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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를 반대했지만 조국 ‘독일’을 사랑한 세기의 망명객
‘나치’를 반대했지만 조국 ‘독일’을 사랑한 세기의 망명객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6.09.27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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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3. 하인리히 만: 독일적 삶 속의 지식인

이 세기의 노망명객은 1950년 3월 11일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었을 때 주머니 속에는 독일로 가는 배표가 들어있었다.
막 정권을 수립한 동독 쪽에서 초대 예술원원장으로 모신다며 보내준 돈으로
구입한 배표였다. 그의 나이 79세였다.

▲ 1930년대가 막 시작될 무렵의 하인리히 만, Photo by Lotte Jacobi ⓒThe Lotte Jacobi Collection / The University of New Hampshire

'리스본을 바라보는 내 시야에 항구가 들어왔다. 유럽이 남는다면, 이 광경은 마지막이 돼 있으리라. 형언할 수 없이 항구는 아름다웠다. 실연당한 연인도 이보다 아름답지 않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나의 것이었던 한 시대의 기쁨과 고통을 유럽에서 경험했다. 하지만 나 역시 나의 존재 앞에 놓인 다른 많은 것들과 연결돼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이 작별은 고통스러웠다.” 하인리히 만(1871~1950)이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을 출발해 미국을 향해 떠나는 배에 몸을 싣고 점점 멀어져가는 유럽의 마지막 풍경을 바라보며 떠나는 자의 회한을 읊은 자서전적 글이다.

1933년 조국 독일을 떠나 프랑스에서 수년간 망명생활을 했고, 이제 더 이상 그곳에도 머물 수 없게 되자 미국으로 망명지를 옮기는 순간이었다. 1940년 10월이었다. 독일에서 망명을 떠난 지 7년이 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1년이 지난 때였다. 히틀러 나치 독일군이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 진격해 ‘독일의 삶’ 공간을 유럽전역으로 팽창시켜나가자 망명객들은 서서히 물이 말라가는 웅덩이 속의 물고기신세가 돼 또다시 새로운 도피처를 찾아야만 했다. 1940년 5월 10일에 시작된 나치 독일의 프랑스침공은 6월 25일 콩피에뉴 휴전협정(1940)으로 일단락됐다.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항복한 것이다. 휴전협정에 따라 프랑스정부는 독일이 요구하는 망명객들을 나치독일 군정청에 인도해야만 했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자 나치 조력자들도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관청이 시키지 않더라도 스스로 망명객들을 찾아내어 신고하거나 게슈타포에게 넘기는 프랑스인들이 비일비재했다. 게슈타포에 체포된 유대인들은 유대인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프랑스는 이제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하인리히 만은 프랑스를 탈출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고, 스페인을 통과해 포르투갈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우여곡절 끝에 하인리히 만 부부는 1940년 10월 4일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한 것이다. 조카 골로 만, 작가 프란츠 붸르펠 부부도 동승했다. 하인리히 만의 나이 70세 때였다. 하인리히 만 부부를 실은 그리스 여객선 ‘네아 헬라스’호는 1940년 10월 13일 뉴욕에 입항했다. 항구에는 하인리히 만의 동생 토마스 만 부부가 마중을 나왔다. 망명객 형제는 망명지에서 만났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형제간의 만남은 기쁨, 그 자체였다. 토마스 만은 망명객으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다음 날 <뉴욕 타임스>는 ‘독일의 저명한 망명객 골로 만(1909-1994)이 그의 백부 하인리히 만과 함께 뉴욕 항에 도착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골로 만은 토마스 만의 6남매 중 셋째로, 아들로는 둘째였다. 후일 저명한 역사학 교수가 됐다.

하인리히 만을 뒤로 밀쳐내고 아직 크게 명성을 획득하지 못한 골로 만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하인리히 만이야말로 ‘적대 외국인(enemy aliens)’ 중 ‘적대 외국인’의 대표 격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그것보다도 오히려 몹시 얄밉고 괘씸한―한 사람을 깔아뭉개고 싶을 때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과 비교시켜 비열하게 깎아내리는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하인리히 만이 누군가! “데카당스와 도덕적 붕괴에 반대하고 가족과 국가의 번영과 풍습을 위하여! 나는 하인리히 만(……)의 저작물을 화염에 던진다!”라며 베를린 베벨광장에서 불태워진 대표적인 나치 반대파이었지 않던가! 하인리히 만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할 당시 현직 독일예술원 (정확히는 프로이센 예술원) 문학분과 원장이었고,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나치에 의해 원장직을 박탈당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운라트 교수 혹은 한 폭군의 종말』(1905), 『충복』 (1918) 등의 소설을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대표하는 독일의 작가였다.

