체제의 기원』(문학과지성사, 2016)이다. 이 책은 <교수신문> 829호(2016.5.2.) ‘책을 말하다’에서 저자에 의해 직접 소개된 바 있다. 이날 서평 토론자는 류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와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조교수(사회학)였다. 류석춘 교수는 토론문 「우리에게 만주란?」을 준비해와 식민지근대화 문제, 젠더 문제, 만주에 관한 원자료 문제와 만주 주민의 국적문제 등을 조목조목 짚었다. 그의 독법은 전체 구성의 문제의식을 겨냥하기보다 논평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의 조합으로 진행됐다. 반면, 윤해동 교수는 토론문 「‘만주 모던’ 혹은 ‘조선 모던’: 식민주의와 근대의 관계 읽기」를 통해 ‘만주 모던’의 전체적인 서술을 따지면서 ‘만주 모던’의 두 가지 측면을 좀 더 문제삼는 섬세함을 발휘했다. 이날 윤 교수의 서평 토론문 일부를 발췌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사진제공=아산정책연구원

1930~40년대 만주와 1960년대 한국은 중첩적인 국면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논의(450쪽)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언뜻 보면, 한때 일본에서 제기돼 유행한 적인 있던 ‘1940년체제론’과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野口悠紀雄, 『1940年體制』. 성재상 옮김, 『여전히 전시경제하에 있는 일본의 경제구조』, 비봉출판사, 1996). 과연 일본에서 제기된 ‘낡은 문제의식’을 새롭게 해석하고 포장한 것인가.
과연 만주 모던이 1960년대 한국의 개발체제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 혹은 국가형성의 기원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1/3 이상의 기여를 했다고 봐야 할까. 오히려 저자의 개념규정방식을 빌려, 식민국가 조선의 모던 곧 ‘조선 모던’이라는 것을 설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만주 모던이 아니라 조선 모던이 현대 한국에 미친 영향이 더 컸다고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선 저자는 재건제체의 형성과 관련해 식민지 조선은 ‘총력전체제’ 혹은(고바야시 히데오, 가스자가 묘사한) ‘징발 사회’ 아래 있지 않았다고 단언한다(168쪽). 그리고 다민족주의, 대규모 강제노동, 반인륜적 폭력(예컨대 731부대)도 부재했다고 부언한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저자도 강조하고 있듯이, 2차대전 시기의 동원시스템은 국가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총력전체제론’(야마노우치 야스시)에서는 미국 뉴딜체제 혹은 연합국의 동원체제와 나치즘, 일본의 파시즘 혹은 소련의 전체주의 사이의 동원체제가 유사성을 강하게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전후 복지국가 체제의 기원이 됐다고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총동원체제가 식민지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었던가 하는 문제는 논쟁적이다. 식민지에 강력한 동원체제가 구축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식민지 본국에서처럼 동원에 상응하는 ‘복지’를 제공할 수 있는 여력은 없었다. 복지제공이라는 일종의 ‘합의’가 형성되지 않은 식민지의 동원은 가혹한 것일 수밖에 없다. 과연 조선의 ‘전시동원체제’는 만주국의 동원과 어떻게 같고 달랐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이른바 ‘선만일여’ 혹은 ‘오족협화’에 대해 ‘내선일체’가 판정승을 거뒀다고 보아(117쪽) 만주국에서의 조선인 ‘이등공(국)민론’이 설득력이 있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만주국에서 조선인 화이트칼라 지식인들의 입지가 강해질 여지가 생겼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119~123쪽). 그러나 그것은 조선 내부에서의 변화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모던’이라는 것이 설명 가능한 개념이 될 수 있을까. 저자의 논의에 기반을 두고 살펴보자. 저자는 재건체제의 형성 및 국방국가의 수립과 관련한 구체적인 설명에서 만주와의 관련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려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일본의 근대 혹은 조선의 근대와 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만주 모던을 하드 모던과 소프트 모던의 두 측면으로 나눠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수 있겠다.

재건체제 혹은 한국판 국방국가를 지탱하는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는 이미 조선 내에서 경험한 것이었다. 예컨대, 유교적 교화의 경험은 식민지 전기간 동안 조선 내에서 강조됐던 것이었으며, 특히 향약 시행의 경험은 구체적으로 농촌진흥운동의 과정에서 변형-시행됐다. ‘가정의례준칙’이 정해져 강요됐으며, ‘신생활운동’은 1920년대 이후 주기적으로 되풀이됐다. ‘교육칙어’(1889)와 ‘황국신민서사’가 강요됐으며,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은 근검, 절약을 모토로 조선인의 계몽운동과 경쟁하고 있었으며, 모범부락도 청년단 운동도 모두 핵심적인 정책 혹은 경험을 이루는 것이었다. 저축운동 역시 만주에 못지않은 범위로 강요되고 있었다. 게다가 토지수용법과 도시계획법 역시 1920년대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또 조선 역시 식민지로서 제국의 실험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질소비료의 장진강, 부전강, 허천강 등에서의 조선수력전기 개발의 경험이 없었다면, 만주만이 아니라 일본의 수력발전 기술도 훨씬 지체됐을 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위생국가’ 혹은 ‘의료의 근대성’(340~349쪽)은 조선에서 만주로 들어간 것이 한국으로 전해진 것도 있겠으나, 고토 신페이를 통해 대만에서 확립된 의료 근대성은 조선으로 들어와서 정착해 있었으며 그것이 한국으로 이어지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위생경찰은 이미 1910년대부터 불량한 우물을 메우고, 쥐꼬리를 모으며, 파리에 상금을 걸고 있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속도전을 통해 보건위생 시스템이 조선에서 강력하게 구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총동원체기에는 예외 없이 ‘건민’ 형성을 통한 ‘强兵論’이나 라디오 체육 등을 통한‘連成論’ 등이 강조됐다. 그렇다면 소프트 모던에 기반을 둔 조선 모던이 해방후 한국의 국가형성에 미친 영향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만주 모던이라는 개념 규정의 방식에 대해서 사족 한 마디! 만주라는 지역 개념을 통해 통시적인 성격의 근대를 규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근대라는 시대규정보다는 ‘근대성’이라는 성격 규정이 지역 개념과 함께 사용하기에는 더 적합한 것이 아닐까. 시간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식민지의 경우에는 ‘식민지 근대’가 가능하겠으나, ‘조선 근대’는 좀 이상한 개념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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