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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적이거나 거시적인 시선 … 삶과 ‘운동’의 전환 짚었다
미시적이거나 거시적인 시선 … 삶과 ‘운동’의 전환 짚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9.19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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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호 계간지 리뷰

‘우리 시대의 악’, ‘페미니즘, 새로운 시작’(<문학동네> 88호), ‘데이터 사회’(<문화과학> 87호), ‘도시로 읽는 1949년 이후의 중국②’, ‘새롭게 보는 정조와 19세기② 정조와 세도정치’(<역사비평> 116호), ‘위기의 자본주의, 전환의 계기들’(<창작과비평> 173호), ‘중국과 非중국: 타이완과 홍콩 다시보기’(<황해문화> 92호). 가을 계간지들이 들고 나온 특집 혹은 기획이다. 비슷한 주제를 탐색하던 데서 벗어나 각 매체의 자장에 맞는 주제 모색이 더욱 뚜렷해졌다고 해야 할까. 더구나 몇몇 계간지들은 일정한 사태를 겪으면서 편집위원들의 교체가 이뤄졌고, 그 연장선에서 다져진 기획을 내놓은 터라, 이러한 색깔은 앞으로 더욱 뚜렷해질 수도 있다. 2017년 대선이란 거국적 사안이 놓여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도 이들 특집에는 어떤 공감대가 엿보인다. <문학동네>의 특집은 ‘강남역 살인사건’에 나타난 여성혐오와 직결되고, <문화과학>의 특집은 데이터 과잉 혹은 빅데이터가 놓이는 맥락을 짚어낸다는 점에서 그 어떤 이슈보다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사안에 집중한 셈이다. 이들이 좀 더 미시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면, <역사비평>의 특집은 동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19세기와 20세기를 읽어내는 큰 작업으로 읽힌다. 그 연장선에 <황해문화>의 타이완과 홍콩 읽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독법과 평행하는 것으로 <창작과비평>의 특집, 자본주의 전환을 말하는 진단이 서 있다. 지적 프레임이 그렇다는 말이다.

<문학동네> 편집위원 강지희는 이렇게 썼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여성을 향한 혐오와 위협적인 범죄들은 종식될 기미없이 계속되는 중이다. 이에 대한 응답은 제각기 다른 곳에서 시작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려는 의지를 놓지 않는 것, 두려움과 체념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이를 둘러싼 구조에 대해 사유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특집 ‘페미니즘, 새로운 시작’은 그런 응답의 하나인 셈이다. 여기 수록된 조혜영의 글 「상호매개적 페미니즘-메갈리아에서 강남역 10번 출구까지」가 흥미롭다. 디지털 페미니스트 주체의 언어가 자기생성을 시작했다고 보는 조혜영은 이렇게 말한다. “디지털 주체는 불연속적이고 이산적이며, 상호매개적이고 복잡하며 다면적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계가 교섭하며 양쪽 모두에 변화를 미치는 방식으로 디지털 페미니스트 주체는 움익이고 있다. 이들을 포착하기 위해선 단일하고 일관적인 프레임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디질털과 페미니즘이 결합한 메갈리아가 어떠한 주체로 창발돼 나가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현재로서는 ‘데이터 사회’라는 명명은 확실히 논쟁적이고 유보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명명이 의미를 갖는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화의 그림자를 겨냥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문화과학> 편집위원들은 이렇게 썼다. “오늘의 데이터과잉 국면에서 데이터 주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지, 데이터 저장기계들이 어떻게 권력의 장치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 깊게 각인된 자본과 권력의 기제와 형식과 어떻게 마주치는지를 살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특집 ‘데이터사회’에는 「데이터사회의 형성과 대항장치의 기획」(이광석), 「나 자신의 데이터가 되다: 디지털 자기-기록 활동과 데이터 주체」(김상민), 「플랫폼 담론과 플랫폼 자본: 삶정치 노동의 확장」(김동원), 「산업사회와 데이터사회에서 작동하는 물신주의」(김성일), 「협력과 공생을 위한 디지털 인문학」(임태훈) 등 다섯 편의 글이 실렸다. 임태훈의 글은 클리셰한 주제를 다뤘음에도 어떤 혜안을 보여준다. “데이터 기술을 활용해 유의미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선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일부터 우선돼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의 파행적 대학 현실에서는 “아카이브 구축에만 십 년 이상 꼬박 매달릴 수 있는 전문적인 연구자가 자생적으로 생겨나길 바라는 것은 허튼 꿈에 불과하다”라고 일침을 놓는다.

