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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에 대한 물음에서 ‘지식’과 ‘가치’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갈 때
‘수단’에 대한 물음에서 ‘지식’과 ‘가치’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갈 때
  •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사회학
  • 승인 2016.09.27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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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세계화 시대의 대학: ‘삶의 교육’ 제창

 대학의 길:
대학은 부를 창출하라는 사명을 띠고 문명의 역사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의 정책 과제이고 산업계 본연의 임무이다. 대학의 존재 이유는 그러한 데 있지 않다. 대학은 삶의 문제와 맞붙는 곳이다. 삶에 대하여 ‘왜’와 ‘어떻게’의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변화하는 시대의 삶과 그 의미를 생각하고 배우고 실천하며 증언하는 터전이다. 그러므로 범세계화 상황도 이익 극대화의 과학기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경제의 부와 연관되는 뜻으로 이해해 그러한 한에서 위기이고 기회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학은 이 상황에서 새삼 함께 새겨야 할 삶의 의미 문제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 범세계화 과정에서 부딪혀야 할 결속 관계의 속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왜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인지를 새겨볼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은 이 문제를 중심부로 다시 끌어들여야 한다. 아무리 학문 연구가 분화돼 전문화하고 있다고 해도, 아무리 대학 교육이 특정 종교 전통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고 해도, 오늘날의 대학이 삶의 의미 문제를 저버리고 끝내 이익과 부의 추구에 종속하는 메마른 조직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대학이 오래 동안 이 문제에 등을 돌려온 것은 부자연스러울뿐더러 자기 직무의 유기다. 이것은 삶의 결속 관계에 관한 문제이고, ‘이웃’에 대한 관심이고 ‘이웃됨’의 도덕 의무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삶의 의미 문제를 도외시하지 못한다.

자본의 이동은 허용하면서 사람의 이동을 불허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일 뿐 범세계 결속 관계의 지배 원리로 수용되기는 어렵다. 국가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면 그것은 모든 영역에 걸쳐 일어나야 한다. 역사의 바퀴는 범세계화의 시대로 굴러가고 있다. 친족에서 국가까지의 결속 관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서로 ‘이웃’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웃됨’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데서 끝난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화 과정을 무시하고 그것을 정지시키고자 하는 실로 우매하고 무모한 짓이다. 문제는 이 변화에 어울리는 ‘이웃됨’의 도덕성이 결속 관계를 뒷받침해주는 버팀목이 되고 삶을 의미 있게 이끌어가는 지침이 되도록 삶의 의미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범세계화의 도덕 가치에 어깃장을 놓는 친족 의식과 민족 국가 의식이 쉽게 누그러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은 이 문명의 역사 가운데 녹아있는 ‘이웃됨’의 덕목 그것의 보편화 과정을 갈고 닦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야 할 동시대인이 서로 ‘이웃’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실천 도덕성을 가르치고 배우며 익히는 일에 이바지해야 한다.      
‘이웃’으로 사는 이 삶의 의미 문제는 가치와 수단으로 분리되지 않는 삶의 통합체로 이해돼야 한다. 이것은 분화된 특정 학문이 다 담아낼 수 없는 삶의 도덕 문제로서, 지난날 대학이 특정 종교 영역에 위임하여 이관시켰을 때와는 다르게 이해돼야 한다. 그때는 특정 신앙 전통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와 그 전제에서 삶의 의미 문제가 풀이됐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 문제를 대학이 교정에서 떼어내어 종교 전통을 관장하는 당국에 넘기고자 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이 삶의 의미 문제를 몰아낸 다음 삶의 문제는 ‘생명 과학’으로 축소되고 생존과 소비를 위한 부의 획득과 이를 위한 경쟁력의 문제로 한정되고, 삶의 의미를 다루는 학문 영역에서도 조사 보고와 자료 축적으로 제한됐다. 삶이란 무엇이고, 어떤 것이 값있고 바람직한 선한 삶이고, 왜 그러한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의 물음은 대학에서 사라졌다.  

대학은 이 삶의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더 이상 특정 종교 전통의 전제 위에서 논의될 필요가 없게 됐다. 굴대(axial) 문명이 낳은 ‘세계 종교들’ 사이의 대화와 협력이 가능해진 범세계화의 상황에서, 일상으로 굳어버린 체제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비판하고 초월할 수 있는 관심의 폭도 그만큼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해, 물질의 부를 절대의 가치로 여기고 무한 소비의 삶을 표적 삼는 현존 질서를 두둔하며 ‘긍정’하지 않고 그 너머, 그것을 초월하는 더욱 높은 가치로 현존 질서를 비판하며 ‘부정’할 수 있는 ‘세계 종교들’의 빛을 받기가 더욱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지난날 서양 대학이 특정 종교 전통의 지배와 그것과의 접착 관계를 불편해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 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현존하는 것보다 ‘더욱 크고 높은 어떤 것’에 대해 끝없이 문을 열어두고자 하는 ‘세속 휴머니즘’도 현존 질서의 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돌파해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아내고 있다. 이처럼 대학이 특정 종교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도 현실의 틀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힘을 받아 대학은 이익 추구, 부의 창출, 이를 위한 경쟁,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들어서 있는 시장 논리가 다스리는 현존 체제의 틀을 질문하고, 이 틀 안에 감금돼 있는 삶을 유일한 목표로 생각하는 이 시대를 ‘부정’할 수 있는 삶의 의미 문제에 마주해야 한다. 이 문제를 교육과 연구와 봉사 그 한 가운데로 끌어들이고, 이 모든 것을 떠받쳐주고 이끌어갈 수 있는 중심 가치로 치켜세워야 한다.
여기서 나오는 삶의 의미는 더 이상 살벌한 경쟁의 싸움터에서 삶을 소진하는 것을 정답으로 설정해 모두를 몰아가는 이 삶의 행태를 ‘긍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손익으로 따져 셈하여 이익과 부에 대한 탐욕을 정당화하는 시장 경제 체제의 신격화와 그 숭상을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경쟁의 승패와 경쟁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오로지 사람이 사람으로서 함께 하는 삶의 결속 관계를 귀히 여긴다. 이 관계는 어제도 의미 있었고 이제도 의미 있고 올제에도 의미 있을 삶의 관계다. 이것은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는 삶을 뜻하며, 자신의 삶 이쪽과 저쪽 ‘이웃’ 모두에 대한 관심과 ‘이웃됨’의 도덕 감정 그 바탕 위에 서있는 관계를 이른다. 