▲ 프랑스 망명 시절 부인 넬리 만과 함께. 1938년.

하인리히 만은 단순히 저명한 작가정도가 아니었다. 정치 사회 참여를 통해 20세기 초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국가적 국민적 인물이었다. 초반부터 강렬한 민주주의 경향을 보이고,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그리고 나치에 반대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다. 어떠한 작가도 하인리히 만만큼 바이마르 공화국을 위해 그렇게 정열적으로 참여운동을 한 사람은 없다. 그는 문학을 통해 그리고 사회참여를 통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 창조와 보전을 위해 노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민주공화국이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국민의 나라였다. 하인리히 만의 모든 목적은 민주주의 수호였다. 그는 민주투사였고 민주주의자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작품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지는 불행한 결과로 이어졌다. 1932년에는 하인리히 만을 제국대통령 후보로 내세우자는 의견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 의견은 실행되지 않고, 힌덴부르크를 재선시키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투철한 민주주의자로 사회와 문화문물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지닌 하인리히 만을 독일인들은 ‘자유 독일정신’의 지주로 여겼다. 그렇게 하인리히 만은 독일 지성인의 대변인이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을 감안할 때 하인리히 만의 망명은 단순한 일개인의 망명이라기보다 어느 한 사회를 대변하는 지식인이 자신의 나라를 떠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표적인 작가가 독일을 떠난 상징적 망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傳記的으로 다시 한 번 점검해보자. 하인리히 만은 1871년 독일 북부의 유서 깊은 도시 뤼벡에서 태어나 1950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 모니카에서 생을 마감한 독일작가다. 토마스 만의 형이고, 평생 동생의 명성에 가려진 삶을 살았다. 국내에서는 몇 편의 작품이 번역되기는 했지만 독일문학 전문가를 제외하고 하인리히 만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논의의 대상이 되기는 커녕 작가의 이름자체도 생소해 한다. 그러나 20세기 독일문학사에서 하인리히 만은 빼놓고 지나갈 수 없는 중요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독일어권을 제외한 외국에서는 하인리히 만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독일인들에게 그리고 독일문학사에서 하인리히 만은 특히 중요한 작가로 여기고 있다.

이 기본적인 자료를 앞에 놓고 우리는 독일 출생과 미국에서의 사망, 1871년과 1950년, 20세기 독일문학사와 하인리히·토마스 만 형제, 두 형제와 20세기 독일사 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871년은 독일 황제제국이 탄생된 해이고, 하인리히 만이 세상을 떠난 1950년 3월 12일은 동독과 서독이 각각 정부를 수립하며 공식적으로 분단국가의 길에 접어든지 몇 달이 흐른 뒤였다. 독일 황제제국은 1871년 1월 1일 새로운 헌법 발효의 결과로 태어났다. 하인리히 만은 이해 3월 27일 탄생했다. 황제제국은 황제지배를 원칙으로 통일된 독일의 독일 국민국가였다. 그 다음에 등장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 최초의 의회민주주의 국가였다. 1918년 11월 9일 공화국 선포로 시작돼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를 제국 수상으로 임명하며 끝이 났다. 미국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망명지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이 되던 해에 태어나 분단이 되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둘째, 독일문학사에서 토마스 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20세기 최고의 작가다. 그렇다고 하인리히 만을 서열상 뒤로 미루기에는 문제가 있다. 두 형제는 비슷한 경향의 문학을 지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학관이 다를 뿐이었다. 토마스 만이 인생과 예술에 대해 고민했다면, 하인리히 만은 세상과 사회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하인리히 만을 애독하는 독자들은 하인리히 만을 20세기 전반기 최고의 작가로 숭배한다. 괴테와 쉴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갈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괴테류의 사람이 있고, 쉴러류의 사람이 있다. 칸트와 헤겔을 좋아하는 부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셋째, 동서독으로 분단된 국가에서 작가에 대한 수용문제가 있다. 문학과 정치, 문학과 사회가 어떠한 연관관계를 지니는지 하인리히·토마스 만 형제를 통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 1940년대 어느날, 산타모니카 집 앞에서의 하인리히 만. S¨uddeutsche Zeitung Photo / sz photo, courtey of Frido Mann

