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6 21:55 (화)
정교하면서도 매혹적인 기술 …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최고 精髓
정교하면서도 매혹적인 기술 …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최고 精髓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6.09.07 11: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대환의 文響_ 38. 전 공민왕릉출토 황금유물
▲ 사진② 황금합

고려시대는 이러한 형태의 靑磁龍頭杯도 만들었으며 銀이나 金銅으로도
제작했지만 金으로 제작된 사례는최초다. 중국의 송나라나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도 비슷한 龍頭杯가 제작돼 전해오지만
조각기법의 예술성에서 이 유물을 따라 올 수가 없다.

외세가 득세하던 대한제국말기에 쇠약해진 우리나라의 영토에서 강대국 간의 식민지전쟁이 벌어졌으니, 바로 러시아와 일본제국주의의 러일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최대의 피해를 입은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였다. 특히 힘없는 백성이 희생양이 됐다.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러시아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進軍徑路에 산재해있던 우리 문화재의 약탈을 서슴지 않았는데, 개성의 恭愍王陵 역시 盜掘 대상으로 지목됐다. 일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도굴을 시도했으나 지역주민의 거센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1905년 비가 쏟아지는 야밤에 군대를 동원해 폭약으로 왕릉 뒤의 護石을 폭파해 무덤의 현실로 침입해 유물을 모두 강탈했다. 10여대의 수레에 가득 실어 약탈했다고 하니 그 유물의 양이 엄청 많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이미 일제에 의한 문화재약탈행위가 성행해 왕릉급 고분들은 도굴의 대상 1순위로 지목받고 약탈되고 있었던 것이다.

▲ 사진④ 황금합 뚜껑의 문양

공민왕은 고려 제31대왕으로 매우 총명하고 자주적이었던 왕으로 원나라의 내정간섭기관인 쌍성총관부,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개혁에 의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을 했으나 왕비인 魯國公主가 난산으로 죽자 실의에 빠져 정치를 등한시 하다가 최만생 일파에게 살해당했다.
사진 ① ② ③의 유물들은 모두 황금으로 제작됐으며 黃金龍頭杯, 黃金盒, 黃金裝身具2雙으로 대한제국 혼란기 일본제국주의자에 의해 약탈된 恭愍王陵의 유물 중 일부로 전해지며 몇 해 전에 공개돼 국민적인 조명을 받았다. 근대 혼란기에 강탈됐던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지 않고 국내에 잘 보존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황금용두잔(金製龍頭花形杯)은 길이 11.8cm, 높이 3.8cm, 중량 145g, 용량 90ml.의 술잔이다. 화려한 寶相華의 몸체에 손잡이를 용의 머리로 만들어 붙였다. 이 황금잔의 몸통 제작기법은 주조틀에 부어 성형하지 않고, 금판을 꽃잎의 전개도 형상으로 두껍게 만들어 위로 들어 올려 접합제작한 것으로 매우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기법으로 제작됐으며, 꽃잎의 골마다 그 접합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용머리 모양의 손잡이는 별도로 제작해 몸통의 꽃잎 골 사이에 붙였다. 문양의 조각은 잔의 안바닥과 몸통에 해당하는 6옆의 꽃잎과 손잡이인 용두부분으로 나눠지는데, 털끝처럼 가늘고 섬세하게 조각 하는 毛彫技法으로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안바닥의 문양은 불교에 등장하는 전설의 꽃인 寶相華文을 새겼고 몸통의 외부에는 피어오르는 세 송이의 연꽃봉오리와 蓮花折枝文을 조각했다. 상단부에는 연꽃넝쿨문양을 빼곡한 魚子文의 바탕위에 정교하게 조각했다. 손잡이인 龍頭는 용의 눈, 눈썹, 이빨, 비늘, 수염까지 빠짐없이 섬세하게 새겨넣었다. 평면조각인 잔의 안바닥을 제외하고 몸통과 손잡이의 조각은 바탕이 곡면이라 매우 능숙하고 정교한 기술을 갖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없는 것으로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최고의 精髓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이러한 형태의 靑磁龍頭杯도 만들었으며 銀이나 金銅으로도 제작했지만 金으로 제작된 사례는 최초다. 중국의 송나라나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도 비슷한 龍頭杯가 제작돼 전해오지만 조각기법의 예술성에서 이 유물을 따라 올 수가 없다.
용두 손잡이의 좌측면 몸통윗부분의 입술부분에는 공민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빨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2006년에는 유물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한국조폐공사에서 현대의 기술로 複製品을 제작했으나, 800여년 전 고려장인의 毛彫技法 조각술은 이미 단절돼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했다.

황금합(金製蓮花波魚文盒)은 높이 7cm, 지름 5.5cm로 뚜껑과 몸체가 각기 반반으로 돼있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합이다. 뚜껑과 몸통은 대칭이 되도록 제작했고 몸통의 바닥면에 넓고 안정된 굽을 붙였다. 측면의 중앙부분에는 한 줄씩의 넓은 금판을 별도 제작해 붙여 장식적인효과를 극대화시켰고 기형의 안정감을 잡아 주었다. 측면의 문양은 연꽃, 연잎, 연자 등이 넝쿨과 함께 화려하게 毛彫技法으로 조각했으며 바탕은 魚子文으로 빈틈없이 정연하게 꽉 채웠다. 바닥면에는 황금용두잔의 안 바닥과 거의 유사한 寶相華文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측면의 연꽃넝쿨문양도 황금용두잔의 몸통 상부에 조각된 문양과 거의 일치한다. 뚜껑 윗면은 중앙의 작은 원안에 연꽃 한 송이를 중심으로 파도 속에 헤엄치는 네 마리의 물고기를 너무도 정교하게 彫刻했고 그 뒤로 둥그런 원형의 파도문양을 묘사했다. 작은 물고기의 비늘, 지느러미, 아가미, 눈알까지도 섬세함의 극치를 느끼게 한다(사진④).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파손돼 복원한, 얇은 銀에 도금을 한 銀製鍍金盒이 비슷한 유형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유물의 재료나 조각기법에서는 이 유물만큼 섬세하지는 못하다. 이 황금합의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王의 藥盒이나 茶盒, 香盒으로 추정된다.
黃金裝身具2雙은 대체로 가로, 세로 폭이 각 3.5cm 정도다. 고려시대 古墳에서 출토되는 장식품으로

▲ 황금용두잔의 도면(한국조폐공사)

옷이나 冠帽에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장식품은 옥, 뼈, 금동, 은제도금, 은 등으로도 다양하게 제작했으며 모양과 크기도 매우 다양하다. 얇은 金版을 만들어 앞면과 뒷면을 붙였으며 속은 비어있다. 일정한 틀에 부어 대량으로 만든 주조품이 아니라 일일이 오려 조각한 장신구로 역시 毛彫技法의 섬세함이 살아있다. 四神圖의 玄武文장신구(사진③-1)는 도교적인 색체가 강하고 당시 불교에 융합된 도교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며 (사진③-2)의 구름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한 쌍의 학은 섬세한 깃털까지도 잘 조각했고 神仙思想을 의미하는 것으로 역시 도교와 관련이 있다.
대한제국 혼란기에 공민왕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 황금유물들은 고려시대 왕실의 金, 銀器 제작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掌冶署에서 특별히 주문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