 ‘삶의 교육’:
새 시대는 새 대학을 요청한다. 대학은 국가와 산업체와 짝이돼 이런저런 과제를 분주히 내놓는다. 얼핏 새 것 같지만 실은 이 모두가 오래된 틀 안에서 맴돌 뿐이다. 물질 생산과 소비를 위한 욕구에 몰입해 이에 대한 대응책과 이를 위한 경쟁과 쟁탈이라는 지나간 가락의 읊조림이다. 대학 스스로 이 틀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적응과 순응 그리고 추종을 당연한 일로 친다. 범세계화 상황도 이러한 틀 안에서 이해된다. 범세계 수준의 이웃으로 서로 관심을 나누면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뜻 깊은 결속 관계에 대한 관심은 깡그리 따돌림 받기만 한다. 대학은 새로운 가치 의식에 터한 자체 재구성의 요구를 받고 있다. 한 마디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것은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불어넣는 방향 전환을 감행하는 일이다. 대학은 사나운 경쟁을 헤치고 득세하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 ‘이웃됨’의 삶에서 뜻과 보람을 누리는 ‘삶의 교육’을 마련해야 할 때를 맞고 있다. 이것은 여지없이 뒤틀려 찢겨 갈라진 삶을 다시 붙여 온전한 삶으로 바로 세우는 교육이다. ‘이웃됨’의 결속 관계가 긴 역사의 진화 과정을 밟으면서 어떻게 바뀌어왔는지에 대한 사실과 정보의 전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세계화의 상황에서 그것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 의무와 책임 그리고 헌신의 마음을 불어넣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것은 먹고 살기의 ‘수단’에 대한 물음에서 삶에 대한 ‘지식’의 물음으로 나가고, 그 너머 삶을 새김질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가는 그 ‘삶’에 대한 이론과 여기에 터한 ‘실행’과 하나를 이룬다.  

‘삶의 교육’은 이 이름의 과목 하나를 교과과정에 더하거나 교양기초과목의 하나로 제도화시키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다. 어느 특정 전공 영역에서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이란 다차원인 만큼 이에 대한 배움과 가르침 또한 다차원성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절된 별개의 과목이 돼서는 안 된다. ‘공동 수업’의 팀티칭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학제간 협동과 통합의 교육이어야 한다. 나아가, 이 교육은 삶에 대한 실존의 물음을 던지며 이와 씨름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기에 이것은 교수 중심의 일방 강의가 아니라 수강자와 공동으로 진행하고 공동으로 운영하는 것이 돼야 한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삶의 교육’에서 나온 삶에 대한 생각과 헌신의 마음가짐이 분화된 전공 영역의 방향을 위에서 이끌어가는 ‘가치의 빛’이 돼야 한다. 모든 것을 통제하며 지배해온 오늘날의 저 의기양양한 오만한 학문 분과 모두 자기 본위의 무절제함을 제어하고 조절할 수 있는 더욱 높은 빛 아래에 들어가 그 빛과 끊임없는 긴장을 겪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입시 위주 교육을 한없이 뒤따르기만 하는 것은 온전한 삶에 대한 모욕이다. ‘이웃됨’을 배우고 가르치는 대학이라면 모름지기 틀에 박힌 입시 준비는 시간 낭비이고, 그러한 데서 경쟁을 심화시키는 제도란 ‘이웃됨’에 대한 동감 능력을 원천 차단하는 권력의 잔인한 통제 방식이고 그 횡포라고 외치며 이에 맞서야 한다.

삶의 문제는 젊은이의 전유물이지 않다. 그것은 삶터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 모두가 나누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한 뜻에서 대학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새로운 개방성’을 실행해야 한다. 대학은 누구 할 것이 언제이고 들어올 수 있는 배움터이어야 하고, 삶터와 일터가 뗄 수 없게 이어진 배움의 마당이어야 하며, 학생을 집결시키는 물리 공간이 아니라 배우는 자 중심으로 흩어져 뻗어나가는 작은 캠퍼스들의 그물망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삶의 교육’, 곧 이웃과 이웃으로 함께 어우러져 사는 ‘이웃됨’의 교육이 얼마나 체계 있게 실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대학의 품위를 일러주는 척도이어야 한다.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사회학  
필자는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공부했다. 현재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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