이러한 자료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인리히 만이 ‘독일적 삶’을 살고 간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황제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황제치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지적했고,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며 민주주의 공화국과 자유정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몸과 마음으로 느낀 사람이다. 그리고 독재국가에서 박해를 받고 망명을 떠났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내가 있는 곳이 [곧] 독일이다”라는 토마스 만의 유명한 구절을 되뇌어 본다. 토마스 만이나 하인리히 만은 정신이나 문화적으로 독일의 주인이었지만 나치 깡패들에 의해 ‘비 독일적’으로 낙인찍히며 주권을 강탈당하고 잠시 독일을 쫓겨난 사람들이다. 그들이 보기에 나치야 말로 ‘비 독일적’이었다. 그러기에 “내가 있는 곳이 [곧] 독일이다”라고 했고, 그들을 혹은 나치를 ‘다른 독일 (Das Andere Deutschland)’이라고 규정했다. ‘다른 독일’, 즉 ‘다스 안데레 도이치란트’는 원래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쿠르트 투홀스키, 에리히 케스트너, 하인리히 쉬트뢰벨, 베르톨트 야콥, 칼 메르텐스, 프리드리히 빌헬름 푀르스터 등이 발간한 공화주의와 평화주의를 표방한 신문 이름이었다. 1933년 3월 나치는 이 신문을 폐간시켰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이미 나치의 문제점을 미리 예견하고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적 삶’이 시작되는 1871년이라는 해는 독일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에서―보불전쟁이라고 표기되는―프로이센이 승리를 거두고 독일황제 제국이 탄생하며 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던 때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에게 굴욕적으로 전쟁에 패배하자 그 여파로 프랑스 민중들이 처음으로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La Commune de Paris)’을 탄생시켰다. 세계 최초로 노동자 계급의 자치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로 평가받는 파리 코뮌은 세계역사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책들을 실행에 옮겼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통일된 이탈리아는 로마를 수도로 공표한다. 일본은 이해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로 접어든다. 우리에게는 고종 8년 때다.
이 시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리는 이유는 독일 황제제국의 탄생을 시발로 독일의 근대국가가 ‘비스마르크 시대’, ‘황제시대’, ‘제1차 세계대전’,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 ‘히틀러 제3제국’,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 나치패망’, ‘연합군 군정시대’, ‘동·서독 정부수립’등으로 이어지는 독일적 삶속에서 하인리히 만이 어떠한 행동과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봤을까를 가시적으로 떠올리기 위함이다. 동시에 일본도 같은 시기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 근대국가로 접어들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의 역사, 우리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에서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생각으로 세상을 대처했을까를 반성해 보기 위함이다.

하인리히 만은 1905년에 발간된 소설 『운라트 교수 혹은 한 폭군의 종말』에서 황제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빌헬름황제 치하시대를 비판하며, 권위적인 교사와 개방적인 여배우를 등장시켜 시민사회의 실상 및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밝혀냈다. 또한 황제제국-3부작을 남기는데, 『충복』은 빌헬름 치하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의 민족주의적 권력구조를 풍자적으로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작품 이외에도 하인리히 만은 동생 토마스 만이 1915년 「전쟁에 대한 생각」을 통해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형제간의 연을 끊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는 독일의 많은 젊은이나 지식인들이 애국심에 불타 전장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던 시대였다. 오히려 하인리히 만의 주장이 이상하게 보이던 때였다. 하인리히 만은 사회민주주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반전주의, 평화주의 입장을 고수했다. 1917년 토마스 만의 부인이 형제간의 갈등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형제간의 화해는 1922년에 가서야 회복될 수 있었다.

하인리히 만은 1931년에 이미 나치가 집권하면 독일에서 거대한 ‘유혈의 장이 펼쳐질 것’이며 ‘거짓된 독일인들과 거짓된 사회주의자들의 제국’은 분명히 순리와 민주주의적인 방법이 아니라 무력과 유혈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인리히 만은 1933년 2월 21일 간단한 짐만을 챙겨들고 프랑스로 도주했다. 제국의회가 불타기 전이었고, 그의 작품이 베벨광장에서 분서를 당하기 이전이었다. 망명은 나치 독일에 대한 반파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1933년 8월 25일 나치로부터 국적을 박탈당했다. 첫 번째 국적박탈자 명단에 하인리히 만의 이름이 올라간 것이다. 이후에는 계속해서 무국적자 신분이었다. 프랑스 국적취득을 시도해 보았지만 프랑스 체류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남프랑스에 체류했다. 하인리히 만은 망명 중 다량의 글을 썼는데 그 중에는 반파쇼적인 글이 많았다.
프랑스로 망명하자 하인리히 만은 독일작가들의 반파쇼 저항운동을

주도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언론을 통해 나치 독일의 만행을 고발한다. 독일에서 발생한 분서사건 1주년을 기념해 1934년 5월 10일에는 파리에 ‘독일 자유도서관’을 건립한다. 1935년에는 국제작가회의에 독일 망명 작가 대표로 참가해 문화방어와 나치 위협을 주제로 개회사를 한다. 1936년에 결성된 ‘독일인민전선’에서는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한다. 1937년에는 반파쇼 독일망명문학의 상징적인 인물로 추대돼 노벨상 수상자후보로 추천하자는 운동을 받기도 한다.