‘현재의 중국을 분석하기 위한 소재’로서 도시를 설정한 <역사비평>은 특집보다 함께 구성한 정조 시대 읽기 기획이 더 눈길을 끈다. 「19세기 부세 운영과 ‘향준공론’의 대두」(송양섭), 「19세기 정조의 잔영과 그에 대한 기억」(노대환), 「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및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대화」(오수창) 등 세 편의 글이 한자리에 모였다. 송양섭은 19세기에 등장한 ‘향중공론’이 “체제 모순의 일탈적 표출인 동시에 담론 주도세력의 독점적 지위에 균열을 가져와 종래와 다른 독자적인 ‘公’ 영역의 형성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말하면서, 왕조정부도 이를 체제내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됐다고 지적했다. 노대환은 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잔영’과 ‘기억’의 문제를 겨냥했다. 그가 보기에 19세기는 정조 대의 정치에 대한 반성이 더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정약용 정도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조를 치켜세우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억을 끌어내 이용하기에 급급한 시기였다. 그가 “최근 정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조 시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이 그려진 정조는 실상과 동떨어진 허상일 수밖에 없다. 19세기 사람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지금 우리들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고민해볼 시점이다”라고 꼬집은 것은 그런 인식 때문이다.

반면 오수창의 글은 <역사비평>115호(여름호)에 실린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최성환)에 대한 반론으로 실렸는데, 중요한 지적을 던졌다. “필자와 같은 연구자들은 정조 개인의 역량이나 성실성을 평가하는 데 주된 관심을 두지 않을 뿐이다.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것은 중세 사학에서 하던 일이지, 근대 역사학의 본령이 아니다.” 오수창은 ‘근대 역사학의 본령’을 강조했다. 개인과 개인의 역능이 아니라 이것들을 모두 안고 있는 구조적 긴장 관계 속에서 정조와 19세기를 읽어내야 한다는 훈수다. 그가 정조의 정치를 19세기 세도정치라는 조선후기 정치사와 밀접한 ‘계기성의 중요한 고리’로 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다소 돌발적이며 의외의 手로도 읽히는 <황해문화>의 ‘중국과 비중국’ 특집은 편집위원 백원담의 글 속에 쉽게 해소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중국과 타이완, 중국과 홍콩, 혹은 양안 삼지의 익숙한 관계와 교통의 결들이 동남아시아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북한 등 다른 아시아에서 이동하는 노동, 결혼 이주, 문화교통 등과 중첩되고 교차되면서 인터아시아적 견지에서 보면 또 새롭게 구성되고 구축되고 있는 것이 바로 아시아라는 권력”인데, 여기에 타이완과 홍콩이라는 장소의 실천성이 매우 주목된다는 것이다. 백원담-천광싱의 대담 「타이완과 홍콩 그리고 사상의 일대일로」가 문제의식을 집약했으며, 이어 「‘이 폐허를 응시하라’: 홍콩 우산혁명과 그 이후의 갈등이 드러낸 것」(장정아), 「타이완 정부의 ‘비중국 요인’ 조절과 양대국 사이의 ‘신남향 정책’」(천신싱), 「홍콩 본토파와 ‘메뚜기론’: 신세기의 우익 포퓰리즘」(베리 사우트먼·옌하이룽), 「중국은 어떤 국가가 될 것인가: 타이완·홍콩 문제를 보는 한 가지 시각」(백지운) 등의 글을 준비했다.
특히 천광싱은 백원담과의 대담에서 타이완과 홍콩 문제를 역사적 범주에서 바라보고 비민족주의적이고 아시아 권역적인 견지에서 재맥락화를 요구해 눈길을 끌었다. 즉, 식민화는 정치적 국가독립과 함께 극복된 것이 아니라 정신·경제·제도적으로 연속돼왔다는 점에서 민족국가의 틀 속에서 단절된 역사서술이 아닌 양안삼지가 상호 내재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역사서술을 해나갈 것을 지식기획으로 제안했다.

<창작과비평> 역시 <황해문화>와 같은 방식으로 특집을 구성했다. 대담을 앞에 놓고 관련된 글을 배치했다는 뜻이다. 데이비드 하비와 백낙청의 특별대담 「자본은 어떻게 작동하며 세계와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는 <황해문화>의 중국 읽기와 겹쳐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어 「실현의 위기와 일상생활의 변모」(데이비드 하비), 「지구적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교육개혁의 길」(김종엽), 「몸과 기억의 반란」(서영표), 「기후변화, 인공지능 그리고 자본주의」(이필렬) 등의 글이 놓였다. 편집위원 백영경은 이렇게 봐달라고 썼다. “현 시대 자본주의체제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와 위기적 양상에 주목하면서 그에 따라 우리 일상은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를 우선 살핀 후에, 탄탄한 현실 진단에 기초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사회운동의 대안을 모색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주시기 바란다.” 변화와 위기 양상, 일상의 변모를 연계하는 독법은 꽤 오래된 것인지라 별로 새롭지 않지만, 이들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사회운동의 대안’을 모색하려는 데 방점을 치고 있다는 것만큼은 신선하다. 다양한 사회운동과의 결합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겠다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교육개혁, 몸, 기후변화 논의 재검토 등을 제시한 게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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