창작활동도 활발하게 전념했다. 그 중에서 대표작인 『앙리4세』는 프랑스 왕 앙리4세에 관한 소설로 제1부 『앙리4세의 소년시절』은 1935년에, 제2부 『앙리4세의 완성』은 1938년에 발표한다. 앙리 4세는 프랑스의 주권을 위해 평생을 투쟁한 강하자 선한 왕으로 단순히 전제적인 지배자가 아니라, 탐욕과 위선, 학살과 범죄, 책략을 배제한 인본정신을 소유한 현대적이고 민족을 사랑한 왕으로 묘사된다. 독일이 독재자의 치하에 들어가자 현실을 반성하고 극복하기 위해 역사소설을 쓴 것이다.
미국으로 망명한 후의 하인리히 만은 정치 사회적 활동보다는 개인 생존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내가 미국을 아는 만큼 미국은 나를 모른다”라고 토로할 정도로 낯선 캘리포니아에서의 생활은 한 인간에게 망명객임을 절실히 느끼도록 만들었다. 미국에서 하인리히 만의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해 보려고 해도 실어주는 곳이 없었다. 동생 토마스 만은 프린스턴대의 교수가 돼 있었고,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독일의 저명한 망명객으로 루즈벨트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 사이였다. 형인 하인리히 만은 할리우드 ‘워너브라더스’ 영화사에 대본을 써주고 1주일에 100달러를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1년이 지나자 끝이었다.

▲ 만 형제들. 오른쪽이 형인 하인리히 만이고 그 옆이 동생 토마스 만. 1950년.

그 후로는 부인 넬리 만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을 유지 해야만 했다. 부인은 양장점 점원, 미싱공, 간호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동생이 매달 얼마씩 생활비를 보내왔다. 하인리히 만은 직업소개소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의자에서 기다렸다. 하인리히 만이 누구인가! 이를 보고 후일 어느 한 독문학자는 ‘독일의 치욕’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프랑스에서는 정열적으로 망명활동을 했다면, 이제 캘리포니아에서는 해변에 나가 ‘저 멀리 바다를 건너면 나의 조국 독일이 있겠지’라며 그리움을 달래는 고독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바라보는 그곳도 유럽이 아니리 일본, 한국, 중국이었다. 부인 넬리 만은 삶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네 번째 성공했다. 1944년이었다. 넬리 만은 두 번째 부인으로 1933년 망명 이후부터 줄곧 하인리히 만의 평생 반려자로 살았다.

이 세기의 노망명객은 1950년 3월 11일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었을 때 주머니 속에는 독일로 가는 배표가 들어있었다. 막 정권을 수립한 동독 쪽에서 초대 예술원원장으로 모신다며 보내준 돈으로 구입한 배표였다. 79세였다. 하인리히 만은 1946년 자서전 『시대는 시찰(검열)된다』를 출간했다. 지금 하인리히 만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20세기는 무엇을 시찰했는가를! 시대는 무엇을 검열했는가를!

서장원 독문학자

 

-□ ‘망명 지식인(독일편)을 찾아서’가 만날 주요 인물들

△아돌프 히틀러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나치 이론가) △하인리히 만(작가) △안나 제거스(작가) △알프레트 되블린(작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언론인, 영화이론가) △한스 아이슬러(작곡가) △볼ㅏ터 그로피우스(건축가) △에르윈 판오프스키(예술사학자) △칼 만하임(사회학자) △히틀러에게 충성고백한 교수들 △한스 잘(지식인) △망명수학자들 △망명물리학자들 △망명 생물학자 및 화학자들 △빌헬름 황제 협회(KWG)와 자연과학자들 △망명 심리학자들 △망명 경제학자들 △망명 정치학자들 △망명 법학자들 △망명 신학자들

※ 이 목록은 집필자인 서장원 교수의 사정에 따라 다소 바뀔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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